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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병자호란 47일의 굴욕
윤용철 | 말글빛냄 | 2014-01-03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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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병자호란 47일의 굴욕
윤용철 | 말글빛냄 | 2014-01-03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인조,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다(三排九叩頭)
굴욕의 역사 병자호란 이 책 《병자호란 47일의 굴욕》은 1636년(인조14년)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병자호란은 우리 역사에 있어 가장 치욕스런 사건 중의 하나다. 역사 이래 우리나라는 많은 외적의 침입을 당하고 근세에 이르러서는 일본에 의해 국권 침탈 등의 수난을 당하긴 했지만, 우리나라의 왕이 외국의 왕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술잔을 올린 적은 일찍이 없었다. 조선조의 인조가 유일하다. 물론 백제의 의자왕과 고구려의 영류왕이 당나라에 압송되었다는 설은 있지만, 그래도 머리를 조아린 기록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자호란과 관련된 국내의 출판물을 찾기란 쉽지 않다. 물론 병자호란과 관련된 많은 논문집들이 있지만 일반 대중을 위한 도서는 많지 않다. 이는 대중의 정서에 내재되어 있는 치욕의 역사에 대한 거부반응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일반인이 기억하고 있는 병자호란에 대한 지식은 협소할 수밖에 없다. 단지 남한산성으로의 피난과 삼전도의 치욕, 최명길과 김상헌, 그리고 삼학사에 대한 어렴풋한 지식이 거의 전부일 지도 모른다. 역사는 늘 무수한 이야깃거리를 파생해낸다. 그렇게 파생되어 흘러넘치는 이야기들이 진실처럼 떠돌기도 한다. 이 책은 그러한 점에 있어서 철저히 객관적이다. 또한 저자는 추론을 삼가고 사실 전달에 주력하고 있다. 온전히 자료에 의존함으로써 독자들이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의 집필 근거를 나만갑의 《병자록》, 정약용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과 《조선왕조실록》에서 찾고 있다. 특히 《병자록》의 저자 나만갑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옆에서 보좌하며 식량과 물품을 관리하던 양향사라는 직책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직접 접하고 가감 없이 기록했을 것이다. 즉 저자가 말하는 《병자록》의 진실성에 대한 근거이다. 또한 저자는 조선조의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을 철저히 들추어 병자호란 당시의 상황을 정리함으로써 신뢰를 더해준다. 이 책 《병자호란 47일의 굴욕》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원인, 남한산성 안에서의 47일 동안 일어났던 생생한 이야기들, 산성 밖의 전투, 전란 후에 병자호란으로 야기된 이야기들을 흥미 있게 구성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건조한 역사서가 아닌 대중의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또한 부록으로 주요 등장인물들에 대한 약력 및 해설을 곁들였다. 이 책은 당시와 오늘의 시대상황을 견주어 음미해볼만 한 대목이 많다. 강대국에 끼어 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이나, 국난에 처해 있으면서도 정치인들이 벌이는 탁상공론들이 오늘날과 하등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당시 상황에 비추어 누구의 결정이 옳았는지 나름 주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늘 현재의 잣대만으로는 재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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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이덕일 | 역사의아침 | 2012-05-09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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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이덕일 | 역사의아침 | 2012-05-09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스물여덟, 비운의 세자가 남긴
