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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제주 4.3사건을 말하다
권오강 외 9인 | 유페이퍼 | 2015-05-01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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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제주 4.3사건을 말하다
권오강 외 9인 | 유페이퍼 | 2015-05-01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7-14)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책 소개
제주 4.3사건은 분명하다.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이다. 물론 희생자도 있다. 그러나 반역죄를 가진 사람도 ‘제주 4·3 평화공원’에 희생자로 기록되었다. 역사는 분명한데 해석에 따라 마음대로 기록되고 추모하는 실정이다. 논리는 구분을 잘해야 한다. 구분을 못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희생자와 반역세력을 구분해서 추모와 배격을 해야 한다.
좌경세력인 노무현 정권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라고 같은 대통령이 이나다. 과거 1980년대 공산주의자와 주사파 세력이 주도적인 역할이 있었다. 노무현 정권이 제주 4.3사건을 마음대로 해석했다.
아픔이 있을지언정 사관과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뜻있는 자들이 모여서 세미나를 개최하고 연구, 분석한 것을 발표했다. 이런 책은 쉽게 읽혀지지 않지만 반드시 기록으로 보관되어야 한다.
책 속으로
생일 없는 사람 없다. 생일 없는 국가도 없다. 조선인민공화국의 공식적 생일은 1948년 9월 9일이다.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다 생일이 있고, 건국의 리더가 연년세세 존경과 기림을 받고 있다. 김일성도 북한에서는 건국의 신이다. 그런데 세계에서 유독 생일이 없는 나라가 있다. 바로 대한민국이다.
1948년에는 이 땅에 거대한 역사사건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건국을 방해한 제주4.3반란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이런 공산주의자들의 집요한 폭동과 선동을 극복하고 대한민국을 세운 8.15건국 사건이다. 4.3반란사건을 일으킨 제주 게릴라 사령관은 24세에 불과한 김달삼이었고, 이를 토벌하면서 이 나라를 세운 대한민국 대통령은 73세의 이승만 박사였다,
김달삼은 1948년 8월 2일, 제주를 탈출하여 그해 8월 25일 해주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한 후 1950년 태백산 공비로 이용당하다가 사실됐다. 소영웅심에 개념 없이 날뛰다 26세에 생을 마감한 공산당 청년에 불과했다. 반면 이승만 박사는 한 때 공산주의를 선호했던 70%의 대한민국 국민을 배경으로 한 남로당의 끈질긴 폭동과 저항을 물리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김구, 김규식 등 정치적 반대세력의 질투성 방해를 이겨내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4.3유혈반란사건과 8.15건국사건, 이 두 개의 사건 중 어느 것이 대한민국의 정통역사에 포함돼야 하고 어느 것이 반란의 역사로 분류돼야 하는 것인지 국가는 확실하게 정해야 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대한민국의 건국역사를 땅에 묻고 4.3반란역사에 훈장을 달아주었다.
노무현은 박원순을 시켜 4.3사건에 대한 ‘정부보고서’(‘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를 냈고, 이 보고서의 건의에 따라 노무현은 2003년 8월 31일 직접 제주도로 날아가 김달삼을 승자로, 이승만을 패자로 선포했다.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과거 이승만 정부가 제주도 주민에게 불법을 저질렀다고 선포한 후, 제주도 주민과 집단살인자 이승만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1,500-30,000에 이른다는 희생자들에게 정부가 진심으로 무릎 꿇고 사과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이에 연달아 2014년 3월 18일 박근혜는 해마다 국가 대표인 대통령이 제주도로 날아가 “독재자 이승만과 제국주의의 원흉인 미군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된 항쟁 희생자들의 원혼을 위로하는 의미의 절을 하기로 공식화했다.
대한민국은 4.3사건 역사에 관여한 노무현과 박근혜에 의해 거듭 국가의 자격을 거부당해온 것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을 거부하고 짓밟은 사람들이 대한민국 대통령을 할 수 있는 나라가 이 천한 나라 대한민국이다. (중략)
제주도에는 당시 무장 공비들이 전투 훈련장소로 이용했던 제주시 동부 봉개동에서 12만평을 떼어내 ‘제주 4·3 평화공원’을 건립했다. 그 안에는 592억원을 들여 제주 4·3 평화기념관’을 건립하고 거기에 3개층에 걸친 전시공간을 글과 그림과 조형물들로 채워, 4.3반란사건이 애국적인 사건이라고 표현한 반면, 이승만에 대해서는 독재자요 학살자라고 표현했다.
마을의 유지들을 살해한 빨갱이 형제들이 “토벌대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불쌍한 사람”이라며 그의 위패를 높이 모시고 있다. 제주 유격대는 절대로 양민을 학살하지 않은 반면 군경이 양민을 마구 살해했다고 선전한다.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 될 악이라는 것을 선전하는 기념관에 국가가 1,000억 규모의 국가예산을 대주었고, 이에 더해 해마다 여기에 매달린 죄익들의 생계와 운영비 등으로 수십억 단위의 예산을 퍼주고 있다.
반면 이승만기념사업회가 마련했던 비석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라는 글자들이 새겨진 비석은 이승만 대통령 묘지 한 구석에 깊이 파묻혀 있다. 그리고 지금은 겨우 “초대대통령 이승만의 묘”라고만 되어 있다. 목슴을 걸고 건국을 방해한 김달삼은 제주 평화공원에서 이승만과 미군을 상대로 평화와 통일을 위해 싸운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지금도 그가 건국한 대한민국과 함께 묶여 천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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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풍속화의 천재화가 김홍도
한국문화 편집국 | 이북스펍 | 2014-03-1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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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풍속화의 천재화가 김홍도
한국문화 편집국 | 이북스펍 | 2014-03-1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7-14)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조선시대 위인들 그들을 조명한다.
조선시대 최고의 화원 김홍도. 실력만 좋은 화원이 아닌 김홍도는 당시 양반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했던 상민, 중인, 천민들의 일상생활을 그린 풍속화가로서 대중들의 삶을 조명한 화가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위인이다. 또한 당시 화원세계는 무척 폐쇄적이었음에도, 실력 하나로 당대 최고의 화원이 된 김홍도의 삶은 매우 치열하고 열정적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위인들의 삶을 통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생각하게 하려고 이 글을 집필한다. 단원은 어릴 적부터 그림을 공부하여 못 하는 것이 없었다. 인물, 산수, 신선, 불화, 꽃과 과일, 새와 벌레, 물고기와 게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묘품(妙品)에 해당되어 옛사람과 비교할지라도 그와 대항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특히 신선과 화조를 잘하여 그것만 가지고도 한 세대를 울리며 후대에까지 전하기에 충분했다. 또 우리나라 인물과 풍속을 잘 그려내어 공부하는 선비, 시장에 가는 장사꾼, 나그네, 규방, 농부, 누에 치는 여자, 이중으로 된 가옥, 겹으로 난 문, 거친 산, 들의 나무 등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를 꼭 닮게 그려서 모양이 틀리는 것이 없으니 옛적에는 이런 솜씨는 없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대체로 천과 종이에 그려진 것을 보고 배우고 익혀서 공력을 쌓아야 비로소 비슷하게 할 수 있는데, 단원은 독창적으로 스스로 알아내어 교묘하게 자연의 조화를 빼앗을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천부적인 소질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김홍도는 조선 후기의 화가이다. 김홍도의 본관은 김해 이며, 그의 자는 사능, 호는 단원이다. 그래서 단원 김홍도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단원은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의 단원에서 따왔다. 조선 시대 정조 때 대표적인 화가로 산수화, 풍속화등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화가이지만 고사인물화, 신선도, 화조화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독창적인 회화를 구축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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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백정 이야기
차상찬 | 온이퍼브 | 2015-09-04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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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백정 이야기
차상찬 | 온이퍼브 | 2015-09-04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7-14)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조선의 백정 이야기》는 언론인이며 사학자였던 선생의 유고를 모아서 출판한 《조선사외사(朝鮮史外史)》의 ‘제도와 풍속’편(명성사 刊)을 옮긴 것이다. 동 시리즈로 제2권 역대 인물열전, 제3권 명승·고적·명물과 역사상 유서 있는 화(花)·조(鳥)·수(獸), 제4권 잡편(雜篇)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전하는 것은 1권 본책 뿐이다.
여러 가지 우리나라의 정치, 사회, 문화에 관련한 그의 저서를 통해 새롭게 역사 이외의 감추어진 진실을 추념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이 책은 전자책 각각 7권으로 출간되었다. ‘조선의 성씨 이야기, 조선의 과거제도 이야기, 조선의 징병제도 이야기, 조선의 보부상 이야기, 조선의 봉화 이야기, 조선의 백정(白丁) 이야기, 조선의 명절과 놀이문화’이다. 도우(屠牛)(소를 때려잡음)의 일을 맡게 된 사람의 자손이 이에 백정이 되었다는 신화적 전설이 있다. 또한 기자(箕子)가 8개조의 법률을 만들 때에 천민을 깎아내리고 헐뜯고 하였는데 그들이 이후에 백정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백정이라고 말하는 것은 도살(屠殺), 제혁(製革), 기류세공(杞柳細工)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명칭이다. 이른바 도한(屠漢), 도우탄(屠牛坦), 포노포정(?奴?丁), 도척(刀尺), 피장(皮匠), 피한(皮漢), 유기장(柳器匠) 등은 모두 직업적으로 본 백정을 경멸하는 명칭들이다. 백정은 국민의 자격이 없었다. 역대 법전 상에도 특히 법령 규정 외에는 백정의 신분에 관하여 어떠한 규정이 없었다. 따라서 입학이나 과거 시험 기타 나라의 공적 참정권을 누리지 못하고 병역, 납세의 의무도 부과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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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보부상 이야기
차상찬 | 온이퍼브 | 2015-09-23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7-14) |
239 |
[역사] 조선의 보부상 이야기
차상찬 | 온이퍼브 | 2015-09-23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7-14)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조선의 보부상 이야기》는 언론인이며 사학자였던 선생의 유고를 모아서 출판한 《조선사외사(朝鮮史外史)》의 ‘제도와 풍속’편(명성사 刊)을 옮긴 것이다. 동 시리즈로 제2권 역대 인물열전, 제3권 명승·고적·명물과 역사상 유서 있는 화(花)·조(鳥)·수(獸), 제4권 잡편(雜篇)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전하는 것은 1권 본책 뿐이다.
여러 가지 우리나라의 정치, 사회, 문화에 관련한 그의 저서를 통해 새롭게 역사 이외의 감추어진 진실을 추념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이 책은 전자책 각각 7권으로 출간되었다.
‘조선의 성씨 이야기, 조선의 과거제도 이야기, 조선의 징병제도 이야기, 조선의 보부상 이야기, 조선의 봉화 이야기, 조선의 백정(白丁) 이야기, 조선의 명절과 놀이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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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 |
[역사] 조선의 징병제도 이야기
차상찬 | 온이퍼브 | 2015-09-03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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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징병제도 이야기
차상찬 | 온이퍼브 | 2015-09-03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7-14)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조선의 징병제도 이야기》는 언론인이며 사학자였던 선생의 유고를 모아서 출판한 《조선사외사(朝鮮史外史)》의 ‘제도와 풍속’편(명성사 刊)을 옮긴 것이다. 동 시리즈로 제2권 역대 인물열전, 제3권 명승·고적·명물과 역사상 유서 있는 화(花)·조(鳥)·수(獸), 제4권 잡편(雜篇)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전하는 것은 1권 본책 뿐이다.
여러 가지 우리나라의 정치, 사회, 문화에 관련한 그의 저서를 통해 새롭게 역사 이외의 감추어진 진실을 추념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이 책은 전자책 각각 7권으로 출간되었다.
‘조선의 성씨 이야기, 조선의 과거제도 이야기, 조선의 징병제도 이야기, 조선의 보부상 이야기, 조선의 봉화 이야기, 조선의 백정(白丁) 이야기, 조선의 명절과 놀이문화’이다.
〈서평〉
-본문 중에서
나라 조정에서 처음으로 승려에게 큰 공역(公役)을 부과한 것을 결정한 것으로 그런 이유로 해서 나라에 무슨 큰 공역이 있을 때에는 항상 승려들을 사역하도록 하였다.
본관이란 것은 그냥 얼른 생각하면 우스운 것 같지만 실은 남자 핏줄 혈족의 시조발상지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성 제도에 있어서 절대 필요한 것이다.
인조 때 갑자년에는 남한산성을 축조하였으며 숙종 5년 기미년에는 모든 도통한 승려들로 강화 돈대(墩臺)를 쌓았다. 또한 그때 숙종 37년 신묘년에는 북한산성을 쌓았다.
선조 때 임진왜란을 당해 유명한 서산대사는 승려군사 1,500명을 인솔하고 평안도 순안 법흥사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뛰어난 제자 유정(惟政)은 7백 명의 승려로 강원도 간성 건봉사(乾鳳寺), 처영(處英)은 천 명의 승려로 전라도, 영규(靈圭)는 충청도 공주 갑사, 해안(海眼)은 진주, 의엄사(義嚴寺)도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 무리들이 5천 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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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의 역사 01. 우리 역사의 기원과 고대 국가의 형성
이현희 | 청아출판사 | 2015-02-0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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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의 역사 01. 우리 역사의 기원과 고대 국가의 형성
이현희 | 청아출판사 | 2015-02-0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7-14)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이야기 한국사》로 100만 독자를 사로잡은 이현희 교수의 필생의 역작!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는 우리 조상들이 열심히 살아온 발자취로서 그것은 오늘날 우리 생활로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힘차게 전개되어 갈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고 주체적으로 터득하는 것은 그것을 토대로 내일의 나아갈 바를 설계하고자 함이다.
수많은 외침을 극복하면서 우리 민족이 이처럼 오랜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켜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오랜 세월동안 도전과 응전 속에서 새롭게 다져진 우리의 역사는 주변국과의 관계 속에서 독자성을 띠며 성장해 왔다. 평화교류를 하고 우수한 문화를 전파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위기에 처하여 온 국민이 혼신의 힘을 바쳐 내 조국 내 겨레를 지켜내는데 총화단결의 의지를 보여 극복해 나가기도 하였다. 강인함으로 우리 역사와 문화를 창조하고 계승해 왔다는 점을 흘러온 역사를 통해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원동력은 곧 우리 선조들의 슬기이자 용맹이며 올바른 가치관의 실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반만년의 역사는 선조들의 피땀 어린 조국수호와 발전이라는 의지의 결과물이며 창조와 저항의 눈부신 기록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고 더 나은 내일에 적용시켜야 할 것이다.
한국 역사의 꽃이 피어나다.
《한국의 역사》 시리즈 1권은 5천 년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단군 신화에서부터 시작한다. 단군이 건국한 고조선은 같은 시기의 부여와 삼한을 비롯한 주변 국가와 빈번히 교류하였고, 멸망 후에는 고구려, 신라, 백제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렇듯 우리 역사의 깊은 뿌리를 찾기 위해서는 고조선과 삼한 시대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필수적이라 할 것이다. 이에 사료와 옛 사람들의 발자취, 즉 유물을 통하여 고조선, 삼한 시대를 비롯한 고대사를 두루 살폈다. 특히 우리 민족의 근간인 마한, 진한, 변한, 옥저, 예맥 사람들의 생활사를 담아내 당대의 국가조직, 풍속, 대외관계 등을 이해할 수 있게 했다.
단군 신화에서부터 격동의 현대사까지 한국의 역사를 집대성하다
우리나라의 방대한 역사를 시대순에 따라 일관성 있게 흐름을 이해시키며 담아냈다. 대부분의 한국사 통사(通史)는 지나치게 어렵거나, 지나치게 재미만을 서술하거나, 혹은 모든 분야를 망라하다 보니 책의 중심 자체가 흔들리는 일도 많았다. 《한국의 역사》는 이러한 점을 간과하지 않았으며 쉽게 서술하면서도 풍성한 내용을 담았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서술된 기존 역사서에 아쉬움을 느꼈거나 어렵게 쓰여 역사는 따분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 어렵지 않게 역사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구성된 역사 이야기
왕조 정치사 중심이 아니라 생활사적인 차원에서 서술한 것이 특징이다. 그렇기에 딱딱하지 않고 재미난 이야기를 전해 듣듯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쉽게 역사를 접하려는 청소년 독자층부터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를 기대하는 성인 독자층까지 아울렀다.