미완의 꿈과 비극의 진실! 조선왕실 500년 역사상 가장 비참했던 사건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영조 38년 윤5월 21일, 여드레 동안 뒤주에 갇혀 있던 세자가 죽었다. 이후 그의 이름은 금기가 되었으며, 그 누구도 그 사건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부왕 영조는 아들을 죽음으로 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나경언의 고변서는 물론 그에 관한 대부분의 기록을 없앴다. 그렇게 사라져간 사도세자 진실의 빈자리를 세자빈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이 메웠다. 『한중록』은 영조의 이상성격과 사도세자의 정신병의 충돌 결과가 비극의 원인이라 했다. 세자의 부인이 쓴 피맺힌 기록의 내용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렇게 그의 이야기는 진실이 되었다. 하지만 실록의 기록은 달랐다. 『영조실록』에서는 사도세자가 『한중록』이 전하는 정신병자와는 거리가 먼, 성군의 자질을 지닌 인물임을 증명할 수 있는 기록들을 찾을 수 있다. 이에 저자는 너무나 다른 두 기록의 간극을 메우고자 사도세자와 관련된 현전하는 다양한 사료를 취합하고 분석한다. 이를 통해 각각의 기록 행간에 담긴 사도세자의 본모습과 그 죽음의 진실에 좀더 가까이 다가간다. 그 과정에서 세밀히 분석되는 삼종의 혈맥, 노론과 소론의 대립과 갈등, 영조의 탕평책과 그 한계 등 영ㆍ정조 대의 시대적 상황과 정치 지형은 조선 역사의 한 부분을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키워드가 된다. 『사도세자의 고백』을 개정한 이 책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는 사료에 나타난 관련 기록들을 보충함으로써 ‘사도세자’에 대한 의견을 좀더 보강했으며, 그와 함께 이전 판의 몇 가지 표기 오류 등을 정정했다. 『한중록』의 이면에 감춰진 또 하나의 역사!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은 ‘피눈물의 기록’이라는 의미의 『읍혈록』이라고도 불린다. 남편인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본 혜경궁의 기록인 까닭에 후세 사람들이 그 한 서린 여인의 주장을 진솔하게 받아들인 것은 인지상정이다.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사도세자는 정신병이 있었으며, 그 정신병은 자식들을 편애한 영조에 의해 심화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더불어 남편 사도세자의 죽음은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이 만들어낸 비극임을 강변한다. 그러나 세자가 죽은 후에도 승승장구해 혜경궁의 부친 홍봉한과 중부(仲父) 홍인한이 정승의 지위를 누린 당대 최고의 명문가였던 혜경궁의 친정 풍산 홍씨 가문은, 공교롭게도 정조가 즉위하면서 사도세자를 죽인 주범으로 몰려 몰락했다. 이는 『한중록』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자유로울 수 없었던 사건 관련자의 기록이며, 또한 가해자의 기록일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혜경궁이 사도세자의 정신병, 시아버지 영조의 성격이상 등을 강조하면서 『한중록』을 집필한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과 자신의 친정, 풍산 홍씨 가문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무고함을 변명하기 위해서였다. 아버지 영조와 다른 길을 걷다! 영조 31년(1755) 2월 4일, ‘간신이 조정에 가득해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는 내용의 괘서가 나주 객사에 붙었다. 소론 강경파인 윤취상의 아들 윤지가 모의를 꾸미며 붙인 벽서인데 나주 목사 이하징 등 서울과 지방의 소론 일부가 연루되었음이 밝혀졌다. 