역사 안에 숨 쉬고 있는 다양한 인물과 사건들을 만나다
《한국의 역사》 시리즈에는 다양한 역사적 인물들과 사건들이 등장해 당대의 문화·정치·사회 풍조 등 모든 분야를 총 망라해 전해준다. 기생 출신 권력자 나합 양씨의 이야기, 먹고 살기 어려워 도적이 된 전양산 이야기, 일제 총독과의 인연으로 군수로 승진한 정씨 이야기 등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인물들 외에도 개성 넘치는 인물들이 등장해 우리 선조들이 살아왔던 리얼한 역사를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다양한 속담과 언어유희가 때때로 등장해 지루할 틈 없이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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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의 역사 02. 삼국의 성장과 발전
이현희 | 청아출판사 | 2015-02-0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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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의 역사 02. 삼국의 성장과 발전
이현희 | 청아출판사 | 2015-02-0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7-14)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이야기 한국사》로 100만 독자를 사로잡은 이현희 교수의 필생의 역작!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는 우리 조상들이 열심히 살아온 발자취로서 그것은 오늘날 우리 생활로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힘차게 전개되어 갈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고 주체적으로 터득하는 것은 그것을 토대로 내일의 나아갈 바를 설계하고자 함이다.
수많은 외침을 극복하면서 우리 민족이 이처럼 오랜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켜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오랜 세월동안 도전과 응전 속에서 새롭게 다져진 우리의 역사는 주변국과의 관계 속에서 독자성을 띠며 성장해 왔다. 평화교류를 하고 우수한 문화를 전파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위기에 처하여 온 국민이 혼신의 힘을 바쳐 내 조국 내 겨레를 지켜내는데 총화단결의 의지를 보여 극복해 나가기도 하였다. 강인함으로 우리 역사와 문화를 창조하고 계승해 왔다는 점을 흘러온 역사를 통해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원동력은 곧 우리 선조들의 슬기이자 용맹이며 올바른 가치관의 실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반만년의 역사는 선조들의 피땀 어린 조국수호와 발전이라는 의지의 결과물이며 창조와 저항의 눈부신 기록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고 더 나은 내일에 적용시켜야 할 것이다.
《한국의 역사》 시리즈 2권에서는 우리나라 역사상 인물이 가장 많이 배출된 삼국시대를 다룬다. 을지문덕, 성충, 계백, 김유신 등 지혜와 꾀로 조국에 충성한 인물들과 사건을 통해 어느 때보다 화려했던 삼국시대를 돌아본다. 수많은 질시와 반목 속에서 수많은 전쟁을 거듭했던 삼국시대. 부족 국가에서 고대 국가로 전환 되는 기로에서 민족의 계보와 각 국의 특성을 살펴본다.
단군 신화에서부터 격동의 현대사까지 한국의 역사를 집대성하다
우리나라의 방대한 역사를 시대순에 따라 일관성 있게 흐름을 이해시키며 담아냈다. 대부분의 한국사 통사(通史)는 지나치게 어렵거나, 지나치게 재미만을 서술하거나, 혹은 모든 분야를 망라하다 보니 책의 중심 자체가 흔들리는 일도 많았다. 《한국의 역사》는 이러한 점을 간과하지 않았으며 쉽게 서술하면서도 풍성한 내용을 담았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서술된 기존 역사서에 아쉬움을 느꼈거나 어렵게 쓰여 역사는 따분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 어렵지 않게 역사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구성된 역사 이야기
왕조 정치사 중심이 아니라 생활사적인 차원에서 서술한 것이 특징이다. 그렇기에 딱딱하지 않고 재미난 이야기를 전해 듣듯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쉽게 역사를 접하려는 청소년 독자층부터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를 기대하는 성인 독자층까지 아울렀다.
역사 안에 숨 쉬고 있는 다양한 인물과 사건들을 만나다
《한국의 역사》 시리즈에는 다양한 역사적 인물들과 사건들이 등장해 당대의 문화·정치·사회 풍조 등 모든 분야를 총 망라해 전해준다. 기생 출신 권력자 나합 양씨의 이야기, 먹고 살기 어려워 도적이 된 전양산 이야기, 일제 총독과의 인연으로 군수로 승진한 정씨 이야기 등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인물들 외에도 개성 넘치는 인물들이 등장해 우리 선조들이 살아왔던 리얼한 역사를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다양한 속담과 언어유희가 때때로 등장해 지루할 틈 없이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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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의 역사 03. 통일신라와 후삼국 시대
이현희 | 청아출판사 | 2015-02-0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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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의 역사 03. 통일신라와 후삼국 시대
이현희 | 청아출판사 | 2015-02-0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7-14)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이야기 한국사》로 100만 독자를 사로잡은 이현희 교수의 필생의 역작!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는 우리 조상들이 열심히 살아온 발자취로서 그것은 오늘날 우리 생활로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힘차게 전개되어 갈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고 주체적으로 터득하는 것은 그것을 토대로 내일의 나아갈 바를 설계하고자 함이다.
수많은 외침을 극복하면서 우리 민족이 이처럼 오랜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켜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오랜 세월동안 도전과 응전 속에서 새롭게 다져진 우리의 역사는 주변국과의 관계 속에서 독자성을 띠며 성장해 왔다. 평화교류를 하고 우수한 문화를 전파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위기에 처하여 온 국민이 혼신의 힘을 바쳐 내 조국 내 겨레를 지켜내는데 총화단결의 의지를 보여 극복해 나가기도 하였다. 강인함으로 우리 역사와 문화를 창조하고 계승해 왔다는 점을 흘러온 역사를 통해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원동력은 곧 우리 선조들의 슬기이자 용맹이며 올바른 가치관의 실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반만년의 역사는 선조들의 피땀 어린 조국수호와 발전이라는 의지의 결과물이며 창조와 저항의 눈부신 기록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고 더 나은 내일에 적용시켜야 할 것이다.
《한국의 역사》 시리즈 3권에서는 천하를 통일하고 그 후 100여 년간 황금시대를 이룩한 신라의 흥망성쇠를 다룬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작은 나라였으나 끈기와 뛰어난 지략으로 삼국을 통일하였다.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에서부터 화려한 역사를 품은 신라의 발전과 몰락, 신라 말기의 혼란한 틈을 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던 왕건, 견훤, 궁예 등 통일신라시대부터 후삼국시대까지 살펴보자.
단군 신화에서부터 격동의 현대사까지 한국의 역사를 집대성하다
우리나라의 방대한 역사를 시대순에 따라 일관성 있게 흐름을 이해시키며 담아냈다. 대부분의 한국사 통사(通史)는 지나치게 어렵거나, 지나치게 재미만을 서술하거나, 혹은 모든 분야를 망라하다 보니 책의 중심 자체가 흔들리는 일도 많았다. 《한국의 역사》는 이러한 점을 간과하지 않았으며 쉽게 서술하면서도 풍성한 내용을 담았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서술된 기존 역사서에 아쉬움을 느꼈거나 어렵게 쓰여 역사는 따분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 어렵지 않게 역사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구성된 역사 이야기
왕조 정치사 중심이 아니라 생활사적인 차원에서 서술한 것이 특징이다. 그렇기에 딱딱하지 않고 재미난 이야기를 전해 듣듯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쉽게 역사를 접하려는 청소년 독자층부터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를 기대하는 성인 독자층까지 아울렀다.
역사 안에 숨 쉬고 있는 다양한 인물과 사건들을 만나다
《한국의 역사》 시리즈에는 다양한 역사적 인물들과 사건들이 등장해 당대의 문화·정치·사회 풍조 등 모든 분야를 총 망라해 전해준다. 기생 출신 권력자 나합 양씨의 이야기, 먹고 살기 어려워 도적이 된 전양산 이야기, 일제 총독과의 인연으로 군수로 승진한 정씨 이야기 등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인물들 외에도 개성 넘치는 인물들이 등장해 우리 선조들이 살아왔던 리얼한 역사를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다양한 속담과 언어유희가 때때로 등장해 지루할 틈 없이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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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
[역사] 한국의 역사 04. 고려의 건국과 흥성
이현희 | 청아출판사 | 2015-02-0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7-14) |
234 |
[역사] 한국의 역사 04. 고려의 건국과 흥성
이현희 | 청아출판사 | 2015-02-0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7-14)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이야기 한국사》로 100만 독자를 사로잡은 이현희 교수의 필생의 역작!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는 우리 조상들이 열심히 살아온 발자취로서 그것은 오늘날 우리 생활로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힘차게 전개되어 갈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고 주체적으로 터득하는 것은 그것을 토대로 내일의 나아갈 바를 설계하고자 함이다.
수많은 외침을 극복하면서 우리 민족이 이처럼 오랜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켜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오랜 세월동안 도전과 응전 속에서 새롭게 다져진 우리의 역사는 주변국과의 관계 속에서 독자성을 띠며 성장해 왔다. 평화교류를 하고 우수한 문화를 전파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위기에 처하여 온 국민이 혼신의 힘을 바쳐 내 조국 내 겨레를 지켜내는데 총화단결의 의지를 보여 극복해 나가기도 하였다. 강인함으로 우리 역사와 문화를 창조하고 계승해 왔다는 점을 흘러온 역사를 통해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원동력은 곧 우리 선조들의 슬기이자 용맹이며 올바른 가치관의 실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반만년의 역사는 선조들의 피땀 어린 조국수호와 발전이라는 의지의 결과물이며 창조와 저항의 눈부신 기록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고 더 나은 내일에 적용시켜야 할 것이다.
《한국의 역사》 시리즈 4권에서는 고려를 다룬다. 신라 말 분열된 한반도를 통일로 이끈 사람은 왕건이었다. 이후 474년간 34대에 걸쳐 존속한 황제의 나라 고려. 한반도를 통일한 후 여진을 정벌하기까지 고려사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국가의 기틀을 튼튼히 다진 왕건에서부터 거란의 침입을 막아낸 후 반석을 다진 현종, 윤관이 여진족을 몰아낸 후 9개의 성을 쌓기까지 ‘문화의 황금기’라 불리는 고려의 흥성을 살펴본다.
단군 신화에서부터 격동의 현대사까지 한국의 역사를 집대성하다
우리나라의 방대한 역사를 시대순에 따라 일관성 있게 흐름을 이해시키며 담아냈다. 대부분의 한국사 통사(通史)는 지나치게 어렵거나, 지나치게 재미만을 서술하거나, 혹은 모든 분야를 망라하다 보니 책의 중심 자체가 흔들리는 일도 많았다. 《한국의 역사》는 이러한 점을 간과하지 않았으며 쉽게 서술하면서도 풍성한 내용을 담았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서술된 기존 역사서에 아쉬움을 느꼈거나 어렵게 쓰여 역사는 따분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 어렵지 않게 역사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구성된 역사 이야기
왕조 정치사 중심이 아니라 생활사적인 차원에서 서술한 것이 특징이다. 그렇기에 딱딱하지 않고 재미난 이야기를 전해 듣듯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쉽게 역사를 접하려는 청소년 독자층부터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를 기대하는 성인 독자층까지 아울렀다.
역사 안에 숨 쉬고 있는 다양한 인물과 사건들을 만나다
《한국의 역사》 시리즈에는 다양한 역사적 인물들과 사건들이 등장해 당대의 문화·정치·사회 풍조 등 모든 분야를 총 망라해 전해준다. 기생 출신 권력자 나합 양씨의 이야기, 먹고 살기 어려워 도적이 된 전양산 이야기, 일제 총독과의 인연으로 군수로 승진한 정씨 이야기 등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인물들 외에도 개성 넘치는 인물들이 등장해 우리 선조들이 살아왔던 리얼한 역사를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다양한 속담과 언어유희가 때때로 등장해 지루할 틈 없이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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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 |
[역사] 한국의 역사 05. 무인 집권 시대와 몽골의 침략
이현희 | 청아출판사 | 2015-02-0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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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의 역사 05. 무인 집권 시대와 몽골의 침략
이현희 | 청아출판사 | 2015-02-0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7-14)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이야기 한국사》로 100만 독자를 사로잡은 이현희 교수의 필생의 역작!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는 우리 조상들이 열심히 살아온 발자취로서 그것은 오늘날 우리 생활로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힘차게 전개되어 갈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고 주체적으로 터득하는 것은 그것을 토대로 내일의 나아갈 바를 설계하고자 함이다.
수많은 외침을 극복하면서 우리 민족이 이처럼 오랜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켜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오랜 세월동안 도전과 응전 속에서 새롭게 다져진 우리의 역사는 주변국과의 관계 속에서 독자성을 띠며 성장해 왔다. 평화교류를 하고 우수한 문화를 전파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위기에 처하여 온 국민이 혼신의 힘을 바쳐 내 조국 내 겨레를 지켜내는데 총화단결의 의지를 보여 극복해 나가기도 하였다. 강인함으로 우리 역사와 문화를 창조하고 계승해 왔다는 점을 흘러온 역사를 통해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원동력은 곧 우리 선조들의 슬기이자 용맹이며 올바른 가치관의 실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반만년의 역사는 선조들의 피땀 어린 조국수호와 발전이라는 의지의 결과물이며 창조와 저항의 눈부신 기록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고 더 나은 내일에 적용시켜야 할 것이다.
《한국의 역사》 시리즈 5권에서는 무인 집권 100년 동안 숱하게 일어난 민란과 거란족, 여진족을 물리쳤던 강력한 고려 군대가 몽골족의 침입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기까지 쓰라린 조락의 길을 걸은 고려 역사를 다룬다. 계속될 줄 알았던 고려의 황금시대가 끝날 무렵, 사회의 부패는 귀족사회에서부터 싹텄다. 문무의 차별과 사치스러운 풍조, 안일과 문화적인 부패는 고려를 쇠락의 길로 이끌고 있었다.
단군 신화에서부터 격동의 현대사까지 한국의 역사를 집대성하다
우리나라의 방대한 역사를 시대순에 따라 일관성 있게 흐름을 이해시키며 담아냈다. 대부분의 한국사 통사(通史)는 지나치게 어렵거나, 지나치게 재미만을 서술하거나, 혹은 모든 분야를 망라하다 보니 책의 중심 자체가 흔들리는 일도 많았다. 《한국의 역사》는 이러한 점을 간과하지 않았으며 쉽게 서술하면서도 풍성한 내용을 담았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서술된 기존 역사서에 아쉬움을 느꼈거나 어렵게 쓰여 역사는 따분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 어렵지 않게 역사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구성된 역사 이야기
왕조 정치사 중심이 아니라 생활사적인 차원에서 서술한 것이 특징이다. 그렇기에 딱딱하지 않고 재미난 이야기를 전해 듣듯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쉽게 역사를 접하려는 청소년 독자층부터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를 기대하는 성인 독자층까지 아울렀다.
역사 안에 숨 쉬고 있는 다양한 인물과 사건들을 만나다
《한국의 역사》 시리즈에는 다양한 역사적 인물들과 사건들이 등장해 당대의 문화·정치·사회 풍조 등 모든 분야를 총 망라해 전해준다. 기생 출신 권력자 나합 양씨의 이야기, 먹고 살기 어려워 도적이 된 전양산 이야기, 일제 총독과의 인연으로 군수로 승진한 정씨 이야기 등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인물들 외에도 개성 넘치는 인물들이 등장해 우리 선조들이 살아왔던 리얼한 역사를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다양한 속담과 언어유희가 때때로 등장해 지루할 틈 없이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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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
[역사] 한국의 역사 06. 고려의 멸망
이현희 | 청아출판사 | 2015-02-0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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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의 역사 06. 고려의 멸망
이현희 | 청아출판사 | 2015-02-0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7-14)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이야기 한국사》로 100만 독자를 사로잡은 이현희 교수의 필생의 역작!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는 우리 조상들이 열심히 살아온 발자취로서 그것은 오늘날 우리 생활로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힘차게 전개되어 갈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고 주체적으로 터득하는 것은 그것을 토대로 내일의 나아갈 바를 설계하고자 함이다.