게다가 이 사건과 관련된 자들 중에는 과거, 노론이 주상인 경종의 살해를 모의한다는 고변으로 벌어진 임인옥사 때 당시 세제인 연잉군(훗날 영조)을 역모의 수괴로 주장한 소론 강경파 김일경이 옳다고 이야기한 자도 있었다. 영조와 노론의 입장에서는 나주 벽서 사건은 영조의 왕위 계승의 정당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민감한 사건이기도 했다. 결국 노론은 이 사건을 소론 전체를 역적으로 모는 계기로 삼았고 영조는 이를 추인했다 하지만 세자의 생각은 아버지 영조와 달랐다. 경종 시절 노론의 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은 문제가 있는 행위라 생각하던 그는 경종 때 연잉군이던 부왕을 도운 소론 온건파마저 적당으로 모는 데에 반대했다. 또한 나주 벽서 사건 이후 벌어진 토역경과 사건에서도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한중록』에서조차 ‘세자가 소론에 동정적이다’라고 언급할 정도로, 그는 분명 노론과 다른 정치관,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노론에게 세자는 자신들이 모셔야 할 다음 주군이 아닌 분명한 경계의 대상이었다. 성군의 모습을 보인 사도세자 “어릴 때의 세자는 실로 성인의 자질이 있었다.” 영조는 훗날 문득 이렇게 말하곤 했다. 노론과 혜경궁은 정신병자라고 했으나, 『영조실록』에 기록된 온양 행차 때 사도세자의 모습은 달랐다. 마구간을 탈출한 군마가 농토를 상하게 하자 쌀 한 섬을 밭주인에게 주어 보상케 했고, 나이 많은 노인들을 불러 위로연을 베풀었으며, 선비들을 불러 학문에 힘쓰도록 권면했다. 몸이 불편해 요양하기 위한 행차였지만 강연은 멈추지 않았다. 또한 귀경길에는 농사 작황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조세와 부역을 감면하라고 하령했다. 아버지 영조 못지않은 애민(愛民)의 세자였으며, 성군의 자질을 가진 작은 군주였다. 온양 행차는 세자의 위의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세자가 ‘포악하다’ ‘정신병이 있다’는 등 노론이 조직적으로 퍼트린 소문이 거짓임을 분명히 밝히는 계기도 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온양 행차 때 보인 백성들의 찬사와 충청도 사대부와 부로들의 칭송은 노론과 영조로 하여금 세자를 더욱 경계하게 만들었다. 여드레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영조 38년(1762) 윤5월 13일, 세자는 영조의 명으로 휘령전에서 뒤주로 들어갔다. 14년 동안이나 대리청정하던 세자가 초여름의 뜨거운 햇살 아래 신음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정대신들은 세자를 구원하기는커녕 그 반대 행위에 열중했다. 세자의 가족들 중 세자의 목숨을 구하고자 영조에게 빈 인물은 세손뿐이었다. 세자가 뒤주에서 밤을 새운 첫날에 세자의 장인인 좌의정 홍봉한은 ‘세자를 구하려 하지 않는 대신들을 힐난하고, 세자가 뒤주에 갇힐 때 울부짖었다’는 이유로 한림 윤숙을 처벌하라고 요청했다. 세자가 죽던 날 그는 한강에서 한가히 뱃놀이를 하고 있었다. 세자가 죽은 후 홍봉한은 “영빈께서 아뢴 것은 오직 전하를 위한 것으로서 성상께서 단행하신 것이고, 신이 성상의 뜻을 받들어 행한 것이며, 그다음은 여러 신하들이 받들어 행한 것입니다”라고 세자의 죽음에 대해 언급한다. 이는 자신이 사도세자를 죽이려는 영조의 뜻을 받들어 실행에 옮겼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세자는 좁은 뒤주 속에서 무려 여드레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신음하다가 영조 38년 윤5월 21일, 이승을 하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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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
이덕일 | 역사의아침 | 2012-06-20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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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
이덕일 | 역사의아침 | 2012-06-20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역사대중화를 이끌어가는 우리 시대 대표적 역사학자, 이덕일.
조선 최고의 재상 서애 유성룡의 삶을 통해 임진왜란과 당쟁으로 얼룩진 조선 중기의 모습을 재조명하다! 유성룡은 미증유의 전란인 임진왜란이 벌어진 7년 동안 도체찰사에 영의정까지 겸임하며 위기에서 나라를 구해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런 유성룡의 인생에는 몇 가지 수수께끼가 있는데, 그중 가장 석연치 않은 점은 전쟁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그가 실각한 이유다. 북인 이이첨李爾瞻이 유성룡을 최초로 탄핵한 선조 31년(1598) 9월 말은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사망해 8월 28일과 9월 5일에 이미 철군령이 내려진 후다. 그가 탄핵당한 이유는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한 사신 길을 자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태조 이성계의 부친이 고려 말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이라고 기록된 명나라『대명회전大明會典』의 내용을 고쳐달라는 요청이 종계변무인데, 태조 3년(1394) 처음 불거진 것으로 200년도 더 된 사건이다. 전시 도체찰사이자 영의정이 탄핵당할 사건은 아니다. 공격하는 쪽에서도 이것으로는 설득력이 약하자 강화를 주창했다는 주화主和혐의를 추가했다. 그러나 유성룡을 실각시킨 북인들이 편찬한 『선조실록』이나 그의 반대당파인 서인들이 작성한 『선조수정실록』 그 어디에도 유성룡이 강화를 주창했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유성룡은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도주하려 할 때 도성사수론을 주창하고, 선조가 평양을 버리려 할 때 평양결전론을 주창하고, 선조가 요동으로 도주하려 할 때 “대가大駕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라고 저지한 강경 주전론자였다. 이번에 역사의아침에서 펴낸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은 임진왜란과 당쟁이라는 두 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유성룡의 삶을 통해 임진왜란과 당쟁으로 얼룩진 조선 중기의 모습과 400년을 이어온 그의 인생철학을 재조명한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여러 가지 사료와 유물, 사진 자료를 바탕으로 유성룡을 둘러싼 다양한 의문을 밝혀내고, 당시의 상황을 조목조목 짚어낸다. 또한 백성들을 위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유성룡의 인간적인 면모는 물론 전쟁 기간 내내 도주하기 바빴던 선조를 대신해 정치, 행정, 병법, 경제 등 전란 내내 국정 전반을 책임진 리더로서의 역량을 제시한다. 이 밖에도 ‘양명학은 왜 비판받았는가?’ ‘의혹에 쌓인 정여립 사건’ ‘수수께끼의 일본 사신 귤강광’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은 사실인가?’ 등 왜곡되어 있는 사건들을 객관적으로 분석해놓았다. 부드러움과 단호함을 겸비한 조선 최고의 재상, 유성룡 유성룡은 한없이 우유부단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책을 따라 유성룡의 행적을 하나씩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들이 속속 드러난다. 대동법이 그중 하나다. 광해군 즉위년(1608) 경기도에 시범 실시했다가 100년 후인 숙종 34년(1708)에 전국으로 확대 실시한 대동법은 임란 때 유성룡이 작미법作米法이란 이름으로 이미 시행한 제도다. 고종 9년(1871) 대원군이 강행한 호포법戶布法도 마찬가지다. 호포법 실시 이후에야 양반들도 비로소 병역의 의무를 지게 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유성룡은 임란 때 속오군束伍軍을 만들어 양반들에게도 병역의 의무를 지웠다. 그뿐 아니라 천민들도 종군從軍을 조건으로 면천免賤해주고 나아가 공을 세우면 벼슬까지 주는 신분타파책을 실시했다. 유성룡의 이런 전시 정책에 큰 불만을 갖고 있던 양반 사대부들은 유성룡이 창안한 훈련도감에서 훈련 중인 노비들을 데려가는 행태까지 보였으며, 전쟁 기간 내내 도주하기 바빴던 선조는 탄핵을 유도해 그의 실각을 부추기기도 했다. 그러나 유성룡은 자신이 속한 계급의 신분적 특권까지 모두 포기해가면서 전란을 수습하기 위한 여러 제도와 민생정책을 실시한다. 유성룡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본 군주는 정조다. 그는 『홍재전서』「일득록日得錄」 ‘인물’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 헐뜯는 사람들을 고故 상신相臣(유성룡)이 처한 시대에 처하게 하고 고 상신이 맡았던 일을 행하게 한다면 그런 무리 백 명이 있어도 어찌 감히 고 상신이 했던 일의 만분의 일이라도 감당했겠는가. 옛날 당 태종唐太宗이 이필李泌에 대해서, “이 사람의 정신은 몸보다 크다”라고 말했는데 나도 서애에 대해서 또한 그렇게 말한다. 대개 그는 젊었을 때부터 이미 우뚝 거인巨人의 뜻이 있었다.” 이 시대에 왜 우리는 유성룡을 읽어야 하는가? 향년 66세. 조선조 500년 최고의 재상이란 평가를 받은 유성룡이 세상을 떠나자 그를 정적으로 여기던 선조는 3일 동안 정사를 중지시킨다. 