수많은 외침을 극복하면서 우리 민족이 이처럼 오랜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켜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오랜 세월동안 도전과 응전 속에서 새롭게 다져진 우리의 역사는 주변국과의 관계 속에서 독자성을 띠며 성장해 왔다. 평화교류를 하고 우수한 문화를 전파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위기에 처하여 온 국민이 혼신의 힘을 바쳐 내 조국 내 겨레를 지켜내는데 총화단결의 의지를 보여 극복해 나가기도 하였다. 강인함으로 우리 역사와 문화를 창조하고 계승해 왔다는 점을 흘러온 역사를 통해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원동력은 곧 우리 선조들의 슬기이자 용맹이며 올바른 가치관의 실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반만년의 역사는 선조들의 피땀 어린 조국수호와 발전이라는 의지의 결과물이며 창조와 저항의 눈부신 기록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고 더 나은 내일에 적용시켜야 할 것이다.
《한국의 역사》 시리즈 6권에서는 국운을 다한 고려가 몽골과의 전쟁에서 패망한 후 이성계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흔들리는 고려 왕조를 다룬다. 몽골로 끌려간 수많은 공녀들과 그에 얽힌 사연들, 고려 안팎으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악재,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등 몰락을 앞둔 고려 후기 사회의 모습과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살펴본다.
단군 신화에서부터 격동의 현대사까지 한국의 역사를 집대성하다
우리나라의 방대한 역사를 시대순에 따라 일관성 있게 흐름을 이해시키며 담아냈다. 대부분의 한국사 통사(通史)는 지나치게 어렵거나, 지나치게 재미만을 서술하거나, 혹은 모든 분야를 망라하다 보니 책의 중심 자체가 흔들리는 일도 많았다. 《한국의 역사》는 이러한 점을 간과하지 않았으며 쉽게 서술하면서도 풍성한 내용을 담았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서술된 기존 역사서에 아쉬움을 느꼈거나 어렵게 쓰여 역사는 따분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 어렵지 않게 역사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구성된 역사 이야기
왕조 정치사 중심이 아니라 생활사적인 차원에서 서술한 것이 특징이다. 그렇기에 딱딱하지 않고 재미난 이야기를 전해 듣듯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쉽게 역사를 접하려는 청소년 독자층부터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를 기대하는 성인 독자층까지 아울렀다.
역사 안에 숨 쉬고 있는 다양한 인물과 사건들을 만나다
《한국의 역사》 시리즈에는 다양한 역사적 인물들과 사건들이 등장해 당대의 문화·정치·사회 풍조 등 모든 분야를 총 망라해 전해준다. 기생 출신 권력자 나합 양씨의 이야기, 먹고 살기 어려워 도적이 된 전양산 이야기, 일제 총독과의 인연으로 군수로 승진한 정씨 이야기 등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인물들 외에도 개성 넘치는 인물들이 등장해 우리 선조들이 살아왔던 리얼한 역사를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다양한 속담과 언어유희가 때때로 등장해 지루할 틈 없이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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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
[역사] 골목길 근대사
최석호, 박종인, 이길용 | 가디언 | 2015-10-1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6-21) |
231 |
[역사] 골목길 근대사
최석호, 박종인, 이길용 | 가디언 | 2015-10-1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6-2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정동에서 부산까지: 1887~1950
대한민국의 잊혀진 역사 그리고 사람 이야기
‘걷는 만큼 보인다’
골목길에서 만나는 근대사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까?
보고 듣고 느끼고 만지며 역사를 산책하다
매년 추위가 채 가시기 전 2월 8일이면 광화문 네거리에는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노래가 흘러나와 연인들의 가슴을 적신다. 이문세 씨가 부른 명곡 ‘광화문 연가’다.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둘째 부인 신덕황후의 정릉이 있던 곳을 후세 사람들이 정동이라 불렀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조선왕조 600년 도읍지의 권력 중심부로 영욕의 시간을 지나온 정동은 특히,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버텨낸 격동하는 근대사의 주역이자 현장이었다. 나라를 넘겨준 ‘을사늑약’ 조약을 체결한 ‘중명전’, 임금이 왕궁을 버리고 남의 나라 공사관으로 도망친 ‘아관파천’의 현장 러시아공사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 해방 후 안두희의 총탄을 맞아 비명에 가신 김구 선생의 ‘경교장’, 그리고 구한말 우리 역사의 또 다른 주역 외국 선교사와 외교관들의 주 무대가 펼쳐진 곳이기도 했다.
이처럼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다정히 걷고 있는 연인들의 눈앞에, 아름다운 노래가 흘러나오는 정동교회 바로 옆 카페에, 서대문에서 광화문에 이어진 빌딩 숲 사이에, 정동에는 역사의 영광, 분노, 좌절, 그리고 새로운 창조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걸 《골목길 근대사》의 저자들은 제법 진지하게 안내하고 있다. 늘 지나다니던 길, 이제 저자들의 안내를 따라 보고 듣고 느끼고 만져보는 역사산책을 해보자. 역사가 무겁다면 매년 2월에는 한번쯤 덕수궁 돌담길이 끝나고 미국 대사관저가 시작되는 분수대 사거리 오른쪽 노점상에 둘러싸여 있는 비석 앞에서 ‘광화문 연가’를 들어보는 건 어떨까? 그 비석이 바로 48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작곡가 겸 작사가 이영훈을 기리는 작은 청동 기념비다.
격동하는 근대사의 현장 정동, 조선중화의 아픔이 서린 서촌,
일제의 모진 세월을 견뎌낸 동산, 조선 최초 자주적 개항 목포,
더블어사는 지혜를 품은 국제도시 부산, 치유와 사랑의 섬 신안 증도까지 역사를 걷다
《골목길 근대사》는 급변하는 현대에 점점 희박해지는 역사 인식을 일깨워 대한민국인으로서의 자긍심과 정체성을 되찾아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 공감한 최석호, 박종인, 이길용 세 사람이 의기투합하여 기획되고 집필되었다. 이들은 ‘역사산책’이라는 콘셉트가 자칫 무거운 역사지식 전달에 치우쳐 산책이 주는 재미를 놓칠 것을 우려해 수위를 조절하는 데 애를 썼다. 자유여행과 역사해설의 중간쯤, 역사를 만나 사유하고 걸으며 ‘나’에게로 여행을 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에 충실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는 골목골목 이 땅에 서려 있는 우리 역사를 걸으며 그 역사현장에서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어떻게 나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무력하게 국권을 침탈당한 근대사의 아픔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정동,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드높인 조선중화가 일제의 앞잡이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서촌, 그리고 나라 잃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힘든 시절을 살아 견디어내고 마침내 되찾은 나라에서 문화보국을 위해 힘쓴 동산, 한 많은 민초들의 삶을 흥과 예로 승화해낸 개항장 목포의 눈물, 청관거리, 왜관거리의 전통이 남아 피난민과 함께 더불어 사는 지혜를 품은 국제도시 부산의 개항장, 사랑으로 용서함으로써 동족상잔의 비극을 신앙심으로 이겨낸 천사의 섬 신안 증도까지 저자들의 발길은 우리 근대사의 아픔과 진실을 전하는 역사와 사람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 잰걸음을 걸었다. 우리는 순서에 구애됨이 없이 이 책에 소개된 어느 골목길을 가든 거기에서 만나는 역사와 반갑게 조우할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이제 ‘걷는 만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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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김구 청문회 1 - 독립운동가 김구의 정직한 이력서
김상구 | 매직하우스 | 2014-08-16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6-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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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김구 청문회 1 - 독립운동가 김구의 정직한 이력서
김상구 | 매직하우스 | 2014-08-16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6-2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대한민국 역사의 성역 김구에 대한 청문회
『김구 청문회』를 출판하기 위해 우리는 6개월 동안 작업을 했다. 이 작업을 하면서 우리는 매우 마음 아팠다. 백범 김구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최고의 독립영웅이자, 정치가이며, 비운의 주인공이었다. 우리는 그 동안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면서 행복한 상상을 수없이 해왔다. 김구의 저서 『백범일지』를 읽은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그 책을 읽지 않은 사람도 중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누구나 읽었던 〈나의 소원〉의 감동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런 김구에 대하여, 김구가 살아 있다면 이 책을 보면서 얼마나 안타까워했을 거란 생각을 하면 지금도 맘이 아프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역사 속에서 수많은 지도자들이 견디어야 하는 고통이면서, 그 혹독한 검증을 거쳐 살아남아야만 비로소 한 시대를 책임지는 민족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조선시대의 영웅들 세종대왕, 세조, 광해군, 정조, 영조 등의 왕들과 정몽주, 정도전, 이순신, 송시열, 조광조 등도 사후에 그들이 남긴 저서와 조선왕조실록, 그리고 지인들의 기록을 통하여 공과가 재조명 되었다. 그리고 정몽주는 충신 정도전은 역적의 논리에서 접근하던 방식에서 꺼져가는 고려를 끝까지 고집했던 정몽주에 비해 새로운 유교이상국가를 꿈꿨던 혁명가 정도전의 삶을 더욱 높이 평가하게 됐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송시열은 어쩌면 이 책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안중근과 최익현에까지 영향을 줬으리라 생각된다. 김구는 한 때는 우(右)에서는 김일성 등 빨갱이와 내통했다며 좌로 몰리고, 좌(左)에서는 극우로 몰리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김일성 등과 내통했다는 누명은 벗어도 좋을 거 같다. 이 책 어디에서도 김구는 공산주의와 내통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하지만 중도파로서 좌와 우의 통합을 위해 한평생을 바쳤다는 찬사도 걷어 들여야 할 것 같다. 김구 지지자들에게 가장 아픈 부분은 이 점이 될 거 같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 부분이 가장 많이 아팠다. 좌와 우의 통합을 위해 가장 치열하게 애썼다고 믿어왔던 김구를 보내고 나면 우리는 그 대안으로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가? 역사는 그동안 김구를 선택했다. 김구를 선택하는 동안 동시대의 인물 여운형을 버렸다. 어쩌면 여운형은 김구가 받고 있는 찬사를 거의 다 받았어야 하는 유일한 인물이었는지 모른다. 책 제목을 김구 청문회라고 정한 것은 백범 김구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담아내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과거시험에 낙방하고, 스스로(?) 동학의 접주로 활동했던 구한말과 일본인 스치다를 살해하고 사형집행 직전까지 갖던 시절, 그리고 탈옥을 한 이후 망명생활과 한때 도산 안창호에게 임시정부에 문지기라도 시켜달라고 했던 그 유명한 인사청탁 때와 김구가 주석으로 임시정부를 이끌던 시절, 그리고 해방 이후 이승만과의 갈등과 협력관계, 그리고 안두희에게 저격당하던 순간들과 사후 김구가 민족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하는 장면들을 다룬다. 나는 개인적으로 왜 김구는 3.1 운동 각종 독립운동 및 독립선언서에 그의 이름이 없었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이 책을 만들면서 그 의문의 상당부분은 풀렸다. 이 책의 신랄하고 가혹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김구의 명성에는 조금의 흠이 가지 않을 수도 없을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 할지라도 해방공간 내에서 김구가 걸어온 길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성역화 된 인물은 백범 김구이다. 이승만, 박정희에 대한 신화는 상당부분 깨졌다. 하지만 백범에 대한 신화만큼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신화를 깨는 자체가 이 책의 목적은 아니다. 이제 김구에 대한 비판을 시작함으로써 일제 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그가 선택한 길이 최선의 길이었는지 다시금 묻는 첫걸음이 되기를 바란다. 정말 김구의 일생이 우리가 아는 그 어떤 정치인보다 탁월했는지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작가의 말 물론 김구는 친일파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친일파 부일배들로 이루어진 한민당으로부터 수많은 자금을 받았고 그들과 결탁했습니다. 부일협력 재벌 최창학으로 부터 제공받은 김구의 거주지 경교장(죽첨장), 송진우로부터의 900만원, 김연수에게 700만원 그리고 주석김구각하로 극존칭을 써가며 김구와 임시정부 홍보에 앞장섰던 동아일보…등은 극히 일부의 예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백범일지를 윤문, 첨삭한 자가 친일파 이광수였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더욱이 1962년 김구에게 수여된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대한민국장, 건국훈장 1등급)은 친일전력이 있는 박정희 군사정권 하에서 이병도 신석호 등 친일사학자들이 심사하여 결정된 것입니다. 이승만이 숨겨진 친일파라면 백범 김구의 경우 친일파들이 그를 항일독립 통일의 영웅으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역사가와 그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거가 조작, 왜곡되었다면 이해와 해석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할 것입니다. 신화화된 김구의 이미지를 넘어 이제 김구의 실체를 보아야할 시점입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구체적 인식은 우리가 가야할 미래의 방향을 잡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책의 저술 목적입니다. 그리고 김구로 인해 어둠 속에 묻혀버린 독립지사들의 명예가 이 책을 통하여 회복되었으면 합니다. 임시정부정통론이라는 허구의 독립운동사가 걷히고 제대로 된 독립운동사가 정립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전합니다. 〈백범일지〉는 친일파 문인 춘원 이광수가 윤문 각색한 작품이다 단어로서의 일지(逸志)는 국어사전에 ①훌륭하고 높은 지조. ②세속을 벗어난 뜻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한자사전도 마찬가지다. 즉 《백범일지(白凡逸志)》의 사전적 풀이는 백범자신의 훌륭하고 높은 지조를 쓴 기록물이란 뜻이다. 자신의 얼굴에 스스로 금칠을 한 셈이다. 대부분 무심코 넘어가는 《백범일지(白凡逸志)》의 표현에 몇 몇 학자들은 충격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백범일지》에서 ‘일지’는 숨겨진 기록, 곧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라는 뜻의 일지(逸志)이다. 억지로 끼워 맞추면 일지(逸志)의 의미를 숨겨진 기록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일(逸)은 ‘숨다’라는 뜻이 있고 지(志)의 뜻 역시 기록(記錄)이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숨겨진 기록을 의미하고자 일지란 단어를 선택했다면 志대신 誌를 사용했어야 할 것이다. 즉 白凡逸誌가 되겠다. 그러나 백범은 《백범일지(白凡逸志)》란 용어를 선택했다. 백범이 정말 스스로 자신을 높이고자 했는지 혹은 단어 사용의 미숙함으로 일지(逸誌)를 사용했는지 그 연유는 알 수 없다. 아무래도 독자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도산일기》를 비롯하여 앞에서 소개한 독립지사들의 자서전류는 대부분 직해본 백범일지와 마찬가지로 한문식 구식 표현을 사용한 문어체 문장이다. 당연히 독자들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백범일지》는 달랐다. 《백범일지》는 처음부터 유려한 문장, 쉽고 간결한 문체로 출발했다. 《백범일지》는 출간되자 말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백범 개인의 일생도 흥미로웠지만, 상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지사들의 행적을 어느 정도나마 파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체는 보너스였다. 국사원본은 《백범일지 친필본》이 공개될 때 까지 유일한 원본 구실을 했으며, 이 책을 기본으로 수많은 《김구자서전》과 《김구평전》이 탄생하여 백범일지 집필자의 텍스트 역할을 했다. 그러나 《국사본백범일지》는 친필본과 차이가 너무 많은 작품이다. 백범의 조상 이야기를 소개한 도입 부분부터 다르다. 친필본은 “조선(祖先)은 안동 김성(金性)이니 김자점(金自點) 씨의 방계(傍系)라…”로 시작되지만 국 사본의 첫 부분은 “우리는 안동 김씨 경순왕(敬順王)의 자손이다.…”로 출 발한다. 원본에 없는 내용이 추가된 경우다. 더욱이 일부 내용은 아예 빠져 있는 경우도 있다. 사리원에서 경의선 열차를 탔을 때 황해도 봉산의 만세 운동에 관한 이야기 등이 삭제되어 있다. 《국사본백범일지》는 단순 교열이 나 윤문 정도가 아니라 재구성본이라고 해야 맞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백범일지》의 진정한 작가는 누구라고 해야 할까? 백범은 《백범일지》 초간본에서 저자의 말을 남겼다. 이 글에서 백범은 “김지림 군과 삼종질 흥두가 편집과 번역, 철자법 수정 등 궂은일을 했다” 고 서술했다.8) 이 문장으로 인해 오랫동안 김지림이 《국사본백범일지》의 윤문자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광수가 윤문의 주인공임을 알고 있으며 인정하고 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김신이 이광수가 윤문자임을 고백했기 때문이다. 김신의 말을 들어 보자. “춘원은 자신이 그 일을 하겠다고 했답니다. 아버님은 그의 행실 때문에 망설였는데, 누군가가 글 솜씨도 있는 사람이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맡겠다 니 시켜보라고 했대요. 그가 윤문을 한 것은 사실이나, 아버님이 그걸 알고 맡기셨는지 의문입니다.” 친일파였던 춘원이 스스로 《백범일지》의 윤문을 자청했는지, 김구가 이 광수의 윤문을 알았는지 등에 관한 사항은 향후 좀 더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분명한 것은 이광수가 《국사본백범일지》의 산파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아무튼 《백범일지》가 전 국민의 교양서로 자리 잡게 된 일등 공신은 아무래도 이광수의 몫으로 돌려야 할 듯싶다. 김구는 과연 동학의 접주였나? 김구의 주장에 의하면 그는 나이 열아홉에 동학의 정식 접주가 되었고, 곧 고향으로 돌아와 팔봉이란 접명(接名)을 지었다고 한다. 여기서 당시 동학의 접주 자격에 대해 알아보자.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기술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천도교》편을 보면 동학의 접주 자격은 포교 능력에 따라 점수를 매겨 부여하였는데, 포교 인원 105명 이상인 사람은 접주, 500명 이상은 대접주가 되는 자격을 부여했다고 한다. 이러한 관례에 따르면 김창수는 나이에 상관없이 접주에 임명될 수도 있었다. 백범의 주장에 의하면 그의 연비는 무려 수천에 달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돈화(李敦化, 1884-?)가 편술한 《천도교창건사》 등 동학이나 시천교, 천도교 등의 자료 어디에도 19살 접주, 김창수는 등장하지 않는다. 결정적인 자료가 있다. 백범일지에도 등장하는 최유현(崔琉鉉)이 1918년에 정리하고 1920년에 편찬한 《시천교역사(侍天敎歷史)》를 보면 최유현 등 황해도 대표가 보은을 방문하여 최해월(최시형)로부터 접주 임명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김구에 의하면 계사년(癸巳年, 1893년) 가을에 오응선?최유현 등이 경통 (敬通)을 받고 충청도 보은에 있는 해월 대도주를 방문하는 일행 열다섯 명에 자신도 선발되어 최시형을 만났고 그곳에서 접주 첩지를 받았고 한다. 계사년은 갑오년(甲午年, 1894년)의 착오라 하더라도 김구는 자신의 입으로 분명히 정식 접주가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최유현은 자신 외 6명이 대선사를 방문했고 자신은 해서(海西)수접주로 임명되었다고 기록했다. 김구의 주장과 차이가 너무 많다. 15명과 6명의 차이 그리고 김창수는 아예 언급이 없다. 스치다 사건의 진상 1896년 3월 9일 치하포에서 일본인 스치다(土田讓亮)를 죽인 사건은 백범 김구의 업적을 꼽을 때 언제나 첫 머리로 등장한다. 소위 국모보수(國母報讐)다. 어린이독서진흥회라는 단체가 엮은 초등학생용 《백범일지》를 읽어보면 이 사건이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어떻게 알려져 있는지 그 연유를 짐 작하게 한다. 시체의 처치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분부하였다. 왜놈은 다만 우리나라와 국민의 원수가 될 뿐만 아니라 물속에 있는 어별에게도 원수인즉 이 왜의 시체를 강에 넣어 고기들로 하여금 나라의 원수의 살을 먹게 하라 하였다.…식후에 토전의 시체와 그의 돈 처치를 다 분별하고 나서 주인 이화보를 불러 지필을 대령하라 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를 죽였노라.” 하는 뜻의 포고문을 한 장 쓰고 그 끝에 ‘해주 백운방 기동 김창수’라고 서명까지 하여 큰길가 벽상에 붙이게 하고 동장인 이화보더러 이 사실을 안악 군수에게 보고 하라고 명한 후에 유유히 그곳을 떠났다. 당시 김구를 심문했던 내용과 언론 등은 스치다의 신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하기와라(萩原, 4월 6일): 나가사키(長崎)현(縣) 평민(平民) 스치다(土田讓亮) -김효익(4월 19일): 일본인 한 사람(日人一人) -이완용(5월 1일): 일본사람(日本人) -하기와라(6월 30일): 행상인(行商人) -박정양(7월 12일): 일본사람(日人) -하기와라(7월 18일): 우리나라 사람 스치다(我邦人土田讓亮) -김창수 초초(8월 31일): 단발을 하고 칼을 찬 수상한 사람, 일본인이므로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라고 생각 -이화보 초초(8월 31일): 일본인 토전양량(土田讓亮) -김창수 재초(9월 5일): 일본사람, 일본인 -이화보 재초(9월 5일): 일본인 -오기하라(荻原守一, 9월 12일): 우리나라 상인 스치다(我商土田讓亮) -한규설(10월 22일): 일본상인 스치다(土田讓亮) -독립신문(9월 22일): 일본장사꾼 토전양량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스치다가 일본군인 혹은 일본 육군 중위라는 말 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처음에는 일본인으로 기록하다가 어느 정도 신분 이 밝혀진 후에는 일본상인으로 표현했다. 심지어 김창수 본인조차 심문 시에 스치다를 일본인으로 말했다. 《백범일지》에서 스치다의 정체를 일본 육군 중위라고 한 것은 분명히 작의적인 왜곡이었다. 김구에게 종교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보신의 수단이었다 김구가 탈옥을 한 때는 1898년 3월 19일이다. 해주옥과 인천감옥에 구 금된 지 2년만이었다. 이제 22세가 되었다. 탈옥 후의 행적은 《백범일지》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김구가 공식문서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10여 년이 지난 이후부터다. 이 기간 그에겐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결혼을 하였고 위정척사계열이었던 스승과 결별하였으며 이름도 여러 번 바꾸었다. 가장 중요한 변신은 기독교로의 개종이다. 백범의 종교편력은 유명한 이야기다. 무속?유교?풍수?관상학?동학 불 교?기독교… 사후에는 가톨릭의 성세를 받아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얻었 다. 김구는 조선 민중이 선택할 수 있던 대부분의 종교와 접촉한 셈이다. 그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유교를 입신의 수단으로 삼았으나 과거 낙방 으로 좌절했다. 그 후 풍수?관상 등 무속과 관련된 학문에도 잠깐 흥미를 보이기도 했으나 곧 동학에 입도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동학도가 된 것도 기인이사, 이적 등 미신적인 요소에 대한 호기심이 큰 동기였다. 그가 불교 에 입적하여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얻은 것은 탈옥 후 신분세탁의 의미가 큰 개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너무 쉽게 믿고 너무 쉽게 그 종교를 버렸다. 백범에게 종교는 목적이 아니고 수단이었다. 백범의 종교편력은 묘하게도 그의 이름과도 연관이 깊다. 그가 동학에 입도했을 때 창수로 개명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백범일지》에 김창수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그가 동학에 입도하여 연비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고 주장할 무렵이다 ♧ 이봉창 의거에서의 김구의 역할 이봉창이 상해에 도착한 것은 1930년 12월이다. 그리고 이듬해 1월 경 민단사무소를 방문했다. 상해를 떠나 고베(神戶)로 출발한 것은 1931년 12 월 17일이다. 그러므로 약 1년 동안 민단사무소를 거점으로 백정선, 김동호 등을 만난 셈이다. 이 기간 동안 백정선과 김동호는 본명은 물론 임시정부내의 위치, 그 동안의 이력 등 자신들의 정체는 철저히 숨겼다. 이봉창은 1932년 10월 11일 사형이 집행될 때 까지 김구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재판 심리 중 백정선에 대해서 이봉창이 어떻게 발언 했는지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 나는 전에도 말씀드린 대로 조선 민족을 위해 희생할 각오를 가지고 그러한 행동으로 나갔던 것이므로 물론 죽음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또 한 일본 천황을 폭격할 생각으로 폭탄을 던졌던 것이지만 백정선이 나에게 이야기한 것과 같은 폭탄의 위력이 없었기 때문에, 나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었던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1932.01.10. 청취서》 ■ 내가 여러 번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죽을 각오로 천황 폐하의 생명을 빼 앗으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폭탄의 위력이 작아 실패 것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상해에서 시험해 보자고 했습니다만 백정선이 이미 말씀 드린 대로 대단한 위력이 있는 폭탄이라고 말하면서 시험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기에 이를 믿었던 것이 실패의 원인이며 이것에 대해서는 백정선을 원망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1932.01.12. 제3회 신문조서》 ■ 나는 백정선을 그렇게 학문이 있는 사람이거나 또 인격자라고도 생각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민단의 단장이며 다른 조선인들이 백정선을 보면 인사한다는 점 등에서 나는 백정선을 상해에 있는 조선인의 총 대표자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32.02.13. 제7회 신문조서》 ■ 나도 백정선의 배후에 상당히 훌륭한 사람이 있음에 틀림없다고 상상하고 있지만 나는 그것이 누구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민단 사무소에서 나는 ‘이 사람이다’라고 할 만한 훌륭한 사람이나 인격자 같은 사람과 만난 적이 없습니다. 《1932.02.13. 제7회 신문조서》 이봉창은 재판과정을 통하여 백정선이 김구(金龜)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무렵의 김구는 金龜 대신 金九라는 이름을 주로 사용 했다는 것은 몰랐고 더욱이 김창암, 김창수 등의 이름을 예전에 사용했다 는 것은 전혀 몰랐다. 청취서와 신문조서, 공판조서 등 제판 기록을 보면 유난히 눈에 띄는 내용이 있다. 자신의 의거가 실패한 것에 대하여 “대단한 위력이 있는 폭탄이다. 시험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 백정선의 호언장담을 믿었음에 아쉬움과 함께 분노를 표명하는 장면이다. 충분히 납득이 간다. 치밀한 계획 없이 의욕만 앞섰던 백정선에게 유감을 표시함과 동시에 그의 학문이나 인격을 거론한 점도 흥미롭다. 송진우 장덕수 암살의 배후로 거론되는 김구 장덕수의 정치노선은 송진우와 거의 유사했다. 소위 훈정론의 재등장이 었다. 임정법통론과 훈정론의 간격은 결국 두 사람의 죽음으로 귀결되었다. 서중석의 표현대로 “장덕수는 중경임시정부측의 우익 헤게모니 장악에 장애적 역할”을 한 것이 그가 암살당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 다시 재판정으로 돌아가자. 1948년 3월 12일 오전 9시경, 김구는 제8회 군률재판 공판정에 증인으로 출두했다. 그의 나이 73세였다. 1910년 안명근 사건 관련자로 체포된 후 38년 만에 서게 된 법정이었다. 김구는 증인 신문 내내 살해교사를 부인했다. 간접적으로 지시한 사실도 없다고 했다. 왜 김석황 등의 진술과 틀리냐는 검사의 질문엔 고문에 의한 강요된 답변이라고 대응했다. 1차 신문은 4시간 반이나 걸릴 정도로 장시간 소요되었는데, 정작 해프닝은 제2차 신문 때 일어났다. 김구는 이날 김 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홍명희 등과 함께 총선불참을 공식 선언했다.71) 오랫동안 이어져왔던 이승만과의 밀월이 완전히 깨어지는 순 간이었다. 그리고 3월 15일 오전 9시, 김구는 두 번째 진술을 위하여 법정에 섰다. 비교적 평온했던 첫날에 비해 이 날은 김구의 진술거부, 퇴청소동, 박광옥 의 난동 등으로 인해 재판자체의 정상적인 진행이 어려울 정도였다 안두희가 김구를 암살하기 전에 안두희는 김구와 독대를 한다. 그 독대의 과정에서 안두희는 김구에게 다음과 같이 추궁을 한다. 「그리고 건국실천원양성소(建國實踐員養成)는 무엇 하는 기관이며 혁신탐정사(革新探偵社)는 누구의 것이며 또 한독당(韓獨黨)의 소위 비밀당원 조직망이란 무슨 사명을 부여한 결사입니까. 한국군대는 김구 씨의 군대라는 외인(外人)의 평론에 대하여 선생님은 무슨 말로써 반박하시렵니까. 선생님! 제게 8?15기념일을 전후하여 중대한 지령이 있을지 모른다던 예비명령은 무엇에 대한 준비입니까.」 나의 음성은 높을 대로 높았다. 선생님도 노기등등한 안색으로 안절부절 못하시면서, 「무어야? 이놈 죽일 놈! 입이 달렸다고 함부로 지껄이는 거야?」 고함을 지르신다. 이제는 피차가 사리를 가릴 이지(理智)의 여유를 잃었다. 「여순 반란은 누가 교사한 것입니까?」 「뭐야 이놈.」 주먹으로 서안을 치신다. 「표(表)소령, 강(姜)소령과 기거를 같이하던 놈은 어떤 놈입니까?」 「저런!」 책 뭉치가 날아온다. 얼굴에 맞았다. 나도 주먹을 부르쥐고 고함을 질렀다. 「송진우 씨는 누가 죽였습니까?」 벼루가 날아와서 머리를 스치고 뒷벽에 부딪힌다. 「장덕수(張德秀) 씨는 누가 죽였습니까?」 「이 놈! 너 이놈!」 붓이 날아오고 또 책이 날아오고 종이 뭉치가 날아오고…. 나는 고개를 수그리고 잠깐 생각의 여유를 포착하려했다. 무슨 말씀인지 기억은 없으나 선생님께서는 노후(怒吼)를 계속하시는 것이다. 해방공간에서의 김구의 노선 반소?반공?임정봉대를 추진했던 김구의 노선보다 반소?반공?남한단정을 주장하는 이승만의 노선이 보다 현실성 있는 대안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한민당 선전부장 함상훈은 미국무장관보 힐드링의 연설을 부연하는 담화에서 “남조선에 조선인에 의한 자치정부가 수립되고 UN의 일원이 되어 그 정부가 조선 문제를 UN에 호소하여 남북통일의 주동체가 될 것을 고대 한다”며 아예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의 희망을 표시하기도 했다. 힘의 추는 급격히 이승만에게로 기울고 있는 중이었다. 김구와 이승만은 느슨한 형태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이승만의 도미로 그의 부재시 임정봉대를 위한 쿠데타 시도로 잠시 불편한 관계였던 두 사람이 미소공위 타도를 위해 다시 힘을 합쳤던 것이다. 그들은 ‘6?23’봉기를 계획하여 다시금 반탁의 물결이 일어나길 기도했다. 하지만 미군정과 경찰의 적극적인 도움이 없는 반탁시위는 애초부터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미소공위 무력화를 위한 김구의 마지막 선택은 역시 암살과 테러로 귀결 되었다. 제2차 미소공위가 개최되면서 가장 주목을 받은 인물은 중도파인 여운형과 김규식이었고, 실제 이들이 가장 중요한 테러?암살 대상자였다 단정찬성에서 좌우합작, 김구는 왜 노선을 변경했나? 이승만에 비해 김구의 노선은 갈짓자 행보였다. 그의 노선은 반소?반공 ?반탁?임정봉대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 은 임정정통론이었다. 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정적 제거 작업을 망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정적과의 제휴 역시 기피하지 않았다. 김구의 노선 중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단정에 대한 그의 처신이다. 이승만이 단정론자라면 김구는 통일론자라는 것이 보편적 인식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단정노선에 김구가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는가하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많다. 1947년 11월 말부터 12월 초, 짧은 기간이지만 그 무렵 김구의 노선은 분명히 남한단정론의 인정이었다. 자신의 생각이 이승만의 주장과 조금도 다름이 없으니 남조선총선거로서 정부를 세워야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김구가 일종의 항복 선언을 했다는 점이다. “단독정부는 절대 반대할 것이다.”