『서애선생 연보』에는 당시의 상황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사대부들이 성남城南 옛집 터에 신위를 마련하고 친척상처럼 통곡을 했다”고 전하며, 시민들이 조정에서 정한 일자보다 하루를 더 철시하면서 “우리들이 이 어진 정승을 잃은 것은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잃은 것과 같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또한 미수 허목은 「서애유사」에서 “선생의 충성과 갈력竭力과 주선이 없었다면 위험에 처해 쓰러져가는 국운을 다시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나아가 선조조의 중흥을 이룩하고서 부자, 형제 등 국민들이 서로 삶을 유지하며 호의호식好衣好食하고 편안한 데 거처하며 직업에 종사하는 바가 진실로 선생의 힘이 아니고서 그 누구의 힘이겠는가”라고 말했다. 유성룡이 황해도에서 소금을 구워 전라도에서 쌀로 바꾸어 도성에 공급하지 않았으면 굶어죽었을 백성이 얼마이며, 그가 대동법(작미법)으로 가난한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덜어주지 않았으면 굶어죽었을 백성들이 얼마나 됐겠는가. 전란 극복을 위해 자신이 속한 계급의 신분적 특권까지 모두 타파하려 했던 유성룡. 우리는 왜 유성룡을 읽어야 하는가? 그의 인생을 기존 당파나 양반 사대부들의 시각이 아니라 역사의 보편적 시각으로 되돌아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인생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며 또한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부드러움과 단호함을 겸비한 조선 최고의 재상, 유성룡. 그가 임진왜란과 당쟁을 승전으로 이끈 원동력으로는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능력을 꼽을 수 있다. ① 위기돌파 능력 - 유성룡은 한없이 우유부단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부드러움과 단호함을 겸비한 인물이다. 그는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발생한 여러 위기상황을 회피하거나 모른 체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해냈다. ② 비전제시 능력 - 유성룡은 행정에 박식한 관료이자, 군사에 통달한 병법가이고, 경제에 해박한 학자다. 때문에 그는 전란 극복할 수 있는 전략과 정치?경제?민생 등 국가 발전에 필요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었다. ③ 탁월한 국정수행 능력 - 유성룡은 대동법, 진관체제, 중강개시, 기득권 타파, 노비 충군 등 여러 제도를 정비하고 실시해 백성들의 공역부담을 덜어주고, 민생을 안정시켰다. ④ 뛰어난 현안해결 능력 - 유성룡은 어떤 자리에 있든지 명분보다는 시급한 현안해결에 매달렸다. 극단이 아닌 중용의 길을 택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현실적이고 합리적으로 해결했다. ⑤ 능수능란한 외교력 -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유성룡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고, 일본의 전략과 계략을 한눈에 파악한 뒤 이를 역이용해 일본군을 물리치는 등 뛰어난 외교 전략을 펼친다. ⑥ 유연한 사고방식 - 유성룡은 표면적으로는 성리학자를 자처했지만 교조적인 신봉자는 아니었다. 모든 학문의 장점을 살려야 한다는 열린 자세를 갖고 있었다. ⑦ 날카로운 인재발탁 능력 - 유성룡은 하급 무관이라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은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했고, 두 장수는 임진왜란 3대첩 중 행주대첩과 한산도대첩을 승전으로 이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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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영등포의 역사와 지명이야기
민긍기 | 국학자료원 | 2013-11-12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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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영등포의 역사와 지명이야기
민긍기 | 국학자료원 | 2013-11-12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책은 영등포구(永登浦區)와 영등포구에 속해 있는 9개 법정동(法定洞)의 유래와 그 지명(地名)의 유래에 관한 필자의 이야기를 모은 것이다. 영등포구에 대한 이야기인 ≪영등포구(永登浦區)≫는 총론(總論)에 해당하고, 영등포구에 속해 있는 9개 법정동에 대한 이야기인 ≪영등포동(永登浦洞)≫ ≪문래동(文來洞)≫ ≪당산동(堂山洞)≫ ≪양평동(楊坪洞)≫ ≪양화동(楊花洞)≫ ≪도림동(道林洞)≫ ≪대림동(大林洞)≫ ≪신길동(新吉洞)≫ ≪여의도동(汝矣島洞)≫은 각론(各論)에 해당한다.