라고 발표한 그 다음 날인 12월 23일부터 김구는 수차례에 걸쳐 이승만을 방문했다. 묘한 것은 김구의 폭탄선언에 대한 언급은 일체 없었고 회담 주제는 오로지 국의와 민대의 통합문제뿐이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통합단체의 간부 진영과 선거법 문제 등에 관해 12월 말 내내 협의했다. 결국 이승만은 김구와 결별하고 만다. 한민당과 한독당이 결합되지 못할 경우, 수족이 다 잘린 김구보단 돈과 조직이 건재한 한민당이 보다 필요했을 터이다. 정치가 이승만의 당연한 선택이었다. 단정?단선을 반대한 대부분의 정당?단체가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미군정은 통일을 열망한 조선민족의 각 정당?단체들을 죄다 좌익으로 몰아 불온시 했으며, 오직 김구와 김규식에게만 면죄부를 주었다. 미국이 김구와 김규식을 회유?설득하고자 한 것은 양김 에 대한 미국의 인식을 보여주는 다음의 문서가 참고 된다. 양김 씨는 표면적으로는 ‘통일한국’을 부르짖지만, 남북연석회의를 제안 하고 평양회담을 받아들인 실질적인 이유는 그들의 지지가 보잘 것 없으며 선거에 당선되는 것조차 불투명하자, 경기가 시작되길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미군정의 관점은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남북연석회의 이후 김구와 김규식이 미군정과 어느 정도, 어떤 선까지 접촉하였는가는 확실한 정보가 없다. 그러나 서로 간의 공감대 속에서 공동성명서에 서명을 함께 했던 이들과 연대하지 않고 오히려 단정세력 쪽으로 조금씩 다가선 것은 분명하다. 안두희는 왜 김구를 암살했는가? 김구의 암살을 이해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그 당시 김구의 노선을 파악해야만 할 것이다. 남북연석회의 이전 그의 노선은 반탁?반소?반공을 외쳤지만 실제로는 임시정부 정통론이 무엇보다 우선 적인 대원칙이었다. 그 후 남한의 단정실시가 확실시되자 이승만과의 연대에 의한 단정노선으로 변한다. 그리고 남북연석회의를 전후하여 노선이 또 변하게 된다. 이제는 미소양군 철수 후 남북한총선거 실시였다. 하지만 평양을 갖다오고 난 뒤 남북정권이 들어서자 그의 노선은 다시 요동치게 된 다. 마지막 시기 김구의 노선은 북조선과의 협상을 포기하고 그 대신 남한 정계복귀에 중심을 두었다. 그의 마지막 변신은 조용히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이승만 암살, 군부를 동원한 쿠데타 그리고 제2회 총선거 참가에 의한 정권교체… 등이 김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러나 김구의 움직임은 이승만과 미국CIC에 의해 세밀히 관찰되고 있었다. 미국은 좌익과의 연대에 의한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지만, 이승만은 김구의 현실참여에 두려움을 느꼈다. 결국 미국의 묵인과 방조 하에 이승만 권력의 핵심세력에 의해 김구의 죽음이 있게 되었다. 물 론 아직까지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우리가 풀어야할 숙제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안두희의 경우 어쩌면 확신범일 수도 있다. 이승만 진영이 의도하고 조작한 김구에 대한 이미지 즉 원래는 공산당을 때려잡던 김구가 변절하여 공산당과 연대하고 있다는 마타도어를 그대로 믿었을 가능성이 높다. 좀 가혹하게 말하자면 안두희는 연극무대의 피에로였으며 이승만 등 최고 권력자들에게 이용을 당했다는 뜻이다. 김구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한 박정희와 친일사학자들 건국공로훈장 제도는 1949년 4월 27일 대통령령 〈건국공로훈장령〉이 공포되면서 제정되고 시행되었다. 최초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은 1949년 8월 15일에 중앙청에서 거행된 건국공로자 표창식에서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에게 수여되었다. 박정희 군사정권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된 이 제도의 문제점 몇 가지만 지적한다. 첫째, 친일파들이 독립운동가의 서훈 자격을 심사했다는 점이다. 1962년 문교부 독립운동유공자 공적조사위원회 명단 7명 속에는 이병도와 신석호가 들어가 있다. 이 두 사람은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던 등의 전력으로 인해 친일인명사전에 등제된 이들이다. 친일이력이 있는 박정희 와이병도, 신석호 등이 김구를 최고 항일 투사로 만든 셈이다. 둘째, 공적내용이 사실과 다른 경우가 너무 많다. 김구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보훈처의 작성한 김구의 공적조서를 보면, 김구의 독립운동 기간을 50여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1894년 동학혁명 시기부터 김구가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보고 있는 모양이나 이것은 분명히 오류이다. 또 인천감리영(仁川監理塋)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후 집행일인 8월 26일 특명으로 사형집행이 중지되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며, 김구가 살해한 매약상 스치다(土田讓亮)를 일본 육군중위(倭陸軍中尉)라고 표현한 것도 백범일지를 일방적으로 신뢰한 결과이다. 셋째, 서훈기준이 모호하다. 건국훈장이냐 독립훈장이냐? 유공자들이 수여받은 훈장의 정식명칭은 건국훈장(建國勳章, 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이다. 13년 전 이승만이 받은 훈장을 같은 법률의 적용 하에 김구가 받은 것이다. 논란이 될 수 있는 것은 건국훈장이라는 용어다. 여기서 말한 건국은 1948년 성립된 이승만 정부의 출범일 것이다. 남한 단독 정부의 정통성 여부와 무관하게 아무튼 이 정부가 표방한 정치체제는 공화정이다. 516쿠데타와 김구의 아들 김신 박정희와 김구의 관계는 김구의 아들 김신과의 인연을 생각해 보면 보다 뚜렷해진다. 쿠데타 발생 사흘 후인 1961년 5월 19일에 발표된 32명의 군사혁명위원 명단에는 육군소장 박정희와 함께 공군중장 김신의 이름이 뚜렷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5월 23일에는 육군참총장 장도영 등과 “전력을 다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명령에 절대 복종할 것을” 선언했다. 그리고 김신은 박정희 정권과 내내 함께했다. 1962년 공군참모총장직을 예편한 김신은 타이완 주재 대사로 부임해 8년간 일했다. 1971년 귀국한 김신은 대통령의 권유로 공화당 후보로서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했다. 결과는 낙선이었다. 하지만 그 후 교통부 장관을 거쳐 유신시대에는 대통령 추천으로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이 된다. 그리고 독립기념관 초대 이사장을 거쳐 백범김구기념관 관장 및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이 그의 이력이다.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정권을 거쳐 현 박근혜 정권까지 양지만을 선택한 것이 그의 생애였다. 김구의 아들 김신이 박정희의 쿠데타에 일조함으로서 얻게 된 과실은 엄청났다. 김신 개인의 일신영달과 가족들의 기득권 진입은 차치하고라도 아버지 김구는 진보?보수?여?야의 경계와 상관없이 대다수 국민이 숭배하는 민족의 영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의 배경에는 민족의 영웅으로 김구를 선택한 박정희의 공로가 크다. 한편, 독재자 이승만의 대체자로 김구를 선택한 결과는 이승만의 문제점 을 덮는 효과도 있었다. 이 책을 통하여 줄곧 거론하였지만 김구와 이승만은 너무나 오랫동안 동지이자 동반자 관계였다. 그러므로 김구의 일생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이승만의 반민족적, 반민중적 행위에 대한 저항을 제 대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과오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독립운동 시기의 박용만, 태평양 전쟁 때의 한길수, 해방공간에서의 여운형을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역사는 박용만?한길수?여운형을 외면하고 김구를 선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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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김구 청문회 2 - 김구는 통일의 화신인가?
김상구 | 매직하우스 | 2014-08-16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6-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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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김구 청문회 2 - 김구는 통일의 화신인가?
김상구 | 매직하우스 | 2014-08-16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6-2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대한민국 역사의 성역 김구에 대한 청문회
『김구 청문회』를 출판하기 위해 우리는 6개월 동안 작업을 했다. 이 작업을 하면서 우리는 매우 마음 아팠다. 백범 김구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최고의 독립영웅이자, 정치가이며, 비운의 주인공이었다. 우리는 그 동안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면서 행복한 상상을 수없이 해왔다. 김구의 저서 『백범일지』를 읽은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그 책을 읽지 않은 사람도 중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누구나 읽었던 〈나의 소원〉의 감동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런 김구에 대하여, 김구가 살아 있다면 이 책을 보면서 얼마나 안타까워했을 거란 생각을 하면 지금도 맘이 아프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역사 속에서 수많은 지도자들이 견디어야 하는 고통이면서, 그 혹독한 검증을 거쳐 살아남아야만 비로소 한 시대를 책임지는 민족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조선시대의 영웅들 세종대왕, 세조, 광해군, 정조, 영조 등의 왕들과 정몽주, 정도전, 이순신, 송시열, 조광조 등도 사후에 그들이 남긴 저서와 조선왕조실록, 그리고 지인들의 기록을 통하여 공과가 재조명 되었다. 그리고 정몽주는 충신 정도전은 역적의 논리에서 접근하던 방식에서 꺼져가는 고려를 끝까지 고집했던 정몽주에 비해 새로운 유교이상국가를 꿈꿨던 혁명가 정도전의 삶을 더욱 높이 평가하게 됐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송시열은 어쩌면 이 책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안중근과 최익현에까지 영향을 줬으리라 생각된다. 김구는 한 때는 우(右)에서는 김일성 등 빨갱이와 내통했다며 좌로 몰리고, 좌(左)에서는 극우로 몰리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김일성 등과 내통했다는 누명은 벗어도 좋을 거 같다. 이 책 어디에서도 김구는 공산주의와 내통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하지만 중도파로서 좌와 우의 통합을 위해 한평생을 바쳤다는 찬사도 걷어 들여야 할 것 같다. 김구 지지자들에게 가장 아픈 부분은 이 점이 될 거 같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 부분이 가장 많이 아팠다. 좌와 우의 통합을 위해 가장 치열하게 애썼다고 믿어왔던 김구를 보내고 나면 우리는 그 대안으로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가? 역사는 그동안 김구를 선택했다. 김구를 선택하는 동안 동시대의 인물 여운형을 버렸다. 어쩌면 여운형은 김구가 받고 있는 찬사를 거의 다 받았어야 하는 유일한 인물이었는지 모른다. 책 제목을 김구 청문회라고 정한 것은 백범 김구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담아내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과거시험에 낙방하고, 스스로(?) 동학의 접주로 활동했던 구한말과 일본인 스치다를 살해하고 사형집행 직전까지 갖던 시절, 그리고 탈옥을 한 이후 망명생활과 한때 도산 안창호에게 임시정부에 문지기라도 시켜달라고 했던 그 유명한 인사청탁 때와 김구가 주석으로 임시정부를 이끌던 시절, 그리고 해방 이후 이승만과의 갈등과 협력관계, 그리고 안두희에게 저격당하던 순간들과 사후 김구가 민족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하는 장면들을 다룬다. 나는 개인적으로 왜 김구는 3.1 운동 각종 독립운동 및 독립선언서에 그의 이름이 없었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이 책을 만들면서 그 의문의 상당부분은 풀렸다. 이 책의 신랄하고 가혹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김구의 명성에는 조금의 흠이 가지 않을 수도 없을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 할지라도 해방공간 내에서 김구가 걸어온 길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성역화 된 인물은 백범 김구이다. 이승만, 박정희에 대한 신화는 상당부분 깨졌다. 하지만 백범에 대한 신화만큼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신화를 깨는 자체가 이 책의 목적은 아니다. 이제 김구에 대한 비판을 시작함으로써 일제 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그가 선택한 길이 최선의 길이었는지 다시금 묻는 첫걸음이 되기를 바란다. 정말 김구의 일생이 우리가 아는 그 어떤 정치인보다 탁월했는지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작가의 말 물론 김구는 친일파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친일파 부일배들로 이루어진 한민당으로부터 수많은 자금을 받았고 그들과 결탁했습니다. 부일협력 재벌 최창학으로 부터 제공받은 김구의 거주지 경교장(죽첨장), 송진우로부터의 900만원, 김연수에게 700만원 그리고 주석김구각하로 극존칭을 써가며 김구와 임시정부 홍보에 앞장섰던 동아일보…등은 극히 일부의 예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백범일지를 윤문, 첨삭한 자가 친일파 이광수였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더욱이 1962년 김구에게 수여된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대한민국장, 건국훈장 1등급)은 친일전력이 있는 박정희 군사정권 하에서 이병도 신석호 등 친일사학자들이 심사하여 결정된 것입니다. 이승만이 숨겨진 친일파라면 백범 김구의 경우 친일파들이 그를 항일독립 통일의 영웅으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역사가와 그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거가 조작, 왜곡되었다면 이해와 해석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할 것입니다. 신화화된 김구의 이미지를 넘어 이제 김구의 실체를 보아야할 시점입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구체적 인식은 우리가 가야할 미래의 방향을 잡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책의 저술 목적입니다. 그리고 김구로 인해 어둠 속에 묻혀버린 독립지사들의 명예가 이 책을 통하여 회복되었으면 합니다. 임시정부정통론이라는 허구의 독립운동사가 걷히고 제대로 된 독립운동사가 정립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전합니다. 〈백범일지〉는 친일파 문인 춘원 이광수가 윤문 각색한 작품이다 단어로서의 일지(逸志)는 국어사전에 ①훌륭하고 높은 지조. ②세속을 벗어난 뜻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한자사전도 마찬가지다. 즉 《백범일지(白凡逸志)》의 사전적 풀이는 백범자신의 훌륭하고 높은 지조를 쓴 기록물이란 뜻이다. 자신의 얼굴에 스스로 금칠을 한 셈이다. 대부분 무심코 넘어가는 《백범일지(白凡逸志)》의 표현에 몇 몇 학자들은 충격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백범일지》에서 ‘일지’는 숨겨진 기록, 곧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라는 뜻의 일지(逸志)이다. 억지로 끼워 맞추면 일지(逸志)의 의미를 숨겨진 기록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일(逸)은 ‘숨다’라는 뜻이 있고 지(志)의 뜻 역시 기록(記錄)이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숨겨진 기록을 의미하고자 일지란 단어를 선택했다면 志대신 誌를 사용했어야 할 것이다. 즉 白凡逸誌가 되겠다. 그러나 백범은 《백범일지(白凡逸志)》란 용어를 선택했다. 백범이 정말 스스로 자신을 높이고자 했는지 혹은 단어 사용의 미숙함으로 일지(逸誌)를 사용했는지 그 연유는 알 수 없다. 아무래도 독자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도산일기》를 비롯하여 앞에서 소개한 독립지사들의 자서전류는 대부분 직해본 백범일지와 마찬가지로 한문식 구식 표현을 사용한 문어체 문장이다. 당연히 독자들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백범일지》는 달랐다. 《백범일지》는 처음부터 유려한 문장, 쉽고 간결한 문체로 출발했다. 《백범일지》는 출간되자 말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백범 개인의 일생도 흥미로웠지만, 상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지사들의 행적을 어느 정도나마 파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체는 보너스였다. 국사원본은 《백범일지 친필본》이 공개될 때 까지 유일한 원본 구실을 했으며, 이 책을 기본으로 수많은 《김구자서전》과 《김구평전》이 탄생하여 백범일지 집필자의 텍스트 역할을 했다. 그러나 《국사본백범일지》는 친필본과 차이가 너무 많은 작품이다. 백범의 조상 이야기를 소개한 도입 부분부터 다르다. 친필본은 “조선(祖先)은 안동 김성(金性)이니 김자점(金自點) 씨의 방계(傍系)라…”로 시작되지만 국 사본의 첫 부분은 “우리는 안동 김씨 경순왕(敬順王)의 자손이다.…”로 출 발한다. 원본에 없는 내용이 추가된 경우다. 더욱이 일부 내용은 아예 빠져 있는 경우도 있다. 사리원에서 경의선 열차를 탔을 때 황해도 봉산의 만세 운동에 관한 이야기 등이 삭제되어 있다. 《국사본백범일지》는 단순 교열이 나 윤문 정도가 아니라 재구성본이라고 해야 맞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백범일지》의 진정한 작가는 누구라고 해야 할까? 백범은 《백범일지》 초간본에서 저자의 말을 남겼다. 이 글에서 백범은 “김지림 군과 삼종질 흥두가 편집과 번역, 철자법 수정 등 궂은일을 했다” 고 서술했다.8) 이 문장으로 인해 오랫동안 김지림이 《국사본백범일지》의 윤문자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광수가 윤문의 주인공임을 알고 있으며 인정하고 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김신이 이광수가 윤문자임을 고백했기 때문이다. 김신의 말을 들어 보자. “춘원은 자신이 그 일을 하겠다고 했답니다. 아버님은 그의 행실 때문에 망설였는데, 누군가가 글 솜씨도 있는 사람이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맡겠다 니 시켜보라고 했대요. 그가 윤문을 한 것은 사실이나, 아버님이 그걸 알고 맡기셨는지 의문입니다.” 친일파였던 춘원이 스스로 《백범일지》의 윤문을 자청했는지, 김구가 이 광수의 윤문을 알았는지 등에 관한 사항은 향후 좀 더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분명한 것은 이광수가 《국사본백범일지》의 산파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아무튼 《백범일지》가 전 국민의 교양서로 자리 잡게 된 일등 공신은 아무래도 이광수의 몫으로 돌려야 할 듯싶다. 김구는 과연 동학의 접주였나? 김구의 주장에 의하면 그는 나이 열아홉에 동학의 정식 접주가 되었고, 곧 고향으로 돌아와 팔봉이란 접명(接名)을 지었다고 한다. 여기서 당시 동학의 접주 자격에 대해 알아보자.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기술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천도교》편을 보면 동학의 접주 자격은 포교 능력에 따라 점수를 매겨 부여하였는데, 포교 인원 105명 이상인 사람은 접주, 500명 이상은 대접주가 되는 자격을 부여했다고 한다. 이러한 관례에 따르면 김창수는 나이에 상관없이 접주에 임명될 수도 있었다. 백범의 주장에 의하면 그의 연비는 무려 수천에 달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돈화(李敦化, 1884-?)가 편술한 《천도교창건사》 등 동학이나 시천교, 천도교 등의 자료 어디에도 19살 접주, 김창수는 등장하지 않는다. 결정적인 자료가 있다. 백범일지에도 등장하는 최유현(崔琉鉉)이 1918년에 정리하고 1920년에 편찬한 《시천교역사(侍天敎歷史)》를 보면 최유현 등 황해도 대표가 보은을 방문하여 최해월(최시형)로부터 접주 임명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김구에 의하면 계사년(癸巳年, 1893년) 가을에 오응선?최유현 등이 경통 (敬通)을 받고 충청도 보은에 있는 해월 대도주를 방문하는 일행 열다섯 명에 자신도 선발되어 최시형을 만났고 그곳에서 접주 첩지를 받았고 한다. 계사년은 갑오년(甲午年, 1894년)의 착오라 하더라도 김구는 자신의 입으로 분명히 정식 접주가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최유현은 자신 외 6명이 대선사를 방문했고 자신은 해서(海西)수접주로 임명되었다고 기록했다. 김구의 주장과 차이가 너무 많다. 15명과 6명의 차이 그리고 김창수는 아예 언급이 없다. 스치다 사건의 진상 1896년 3월 9일 치하포에서 일본인 스치다(土田讓亮)를 죽인 사건은 백범 김구의 업적을 꼽을 때 언제나 첫 머리로 등장한다. 소위 국모보수(國母報讐)다. 어린이독서진흥회라는 단체가 엮은 초등학생용 《백범일지》를 읽어보면 이 사건이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어떻게 알려져 있는지 그 연유를 짐 작하게 한다. 시체의 처치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분부하였다. 왜놈은 다만 우리나라와 국민의 원수가 될 뿐만 아니라 물속에 있는 어별에게도 원수인즉 이 왜의 시체를 강에 넣어 고기들로 하여금 나라의 원수의 살을 먹게 하라 하였다.…식후에 토전의 시체와 그의 돈 처치를 다 분별하고 나서 주인 이화보를 불러 지필을 대령하라 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를 죽였노라.” 하는 뜻의 포고문을 한 장 쓰고 그 끝에 ‘해주 백운방 기동 김창수’라고 서명까지 하여 큰길가 벽상에 붙이게 하고 동장인 이화보더러 이 사실을 안악 군수에게 보고 하라고 명한 후에 유유히 그곳을 떠났다. 당시 김구를 심문했던 내용과 언론 등은 스치다의 신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하기와라(萩原, 4월 6일): 나가사키(長崎)현(縣) 평민(平民) 스치다(土田讓亮) -김효익(4월 19일): 일본인 한 사람(日人一人) -이완용(5월 1일): 일본사람(日本人) -하기와라(6월 30일): 행상인(行商人) -박정양(7월 12일): 일본사람(日人) -하기와라(7월 18일): 우리나라 사람 스치다(我邦人土田讓亮) -김창수 초초(8월 31일): 단발을 하고 칼을 찬 수상한 사람, 일본인이므로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라고 생각 -이화보 초초(8월 31일): 일본인 토전양량(土田讓亮) -김창수 재초(9월 5일): 일본사람, 일본인 -이화보 재초(9월 5일): 일본인 -오기하라(荻原守一, 9월 12일): 우리나라 상인 스치다(我商土田讓亮) -한규설(10월 22일): 일본상인 스치다(土田讓亮) -독립신문(9월 22일): 일본장사꾼 토전양량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스치다가 일본군인 혹은 일본 육군 중위라는 말 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처음에는 일본인으로 기록하다가 어느 정도 신분 이 밝혀진 후에는 일본상인으로 표현했다. 심지어 김창수 본인조차 심문 시에 스치다를 일본인으로 말했다. 《백범일지》에서 스치다의 정체를 일본 육군 중위라고 한 것은 분명히 작의적인 왜곡이었다. 김구에게 종교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보신의 수단이었다 김구가 탈옥을 한 때는 1898년 3월 19일이다. 해주옥과 인천감옥에 구 금된 지 2년만이었다. 이제 22세가 되었다. 탈옥 후의 행적은 《백범일지》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김구가 공식문서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10여 년이 지난 이후부터다. 이 기간 그에겐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결혼을 하였고 위정척사계열이었던 스승과 결별하였으며 이름도 여러 번 바꾸었다. 가장 중요한 변신은 기독교로의 개종이다. 백범의 종교편력은 유명한 이야기다. 무속?유교?풍수?관상학?동학 불 교?기독교… 사후에는 가톨릭의 성세를 받아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얻었 다. 김구는 조선 민중이 선택할 수 있던 대부분의 종교와 접촉한 셈이다. 그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유교를 입신의 수단으로 삼았으나 과거 낙방 으로 좌절했다. 그 후 풍수?관상 등 무속과 관련된 학문에도 잠깐 흥미를 보이기도 했으나 곧 동학에 입도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동학도가 된 것도 기인이사, 이적 등 미신적인 요소에 대한 호기심이 큰 동기였다. 그가 불교 에 입적하여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얻은 것은 탈옥 후 신분세탁의 의미가 큰 개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너무 쉽게 믿고 너무 쉽게 그 종교를 버렸다. 백범에게 종교는 목적이 아니고 수단이었다. 백범의 종교편력은 묘하게도 그의 이름과도 연관이 깊다. 그가 동학에 입도했을 때 창수로 개명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백범일지》에 김창수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그가 동학에 입도하여 연비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고 주장할 무렵이다 ♧ 이봉창 의거에서의 김구의 역할 이봉창이 상해에 도착한 것은 1930년 12월이다. 그리고 이듬해 1월 경 민단사무소를 방문했다. 상해를 떠나 고베(神戶)로 출발한 것은 1931년 12 월 17일이다. 그러므로 약 1년 동안 민단사무소를 거점으로 백정선, 김동호 등을 만난 셈이다. 이 기간 동안 백정선과 김동호는 본명은 물론 임시정부내의 위치, 그 동안의 이력 등 자신들의 정체는 철저히 숨겼다. 이봉창은 1932년 10월 11일 사형이 집행될 때 까지 김구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재판 심리 중 백정선에 대해서 이봉창이 어떻게 발언 했는지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 나는 전에도 말씀드린 대로 조선 민족을 위해 희생할 각오를 가지고 그러한 행동으로 나갔던 것이므로 물론 죽음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또 한 일본 천황을 폭격할 생각으로 폭탄을 던졌던 것이지만 백정선이 나에게 이야기한 것과 같은 폭탄의 위력이 없었기 때문에, 나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었던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1932.01.10. 청취서》 ■ 내가 여러 번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죽을 각오로 천황 폐하의 생명을 빼 앗으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폭탄의 위력이 작아 실패 것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상해에서 시험해 보자고 했습니다만 백정선이 이미 말씀 드린 대로 대단한 위력이 있는 폭탄이라고 말하면서 시험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기에 이를 믿었던 것이 실패의 원인이며 이것에 대해서는 백정선을 원망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1932.01.12. 제3회 신문조서》 ■ 나는 백정선을 그렇게 학문이 있는 사람이거나 또 인격자라고도 생각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민단의 단장이며 다른 조선인들이 백정선을 보면 인사한다는 점 등에서 나는 백정선을 상해에 있는 조선인의 총 대표자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32.02.13. 제7회 신문조서》 ■ 나도 백정선의 배후에 상당히 훌륭한 사람이 있음에 틀림없다고 상상하고 있지만 나는 그것이 누구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민단 사무소에서 나는 ‘이 사람이다’라고 할 만한 훌륭한 사람이나 인격자 같은 사람과 만난 적이 없습니다. 《1932.02.13. 제7회 신문조서》 이봉창은 재판과정을 통하여 백정선이 김구(金龜)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무렵의 김구는 金龜 대신 金九라는 이름을 주로 사용 했다는 것은 몰랐고 더욱이 김창암, 김창수 등의 이름을 예전에 사용했다 는 것은 전혀 몰랐다. 청취서와 신문조서, 공판조서 등 제판 기록을 보면 유난히 눈에 띄는 내용이 있다. 자신의 의거가 실패한 것에 대하여 “대단한 위력이 있는 폭탄이다. 시험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 백정선의 호언장담을 믿었음에 아쉬움과 함께 분노를 표명하는 장면이다. 충분히 납득이 간다. 치밀한 계획 없이 의욕만 앞섰던 백정선에게 유감을 표시함과 동시에 그의 학문이나 인격을 거론한 점도 흥미롭다. 송진우 장덕수 암살의 배후로 거론되는 김구 장덕수의 정치노선은 송진우와 거의 유사했다. 소위 훈정론의 재등장이 었다. 임정법통론과 훈정론의 간격은 결국 두 사람의 죽음으로 귀결되었다. 서중석의 표현대로 “장덕수는 중경임시정부측의 우익 헤게모니 장악에 장애적 역할”을 한 것이 그가 암살당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 다시 재판정으로 돌아가자. 1948년 3월 12일 오전 9시경, 김구는 제8회 군률재판 공판정에 증인으로 출두했다. 그의 나이 73세였다. 1910년 안명근 사건 관련자로 체포된 후 38년 만에 서게 된 법정이었다. 김구는 증인 신문 내내 살해교사를 부인했다. 간접적으로 지시한 사실도 없다고 했다. 왜 김석황 등의 진술과 틀리냐는 검사의 질문엔 고문에 의한 강요된 답변이라고 대응했다. 1차 신문은 4시간 반이나 걸릴 정도로 장시간 소요되었는데, 정작 해프닝은 제2차 신문 때 일어났다. 김구는 이날 김 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홍명희 등과 함께 총선불참을 공식 선언했다.71) 오랫동안 이어져왔던 이승만과의 밀월이 완전히 깨어지는 순 간이었다. 그리고 3월 15일 오전 9시, 김구는 두 번째 진술을 위하여 법정에 섰다. 비교적 평온했던 첫날에 비해 이 날은 김구의 진술거부, 퇴청소동, 박광옥 의 난동 등으로 인해 재판자체의 정상적인 진행이 어려울 정도였다 안두희가 김구를 암살하기 전에 안두희는 김구와 독대를 한다. 그 독대의 과정에서 안두희는 김구에게 다음과 같이 추궁을 한다. 「그리고 건국실천원양성소(建國實踐員養成)는 무엇 하는 기관이며 혁신탐정사(革新探偵社)는 누구의 것이며 또 한독당(韓獨黨)의 소위 비밀당원 조직망이란 무슨 사명을 부여한 결사입니까. 한국군대는 김구 씨의 군대라는 외인(外人)의 평론에 대하여 선생님은 무슨 말로써 반박하시렵니까. 선생님! 제게 8?15기념일을 전후하여 중대한 지령이 있을지 모른다던 예비명령은 무엇에 대한 준비입니까.」 나의 음성은 높을 대로 높았다. 선생님도 노기등등한 안색으로 안절부절 못하시면서, 「무어야? 이놈 죽일 놈! 입이 달렸다고 함부로 지껄이는 거야?」 고함을 지르신다. 이제는 피차가 사리를 가릴 이지(理智)의 여유를 잃었다. 「여순 반란은 누가 교사한 것입니까?」 「뭐야 이놈.」 주먹으로 서안을 치신다. 「표(表)소령, 강(姜)소령과 기거를 같이하던 놈은 어떤 놈입니까?」 「저런!」 책 뭉치가 날아온다. 얼굴에 맞았다. 나도 주먹을 부르쥐고 고함을 질렀다. 「송진우 씨는 누가 죽였습니까?」 벼루가 날아와서 머리를 스치고 뒷벽에 부딪힌다. 「장덕수(張德秀) 씨는 누가 죽였습니까?」 「이 놈! 너 이놈!」 붓이 날아오고 또 책이 날아오고 종이 뭉치가 날아오고…. 나는 고개를 수그리고 잠깐 생각의 여유를 포착하려했다. 무슨 말씀인지 기억은 없으나 선생님께서는 노후(怒吼)를 계속하시는 것이다. 해방공간에서의 김구의 노선 반소?반공?임정봉대를 추진했던 김구의 노선보다 반소?반공?남한단정을 주장하는 이승만의 노선이 보다 현실성 있는 대안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한민당 선전부장 함상훈은 미국무장관보 힐드링의 연설을 부연하는 담화에서 “남조선에 조선인에 의한 자치정부가 수립되고 UN의 일원이 되어 그 정부가 조선 문제를 UN에 호소하여 남북통일의 주동체가 될 것을 고대 한다”며 아예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의 희망을 표시하기도 했다. 힘의 추는 급격히 이승만에게로 기울고 있는 중이었다. 김구와 이승만은 느슨한 형태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이승만의 도미로 그의 부재시 임정봉대를 위한 쿠데타 시도로 잠시 불편한 관계였던 두 사람이 미소공위 타도를 위해 다시 힘을 합쳤던 것이다. 그들은 ‘6?23’봉기를 계획하여 다시금 반탁의 물결이 일어나길 기도했다. 하지만 미군정과 경찰의 적극적인 도움이 없는 반탁시위는 애초부터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미소공위 무력화를 위한 김구의 마지막 선택은 역시 암살과 테러로 귀결 되었다. 제2차 미소공위가 개최되면서 가장 주목을 받은 인물은 중도파인 여운형과 김규식이었고, 실제 이들이 가장 중요한 테러?암살 대상자였다 단정찬성에서 좌우합작, 김구는 왜 노선을 변경했나? 이승만에 비해 김구의 노선은 갈짓자 행보였다. 그의 노선은 반소?반공 ?반탁?임정봉대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 은 임정정통론이었다. 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정적 제거 작업을 망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정적과의 제휴 역시 기피하지 않았다. 김구의 노선 중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단정에 대한 그의 처신이다. 이승만이 단정론자라면 김구는 통일론자라는 것이 보편적 인식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단정노선에 김구가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는가하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많다. 1947년 11월 말부터 12월 초, 짧은 기간이지만 그 무렵 김구의 노선은 분명히 남한단정론의 인정이었다. 자신의 생각이 이승만의 주장과 조금도 다름이 없으니 남조선총선거로서 정부를 세워야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김구가 일종의 항복 선언을 했다는 점이다. “단독정부는 절대 반대할 것이다.”라고 발표한 그 다음 날인 12월 23일부터 김구는 수차례에 걸쳐 이승만을 방문했다. 묘한 것은 김구의 폭탄선언에 대한 언급은 일체 없었고 회담 주제는 오로지 국의와 민대의 통합문제뿐이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통합단체의 간부 진영과 선거법 문제 등에 관해 12월 말 내내 협의했다. 결국 이승만은 김구와 결별하고 만다. 한민당과 한독당이 결합되지 못할 경우, 수족이 다 잘린 김구보단 돈과 조직이 건재한 한민당이 보다 필요했을 터이다. 