저자는 20여 년간을 산 영등포 지역에 대한 관심이 여러 의문으로 이어져 연구하다, 이 책을 발간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도성 밖 10리까지를 서울이라고 했다는데 도성 밖 10리를 훌쩍 뛰어넘은 곳에 위치한 영등포가 언제부터 서울이 되었는지, 영등포는 본래 시흥군에 속해 있었다는데 영등포를 영등포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인지, 영등포(永登浦)라는 지명만 놓고 보면 영등포는 포구(浦口)일 텐데 영등포라고 불리던 포구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는지, 영등포는 어떤 뜻을 갖는 말인지, 영등포가 ‘영등포’라고 불리게 된 까닭은 무엇인지……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나름대로 풀어보는 과정에서 생겨난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인 것이다. ‘영등포’라는 지역의 지명의 유래와 역사에 관해 궁금하다면 바로 이 책을 펼쳐 들면 속 시원히 해결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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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우리 역사 속 부정부패 스캔들
변광석 | 역사의아침 | 2012-07-21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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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우리 역사 속 부정부패 스캔들
변광석 | 역사의아침 | 2012-07-21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역사가 외면한 과거, 새로운 의미 찾기의 여정
그리고 그 여정의 즐거움! 지금의 우리가 읽는 ‘역사’는 과거의 ‘사실’임과 동시에 누군가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 흔적이다. 그렇게 ‘의미 부여’에서 소외된 과거의 사실은 단지 ‘기록’으로만 남아 후세에 전한다. 이에 <틈새 한국사>는 그 동안 ‘의미 부여’에서 소외된 과거의 기록들을 찾고자 한다. 그 기록들은 ‘인물’일 수 있으며, ‘문화’나 ‘사회’의 모습일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까지 우리가 간과한 과거의 기록들이 이 시리즈에서 의미를 가진 또 하나의 역사로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재물과 권력으로 얼룩진 우리 역사 속의 인간상을 추적! 재물과 권력은 서로 한통속이다. 하나만 충족하면 다른 하나도 쉽게 취할 수 있기에 그렇다. 우리 역사에서 재물과 권력을 쥐고 사회와 나라를 좌지우지하거나 급기야 망국으로 몰고 간 인물을 더러 찾을 수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아홉 명의 공통점은 이처럼 재물과 권력에 대한 욕망이 다른 누구보다 강했던 인물들이다. 이들 중에는 권력을 위해 아내를 바꾼 자도 있으며, 어떤 이는 자신의 주군을 몰아낸 이도 있다. 고려의 이인임이나 조선의 박종신, 구한말의 민영휘 등은 나라를 망국으로 이르게 한 부정부패의 전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사료에 나타난 이들의 면면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그들의 모습에서 보이는 고려시대부터 구한말까지의 시대상을 투영한다. 망국에 이르는 병, 부정과 부패 권력의 획득과 부의 축적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특히 국가가 국가다운 체제를 유지하지 못할 때 자연히 각종 비리와 불법이 판을 친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고려의 송유인은 무신정권기의 혼란함을 설명하는 수단이 되며, 권세가 이인임과 염흥방, 환관 지윤은 원나라에 의해 국왕의 거취까지 결정되던 고려 말 암흑기를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전형이 된다. 또한 조선의 시골 수령 박종신은 세도정권에 의해 국정이 좌지우지되던 구한말 모습의 여러 단면들 중 하나다. 저자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부정한 재물과 권력의 추구는 시대와 사회의 여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하나의 사회현상이자 그 시대의 자화상이며 또한 현대를 사는 우리가 경계해야할 하나의 지표로 이야기한다. 돈과 권력의 결합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사대부가 아닌 중인이 권력의 중심에 접근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책은 숙종 대 역관가문으로 조선에서 이름난 부자였던 인동 장씨가 자신들의 재물을 이용해 남인 세력의 권력과 결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동 장씨의 재물을 통한 ‘로비’의 결과 그들 가문의 여식인 희빈 장씨가 숙종의 왕비가 되지만, 정상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획득한 권력은 그 뿌리가 단단하지 않은 법이다. 