정치가 이승만의 당연한 선택이었다. 단정?단선을 반대한 대부분의 정당?단체가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미군정은 통일을 열망한 조선민족의 각 정당?단체들을 죄다 좌익으로 몰아 불온시 했으며, 오직 김구와 김규식에게만 면죄부를 주었다. 미국이 김구와 김규식을 회유?설득하고자 한 것은 양김 에 대한 미국의 인식을 보여주는 다음의 문서가 참고 된다. 양김 씨는 표면적으로는 ‘통일한국’을 부르짖지만, 남북연석회의를 제안 하고 평양회담을 받아들인 실질적인 이유는 그들의 지지가 보잘 것 없으며 선거에 당선되는 것조차 불투명하자, 경기가 시작되길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미군정의 관점은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남북연석회의 이후 김구와 김규식이 미군정과 어느 정도, 어떤 선까지 접촉하였는가는 확실한 정보가 없다. 그러나 서로 간의 공감대 속에서 공동성명서에 서명을 함께 했던 이들과 연대하지 않고 오히려 단정세력 쪽으로 조금씩 다가선 것은 분명하다. 안두희는 왜 김구를 암살했는가? 김구의 암살을 이해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그 당시 김구의 노선을 파악해야만 할 것이다. 남북연석회의 이전 그의 노선은 반탁?반소?반공을 외쳤지만 실제로는 임시정부 정통론이 무엇보다 우선 적인 대원칙이었다. 그 후 남한의 단정실시가 확실시되자 이승만과의 연대에 의한 단정노선으로 변한다. 그리고 남북연석회의를 전후하여 노선이 또 변하게 된다. 이제는 미소양군 철수 후 남북한총선거 실시였다. 하지만 평양을 갖다오고 난 뒤 남북정권이 들어서자 그의 노선은 다시 요동치게 된 다. 마지막 시기 김구의 노선은 북조선과의 협상을 포기하고 그 대신 남한 정계복귀에 중심을 두었다. 그의 마지막 변신은 조용히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이승만 암살, 군부를 동원한 쿠데타 그리고 제2회 총선거 참가에 의한 정권교체… 등이 김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러나 김구의 움직임은 이승만과 미국CIC에 의해 세밀히 관찰되고 있었다. 미국은 좌익과의 연대에 의한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지만, 이승만은 김구의 현실참여에 두려움을 느꼈다. 결국 미국의 묵인과 방조 하에 이승만 권력의 핵심세력에 의해 김구의 죽음이 있게 되었다. 물 론 아직까지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우리가 풀어야할 숙제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안두희의 경우 어쩌면 확신범일 수도 있다. 이승만 진영이 의도하고 조작한 김구에 대한 이미지 즉 원래는 공산당을 때려잡던 김구가 변절하여 공산당과 연대하고 있다는 마타도어를 그대로 믿었을 가능성이 높다. 좀 가혹하게 말하자면 안두희는 연극무대의 피에로였으며 이승만 등 최고 권력자들에게 이용을 당했다는 뜻이다. 김구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한 박정희와 친일사학자들 건국공로훈장 제도는 1949년 4월 27일 대통령령 〈건국공로훈장령〉이 공포되면서 제정되고 시행되었다. 최초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은 1949년 8월 15일에 중앙청에서 거행된 건국공로자 표창식에서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에게 수여되었다. 박정희 군사정권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된 이 제도의 문제점 몇 가지만 지적한다. 첫째, 친일파들이 독립운동가의 서훈 자격을 심사했다는 점이다. 1962년 문교부 독립운동유공자 공적조사위원회 명단 7명 속에는 이병도와 신석호가 들어가 있다. 이 두 사람은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던 등의 전력으로 인해 친일인명사전에 등제된 이들이다. 친일이력이 있는 박정희 와이병도, 신석호 등이 김구를 최고 항일 투사로 만든 셈이다. 둘째, 공적내용이 사실과 다른 경우가 너무 많다. 김구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보훈처의 작성한 김구의 공적조서를 보면, 김구의 독립운동 기간을 50여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1894년 동학혁명 시기부터 김구가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보고 있는 모양이나 이것은 분명히 오류이다. 또 인천감리영(仁川監理塋)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후 집행일인 8월 26일 특명으로 사형집행이 중지되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며, 김구가 살해한 매약상 스치다(土田讓亮)를 일본 육군중위(倭陸軍中尉)라고 표현한 것도 백범일지를 일방적으로 신뢰한 결과이다. 셋째, 서훈기준이 모호하다. 건국훈장이냐 독립훈장이냐? 유공자들이 수여받은 훈장의 정식명칭은 건국훈장(建國勳章, 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이다. 13년 전 이승만이 받은 훈장을 같은 법률의 적용 하에 김구가 받은 것이다. 논란이 될 수 있는 것은 건국훈장이라는 용어다. 여기서 말한 건국은 1948년 성립된 이승만 정부의 출범일 것이다. 남한 단독 정부의 정통성 여부와 무관하게 아무튼 이 정부가 표방한 정치체제는 공화정이다. 516쿠데타와 김구의 아들 김신 박정희와 김구의 관계는 김구의 아들 김신과의 인연을 생각해 보면 보다 뚜렷해진다. 쿠데타 발생 사흘 후인 1961년 5월 19일에 발표된 32명의 군사혁명위원 명단에는 육군소장 박정희와 함께 공군중장 김신의 이름이 뚜렷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5월 23일에는 육군참총장 장도영 등과 “전력을 다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명령에 절대 복종할 것을” 선언했다. 그리고 김신은 박정희 정권과 내내 함께했다. 1962년 공군참모총장직을 예편한 김신은 타이완 주재 대사로 부임해 8년간 일했다. 1971년 귀국한 김신은 대통령의 권유로 공화당 후보로서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했다. 결과는 낙선이었다. 하지만 그 후 교통부 장관을 거쳐 유신시대에는 대통령 추천으로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이 된다. 그리고 독립기념관 초대 이사장을 거쳐 백범김구기념관 관장 및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이 그의 이력이다.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정권을 거쳐 현 박근혜 정권까지 양지만을 선택한 것이 그의 생애였다. 김구의 아들 김신이 박정희의 쿠데타에 일조함으로서 얻게 된 과실은 엄청났다. 김신 개인의 일신영달과 가족들의 기득권 진입은 차치하고라도 아버지 김구는 진보?보수?여?야의 경계와 상관없이 대다수 국민이 숭배하는 민족의 영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의 배경에는 민족의 영웅으로 김구를 선택한 박정희의 공로가 크다. 한편, 독재자 이승만의 대체자로 김구를 선택한 결과는 이승만의 문제점 을 덮는 효과도 있었다. 이 책을 통하여 줄곧 거론하였지만 김구와 이승만은 너무나 오랫동안 동지이자 동반자 관계였다. 그러므로 김구의 일생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이승만의 반민족적, 반민중적 행위에 대한 저항을 제 대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과오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독립운동 시기의 박용만, 태평양 전쟁 때의 한길수, 해방공간에서의 여운형을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역사는 박용만?한길수?여운형을 외면하고 김구를 선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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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
송복 | 가디언 | 2015-06-26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6-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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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
송복 | 가디언 | 2015-06-26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6-2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지난날의 교훈을 잊은 나라에게 역사는 자비롭지 않았다.
여든 노학자의 혼신의 역작!
절체절명의 조선을 되살려낸 류성룡의 리더십을 통해 오늘을 징계한다.
임진왜란, 청일전쟁, 러일전쟁, 경술국치, 그리고 오늘
징비懲毖하지 못한 자에게 역사는 결코 자비롭지 않았다.
왜 우리는 그토록 힘이 없었는가
왜 우리는 그토록 짓밟혀야 했는가
왜 우리는 그토록 극한 상황을 겪어야 했는가. 그 극한 상황에서도
왜 우리는 그토록 인내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왜 우리는 그토록 짓밟는 자들에게 말조차 할 수 없었는가
왜 우리는 그토록 분노할 수도 없었는가
침략군에 맞설 힘이 없었던 나라, 자신의 땅을 전쟁마당으로 내줄 수밖에 없었던 나라, 왜와 명의 싸움에 제 나라 백성이 죽고, 제 나라 가축과 곡식이 강탈당하는데도, 도망가기 바쁜 왕과 신하들,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한 장수와 무기조차 없는 병졸들, 조선은 그런 나라였다. 율곡이 상소문에서 송곳처럼 지적한 대로 조선은 ‘오랫동안 고치지 않고 방치해둔 만간대하萬間大廈’로 기둥을 바꾸면 서까래가 내려앉고, 지붕을 고치면 벽이 무너지는 그런 형국이었다. 그렇게 나라라고 말할 수 없는 나라였던 조선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간 ‘조선분할’을 노리는 침략자 왜와 조선을 ‘요동방어 울타리’로 삼으려는 명으로부터 처절하게 유린당해야 했다. 뼈아프고 부끄러운 역사이지만 이것은 가감 없는 임진왜란의 진실이다.
이 책은 그 치욕스런 역사의 현장에서 전시수상(영의정)과 군 최고사령관 격인 도체찰사로서 조선 자강과 조선 독립을 위해 온몸으로 전쟁을 치러낸 류성룡의 리더십을 냉철하고 뜨겁게 재조명한다.
전쟁이 끝나고 숭명파에 의해 재상에서 파직당한 그는 7년에 걸친 전란의 원인, 정황, 대안들을 기록해 동시대인에게는 조정의 여러 실책들을 반성하는 ‘징계의 채찍’으로, 후손에게는 다시는 같은 전란을 겪지 않기 위해 앞날을 준비하라는 ‘경계의 교훈’을 남기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다. 그것이 바로 《징비록》이다.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비옥한 강토를 피폐하게 만든 참혹했던 임진왜란에 대해 가장 사실적이고 가장 생생한 체험적 고통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들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망각증이 도져 오직 망한 명나라만 그리워하며 아느니 중국 인물이며 읽느니 중국 역사였다. 마치 제갈량의 출사표를 들먹여야 충신인 양 국가 개념도 역사의식도 없이 숭명 사상에 사로잡혀 자강하지 못했다. 당연히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역사적 체험인 《징비록》을 무슨 뜻인지 외면한 결과, 300년 후 역사는 재현된다. 임진왜란의 판박이처럼 조선을 놓고 흥정한 청일전쟁, 러일전쟁으로 또다시 국토가 유린되고 나서, 마침내는 저항 한번 못해보고 송두리째 나라를 일본에 넘겨야 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그래도 류성룡이 있었고 이순신이 있었다. 그 둘이 없는 경술년은 짓밟힘을 넘어 노예의 삶을 받아들여야 했다. 과거를 잊은 조선에게 역사는 결코 자비롭지 않았다.
경술국치로부터 104년이 지난 오늘, 남북분단의 냉혹한 현실을 앞에 둔 우리에게 여든의 노학자는 오늘을 징비懲毖하며 묻고 있다.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통일된 미래도 우리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 시대가 다시 류성룡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더 나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여든 노학자의 혼신의 역작!
절체절명의 조선을 되살려낸 류성룡의 리더십을 통해 오늘을 징계한다.
여든을 눈앞에 둔 이 책의 저자 송복은 저명한 정치사회학자답게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를 《징비록》 1, 2권 외에 [진사록], [서애전서]에 나오는 보고서 형식의 상소문과 예하 기관에 전달한 공문의 일종인 문이 등 총 549건의 자료를 빠짐없이 분석하여 정치사에 매몰되어 가려진 임진왜란 당시 사회경제사의 실상을 아프도록 날카롭게 드러낸다. 저자는 임진왜란을 류성룡의 두 가지 전쟁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하나는 명?왜의 4년에 걸친 강화협상을 통한 조선분할획책을 막아내는 ‘분할저지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서 식량을 모아 명군과 조선군에 군량을 대는 ‘군량전쟁’이 그것이다. 그 두 측면 속에서 당대 최고의 전략가이자 경세가였던 류성룡의 리더십을 재조명해 오늘날의 리더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류성룡은 확실히 조선조 500년을 대표할 정치리더로서 손색이 없다. 조선 조정 신하들 중 문제의 실상과 실체를 날카롭게 분석한 사람은 더러 있었지만 당위적이고 윤리적인 방법을 제시할 때 그는 어떤 상황과 문제에 대면해서도 알맞은 방법론을 가지고 있었다. 명 황제의 명命으로 조선을 분할하겠다고 압박하는 횡포한 명군 장수들을 대할 때는 강직함보다 온유하고 부드러움으로 그들을 눌렀다. 군량과 군마의 먹이를 구할 수 없어 군량전쟁의 열세에 놓였을 때도 전쟁사에서 누구나 쓰던 가장 손쉬운 방법인 백성을 약탈하는 비인간적인 방법을 절대 쓰지 않았다. 또한 그는 최고의 권좌에 있으면서도 권력을 이념으로 당파를 만들거나 개인화하지 않았다.
그는 경세가로서 지극히 실용적인 리더십의 진면목을 발휘한다. 그 탁월한 예가 모두가 군량조달을 위해 전통적인 방법인 ‘전세’ ‘작미’ ‘둔전’에 매달려 있는 상황에서 류성룡은 재력 있는 중인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군량을 바치도록 하는 ‘모속’과 실직 없는 관직을 팔아 충성심과 군량을 동시에 해결한 ‘공명첩’, 그리고 무역을 통해 곡식을 조달하는 ‘무속’이라는 세 가지 방법을 창안하여 군량문제를 해결해낸다. 여기에 군편제와 군기능을 혁신한 군개혁의 대설계 ‘기무10조’는 그를 왜 조선조 최고의 ‘재상’이자 전략가라 평가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더불어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절묘한 인사, 즉 문신인 권율을 육군 장군에 발탁한 것과 육군으로 경력을 쌓아 온 이순신을 수군에 천거하여 임진왜란의 국난을 극복한 일화는 가히 류성룡 리더십의 압권이라 하겠다.
특히, 이순신의 7단계나 뛰어넘는 파격 인사는 이후 류성룡 자신을 탄핵하는 빌미가 되기도 하지만 개의치 않음으로써 무사안일·복지부동·적당주의 타성에 젖어 있는 공직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이 책을 읽다보면 ‘백성이 즐겁게 따르게 해야 한다’는 그의 리더십 신념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백성은 온몸을 바치는 리더에게 감동하는 법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리더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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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리더의 자격
석산 | 북오션 | 2015-12-10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6-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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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리더의 자격
석산 | 북오션 | 2015-12-10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6-2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우리 역사상 가장 진취적인 시대이자 가장 굴욕적인 시대, 고려 474년을 다스린 왕의 목소리에서 배우는 참역사. 후삼국 통일, 무신정권, 몽골의 침입, 위화도 회군 등 거대한 사건 속에서 왕은 어떤 선택을 했는가. 또한 그들은 백성을 위해 어떤 목소리를 냈는가. 리더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통사적 역사를 재미있게 읽으며 그 모든 의미를 되새겨본다.
내가 왕이다
천년 왕국 신라가 기울고, 여기저기서 스스로를 왕이라 자처하고 나선 후삼국시대. 소위 군웅할거의 시대라 한다. 시대를 평정한 방법은 전쟁이었지만, 백성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각 군웅이 내건 비전이었다. 군웅은 나라를 세워야 하는 이유를 현대 정치인들이 공약을 제시하듯이 공표했고, 그에 따라 지방 호족과 백성은 자신의 운명을 거는 선택을 했다. 선택이란 매우 중요한 것이란 걸 역사는 말해준다. 당시 백성은 올바른 선택을 해서 왕건을 지지했다. 그 덕분에 474년간 지속할 수 있는 고려가 세워진다.
34명의 왕이 무엇을 말해주는가
왕건이 왕이 된 후 34명이 고려를 다스렸다. 우리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서건, 교과서를 통해서건 조선 왕이 무엇을 했는지는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다. 아이들도 “태정태세문단세……”라고 리듬을 타서 왕조의 순서를 외울 정도다. 아마도《조선왕조실록》이라는 소상한 기록물이 남아 있기 때문이겠지만, 고려 시대도 조선 시대 이상으로 파란만장하고 되돌아볼 교훈이 많은 시대다. 어쩌면 더 극적일지도 모른다.
거란이 중원으로 진출하려던 성종 시대에는 오히려 과감하게 강동 6주까지 국토에 포함하며 북으로 진출했다. 반면 무신정권 이후 약해질 대로 약해진 왕권을 행사하던 원종은 몽골의 속국을 자처했다. 이후 고려는 몽골식 변발을 하는 등 사실상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물론 당시 몽골에 대항할 수 있는 나라는 없었다. 하지만 성종 때의 거란도 무시할 수 없는 거대 세력이었다. 결국 누가 앞에서 이끄느냐에 따라 결과는 천양지차가 된다는 것을 고려 왕을 통해 우린 제대로 알 수 있다. 그래서 고려 왕이 내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통사적 의미가 있는 고려 왕 이야기
일반적으로 고려에 대한 지식은 파편화되어 있다. ‘태조 왕건’, ‘무신정권’, ‘최영 장군과 이성계’ 식으로 모든 역사가 따로 논다. 역사는 그렇게 따로따로 흘러가지 않는다. 역사에는 원인이 있으며 결과가 있다. 왕조시대에는 원인을 만든 것도 왕이며 결과를 만든 것도 왕이다. 그래서 왕의 이야기를 읽으면 원인과 결과를 모두 알게 된다. 시대정신을 통사적 의미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위에 열거한 세 가지 단어도 통사적으로 해석하면 하나의 사건으로 묶을 수 있다. 왕건은 건국을 하며 ‘고구려 고토 회복’을 비전으로 내세웠다. 그래서 북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인 서경(평양)을 중시하라고 후대 왕에게 유언으로 남겼다. 이후 서경은 후대 왕들에게는 계륵 같은 존재가 된다. 서경 세력과 개경 세력을 어떻게 조율하느냐에 따라 왕권이 확립되거나 흔들렸다. 인종은 고려 전성기에 왕권을 물려받았으나 외척인 이자겸에 의해 제거될 뻔하자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뜻을 품고 서경으로 천도를 하려 했다. 하지만 서경 천도는 무위로 끝난다. 이는 결과적으로 무신이 천대받는 환경으로 이어진다. 고토 회복 쪽으로 나라의 뜻이 모였다면 상대적으로 무신이 우대받을 수 있지만 그 뜻이 꺾였기에 문신이 더욱 득세하게 된 것이다. 이에 불만을 품은 무신은 의종 시대에 변란을 일으켜서 왕을 꼭두각시로 만든다. 왕권이 무너지고 무신에게 지배당하는 상황에서 몽골이 강성해지자 고려는 이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결국 식민지나 다름없는 시기를 거치고 나서, 원(몽골)이 쇄하고 명이 흥하자 최영은 다시 북벌(고토 회복)로써 나라를 다시 세우고자 했으나, 현실적인 이성계에 가로막혀 고려 역사는 막을 내린다.
이처럼 단편적인 사건도 통사적으로 바라보면, 의미가 남다르다. 게다가 그 안에 심어놓은 저자의 촌철살인 같은 ‘리더십 평가’가 이 책의 가치를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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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요리하는 조선 남자
이한 | 청아출판사 | 2015-09-04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6-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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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요리하는 조선 남자
이한 | 청아출판사 | 2015-09-04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6-2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조선 사람들도 맛집 탐방을 했을까?
조선 남자들은 직접 요리를 했을까?
조선 시대에 가장 인기 있는 음식은 무엇이었을까?
맛있는 것에 탐닉한 조선 사람들이 남긴 맛있는 기록들!
조선의 요리하는 남자들
이제까지 집에서의 요리는 흔히 여자의 영역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요즘 TV 매체에서 남자 셰프들이 활약하고, 레시피를 소개하는 소위 ‘쿡방’ 등으로 남자들도 요리의 세계에 점차 눈을 돌리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 시대에는 어땠을까? 세종 시대에 명나라가 요리 만드는 처녀들을 공녀로 요구하자, 궁중요리는 남자의 영역이라 여자들이 아는 게 아니라며 당황했다는 기록이 있다. 왕실에서 궁중 요리를 만들었던 숙수들은 모두 남자였고, 왕실의 요리 재료를 키우는 것도 남자들의 몫이었다. 또한 반가나 민가에서도 손수 요리하는 남자들이 있었다.
시간이 흐른 뒤의 실학자 이덕무는 ‘요리는 부인의 일’이라고 단언했으나, 또 다른 실학자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직접 요리하고, 레시피를 공유하고, 농사를 짓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조선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우리는 조선 시대를 공부할 때 역사 그 자체, 왕조, 정치, 사상 등에 집중하면서 자연히 당시 사람들은 어떤 것을 먹었는지, 어떻게 요리했는지 등 식생활에 대해 당연한 궁금증조차 가질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조선 시대도 사람이 살던 시대였다. 그들은 매일 성리학만 공부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처럼 맛있는 것을 같이 먹고, 즐겁거나 슬플 때는 마시고, 때론 직접 요리를 해서 친한 이들과 나눠 먹으며, 그렇게 살아왔다.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은 맛있는 것을 먹는 즐거움을 위해 천 리 길을 마다하지 않은 식도락가였다. 목은 이색은 생선회와 메밀떡 등 먹을 것을 주제로 끊임없이 시를 썼으며, 초당 박제가는 맛있게 개고기를 요리하는 레시피를 정약용에게 전수했다. 연암 박지원은 직접 고추장을 담갔으며, 참외를 좋아했던 다산 정약용은 직접 참외 농사를 짓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수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에 탐닉하였으며, 그와 관련해 다양한 기록들을 남겼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는 조선 시대의 음식과 관련된 여러 가지를 살펴본다. 흔한 음식, 언제나 먹을 수 있는 편한 음식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하고 자주 먹었을 역사 속의 요리와 그걸 만들어 먹고 기록으로 남긴 남자들의 이야기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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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요리하는 조선 남자 (Special Edition)
이한 | 청아출판사 | 2015-11-24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6-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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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요리하는 조선 남자 (Special Edition)
이한 | 청아출판사 | 2015-11-24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6-2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 본 도서는 2015년 8월 출간된 《요리하는 조선 남자》에 일러스트와 이미지, 내용을 추가, 보완하여 새롭게 편집한 [Special Edition] 도서입니다.
맛있는 것에 탐닉한 조선 남자들이 남긴 맛있는 기록들!
조선 사람들도 맛집 탐방을 했을까?
조선 남자는 직접 요리를 했을까?
조선 시대에 가장 인기 있는 음식은 무엇이었을까?
? 요리하는 조선 남자들
이제까지 집에서의 요리는 흔히 여자의 영역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요즘 TV 매체에서 남자 셰프들이 활약하고, 레시피를 소개하는 소위 ‘쿡방’ 등으로 남자들도 요리의 세계에 점차 눈을 돌리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 시대에는 어땠을까? 세종 시대에 명나라가 요리 만드는 처녀들을 공녀로 요구하자, 궁중 요리는 남자의 영역이라 여자들이 아는 게 아니라며 당황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왕실에서 궁중 요리를 담당했던 숙수들은 모두 남자였고, 반가나 민가에서도 손수 요리하는 남자들이 있었다. 조선 후기 이덕무는 ‘요리는 부인의 일’이라고 단언했으나, 또 다른 실학자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직접 요리하고, 레시피를 공유하고, 농사를 짓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까지 우리는 조선 시대를 공부할 때 역사 그 자체, 왕조, 정치, 사상 등에 집중하면서 당시 사람들의 일상에 대해 알아볼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특히 어떤 것을 먹었는지, 누가 어떻게 요리했는지 등 식생활에 대해서는 당연한 궁금증조차 가질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조선 시대도 이렇게 사람이 살던 시대였다. 오늘날 우리처럼 맛있는 것을 같이 먹고, 즐겁거나 슬플 때는 마시고, 때론 직접 요리를 해서 친한 이들과 나눠 먹으며, 그렇게 살았다.
? 미식에 탐닉한 역사 속 인물들
고려 말의 마지막 충신이자 조선에 성리학을 소개한 장본인인 이색은 먹는 것을 밝히기로 유명하여, 고려 말 먹거리에 대해 수많은 자료를 남겼다. 스스로 식탐이 심하다며 ‘나이 들어 나처럼 먹을 거 밝히는 사람이 또 있을까’라는 시를 읊었고, 이를 뽑은 후에는 맛있는 걸 먹기 힘들어졌다고 슬퍼하기도 했다.
집현전 출신으로 여섯 임금을 섬긴 서거정은 게를 사랑하고 차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하여 뛰어난 글 솜씨로 이 맛있는 음식들을 노래했다.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은 아버지 덕으로 식도락에 눈 뜨고 잘사는 처가 덕에 맛의 호사를 누린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귀양을 갈 때도 맛있는 음식이 있는 장소를 골라 갔으며, 귀양 생활 덕에 전과 같은 식생활을 즐기지 못하게 되자 자신이 과거 먹었던 먹거리들을 책으로 정리했다. 이것이 조선 전국의 식도락 리스트인 《도문대작》이다.
평생에 걸쳐 먹거리들을 연구하고 먹었으며, 마침내 직접 농사까지 지은 인물이 있으니, 그는 정약용이다. 정조의 귀여움을 받던 시절에는 직접 온갖 요리를 해서 먹었으며, 귀양을 가서는 참외 농사도 짓고 장도 직접 담근 인물이다.
이렇게 우리에게 익숙한 수많은 당대 조선인들이 먹을 것에 탐닉한 순간, 그와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각종 기록을 통해 만날 수 있다. 흔히 먹었던 음식, 그 음식의 역사, 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욕심까지 조선 남자들이 남긴 맛의 세계를 살펴본다.
? 조선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이 책에서는 조선인들의 주요 먹거리를 세 개의 장으로 구분하여, 당시 평범했던 혹은 인기 있던 먹거리들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엮어 낸다. 제1장 〈고기〉 편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닭고기, 쇠고기, 회와 현대에 혐오식품이 된 개고기까지, 당대 사람들이 이 고기들에 가진 인식과 각종 조리법을 소개한다. 제2장 〈별식〉에서는 간장게장, 상추쌈, 냉면, 떡국, 만두 등 오늘날 우리들이 입맛이 없을 때, 혹은 특별할 때 먹었던 음식들을 만난다. 이 음식의 기원을 비롯하여 어떻게 먹기 시작했는지, 이 음식들을 즐긴 사람들에는 누가 있는지 알 수 있다. 제3장 〈장과 디저트〉에서는 고추장, 참외, 인절미를 통해 또 다른 음식의 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 맛의 지도를 바꾼 고추장부터 조선 사람들이 간식으로 선호한 참외와 인절미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음식에 얽힌 일화와 요리의 조리법, 재료까지, 이 다양한 이야기들을 개인 문집과 당대의 각종 요리서를 망라하여 찾아내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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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용포 속의 비밀, 미치도록 가렵도다
방성혜 | 시대의창 | 2016-01-18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6-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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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용포 속의 비밀, 미치도록 가렵도다
방성혜 | 시대의창 | 2016-01-18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6-2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가려움이라는 키워드로 승정원일기에서 찾아낸 조선 왕실의 비밀스러운 이야기
저자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등 고문서를 통해 과거 우리 선조들은 어떤 병을 앓았으며 이를 어떻게 치료했는지를 꾸준히 연구해왔다. 이 가운데 조선 왕들이 빈번하게 앓았던 ‘가려움증’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풀었다. 이 책은 조선의 역사를 들려주면서도 우리가 몰랐던, 혹은 관심을 갖지 않았던 새로운 역사적 사실에 대해 알려준다. ‘한낱’ 가려움증으로 고통받았던 한 인간으로서의 왕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조선 왕들의 성정은 어떠했으며 왕들의 질병이 조선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즉 기존의 역사서와는 다른 시각에서 조선의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해 저자는《승정원일기》에서만 ‘가려움’에 대한 기록을 2,000여 건 넘게 찾아냈으며, 그 밖에 1만여 건이 넘는 여러 1차 사료 원문을 직접 해석하여 연구했다. 가려움증에 대한 기록이 없는 헌종, 철종을 제외한 조선 16대 왕 인조부터 26대 왕 고종까지 9명의 왕, 2명의 왕비, 2명의 세자, 2명의 세자빈 그리고 1명의 세손까지 총 16명의 왕실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실었다. 또한 내의원에서 쓰였던 여러 처방과 약에 대해 서술했다.
조선의 왕들이 가장 흔하게 앓았던 병, 가려움증
조선의 왕들은 여러 피부병을 앓았는데 그 과정에서 가려움증이 나타났다. 영조는 가려움으로 몸서리치면서 “가려운 것이 아픈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들다”라 말했다. 또 “가려울 때에는 마치 미치광이처럼 된다”라고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에게 참기 힘든 고통을 주는 것이 바로 이 가려움이라는 증상이다.
왕들이 가려움증을 앓았던 이유는 다양했다. 인조는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뒤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질지 모르는 불안감에 항상 떨어야 했다. 게다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사신에게 항복 의식을 치르며 삼킨 분노가 인조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이런 감정의 소용돌이는 급기야 간에 문제를 일으켜 몸이 가렵고 초록색 땀이 나는 증상이 나타났다. 그의 아들 소현세자는 추운 겨울날 귀국길에 오르다 병을 얻었고, 흔히 알 듯 독살된 것이 아니라 인조의 무관심과 방관으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폐가 병들어 죽었다. 현종은 푹 쉬고 잘 먹으며 요양에 전념해야만 하는 결핵 환자였고, 경종은 스트레스성 땀띠 환자였다. 숙종은 세자 시절부터 성질이 사납기로 유명했고 왕위에 오른 뒤에는 다혈질 군주였다. 수십 년의 재위 기간 동안 그렇게 분노를 다스리지 못할 때마다 숙종의 간은 서서히 기능이 멈췄고, 결국 말년에는 간경화로 밤마다 가려움에 치를 떨어야 했다. 영조는 회충증 환자였으며 오래 살았던 만큼 병도 많았다. 한번은 복통으로 뜸 치료를 하다가 낙형을 없애는 등 국법을 바꾸기도 했다. 효장세자의 빈인 현빈궁은 개창(옴)을 앓다가 토황증으로 목숨을 잃었다. 정조는 더위를 많이 타고 울화가 쌓인 체질이었고 인삼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이처럼 왕들은 단순한 피부병에서 가려움증이 비롯된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로 인한 내장 기관의 악화가 가려움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스트레스로 인해 고통받는 현대인과 다르지 않은 임금의 삶
조선 시대 왕의 하루 일과는 혹독했다. 해가 뜨기 전 기상해야 했고 밤 10시는 되어야 모든 공식적인 일정이 끝났다. 지금으로 치자면 새벽 4, 5시에 기상해서 출근하고 밤 10시까지 격무에 시달리다가 겨우 퇴근하는 셈이었다. 잠자는 시간 외에는 죽을 때까지 나랏일만 하는 것이 임금의 일과였다. 선위하거나 쫓겨나기 전까지는 절대 그만둘 수 없었다. 이러니 왕들에게는 스트레스도 많고, 그만큼 온갖 병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조선 왕들의 삶이 21세기 현대인의 삶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왕들의 삶과 닮은 21세기의 인조가, 21세기의 현종이, 혹은 21세기의 정조가 지금도 곳곳에서 고통받고 있다. 그리고 《승정원일기》 속 의관들이 내린 처방과 현재 저자가 진료하고 있는 환자들의 처방이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좋은 옷을 입고 온갖 진귀한 음식을 먹으며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던 ‘임금’이 사실은 바쁘고 여유 없는 삶을 사는 평범한 현대인과 다를 것 없었다. 그들이 병을 얻은 이유 또한 스트레스 혹은 마음의 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가장 존엄하고 위대한 왕 또한 결국 ‘인간’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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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로 읽는 라이벌 한국사
김갑동 | 애플북스 | 2015-12-08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6-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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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로 읽는 라이벌 한국사
김갑동 | 애플북스 | 2015-12-08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6-06-2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인물’을 알면 ‘한국사’가 보인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역사는 영원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역사는 유행의 ‘복고’ 성향처럼 되풀이되는 양상을 보인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아도 과거의 어느 시기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며, 그럴 때 우리는 역사 속에서 현재의 선택에 대한 조언을 얻거나 미래를 예측해볼 수 있다. 저자는 흥미진진한 영웅들의 삶과 28인의 숙명적인 대결을 보여주며 오늘날에도 적용해볼 수 있을 만한 갈등과 경쟁의 해법 등 다양한 삶의 지혜를 담아냈다.
이 책은 삼국시대부터 현대사까지 라이벌 관계에 있던 인물들을 통해 한국사를 재조명하고 있다. 같은 시대를 살지만 서로 다른 선택을 했던 양자의 입장을 비교함으로써, 각 인물들의 다른 시작과 말로, 삶의 여정은 물론 각 시대를 뜨겁게 달궜던 갈등과 쟁점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하였다. 특별히 라이벌 간에 발생했던 주요 사건과 중심사상을 놓치지 않고 다뤄서 일반 독자들도 새로운 시각으로 흥미롭게 한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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