갑술환국으로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이 교체되던 시기, 인동 장씨 가문은 “역관 활동으로 모은 재물로 대저택과 호화로운 의복 등 사치가 극에 달했으며 정계의 정승, 판서들과 서로 결탁해 음흉한 모의를 기도”한 죄목으로 정계에서 축출을 당한다. 나라를 팔아 얻은 재물과 권세 저자는 이 책에서 민영휘와 이지용을 통해, 구한말 일제 초 재물 축적을 위한 경제 활동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나선 전현직 고위 관료들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한일병합 이전 이미 백성들의 토지와 금전 등을 수탈하고 매관매직을 통해 엄청난 재산을 소유한 이들이 그렇게 모은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일제에 봉사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을지 모른다. 물론 그렇게 지킨 재산이 온전히 보존되지는 않았다. 왕실 종친이기도 한 이지용은 한일병합 후 한동안 도박에 빠져 일제에 의해 받은 귀족 작위가 몰수되기도 한 사실이나, 민영휘에게 토지와 재산을 수탈당한 이들이 제기한 소송의 사례를 확인하는 것은 이 책이 독자들에게 주는 또 하나의 재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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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우리 역사를 바꾼 귀화 성씨
박기현 | 역사의아침 | 2012-04-26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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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우리 역사를 바꾼 귀화 성씨
박기현 | 역사의아침 | 2012-04-26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역사 속 우리 땅에서 낯선 이들을 만나다!
상고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를 찾은 귀화인들의 기록 우리나라는 예부터 주변의 많은 나라에서 다양한 민족이 들어와 자연스레 동화되면서 역사를 만들어왔다. 대륙의 혼란을 피해, 또는 정치, 사회, 문화, 경제적 이유 때문에 중국, 일본, 베트남, 인도, 몽골, 여진, 거란 등에서 실로 많은 민족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한국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단일 민족이라 굳게 믿으며, 피부색과 나라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고 있다. 『우리 역사를 바꾼 귀화 성씨』는 ‘우리는 정말 순수 혈통의 단일 민족일까?’라는 궁금증에서 시작해 상고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 땅을 선택한 귀화인들의 발자취를 살펴본다. 한?중?일 비교문화사를 공부하며 역사 분야의 글쓰기에 주력하는 저자는 세심한 자료 조사와 취재를 바탕으로 우리 역사에 많은 영향을 준 인물들을 조명해보고, 귀화의 흐름을 시대별로 짚어본다. 이 책을 통해 파란 눈의 박씨 벨테브레, 조선으로 귀화해 일본군과 싸운 왜장 사야가, 가야로 건너와 수로대왕과 혼인한 아유타국의 허황옥, 이성계의 오른팔 이지란 등 역사 속 우리 땅에서 낯선 이들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또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온 다양한 귀화인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그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하고 동화시킨 선조들의 자세를 살펴봄으로써 현재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올바른 방향을 모색해볼 수 있다. 역사적 기록과 취재를 바탕으로 엮어낸 다양한 귀화 성씨 이야기 『우리 역사를 바꾼 귀화 성씨』는 지금까지 단편적으로만 전해지던 귀화인, 귀화 성씨에 관한 자료들을 찾아 모으고 그 후손들을 취재하여 집필한 책이다. 저자는 우리 땅을 찾은 사람들 중 대표 인물 아홉 명에 대해 역사적 기록을 토대로 당시의 정황을 그려보고, 시대별 귀화 성씨의 역사를 훑어본다. 다른 나라, 다른 민족 출신인 그들이 새 문물을 들여와 국내에 소개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가 다양하게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들은 외국 사정에 밝아 외교 사절로 기용되거나 외교문서 작성, 통역, 외국어 교육 등의 일을 했으며, 일부는 왕의 측근에서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기도 했다. 고려시대와 조선의 건국 초기에는 정권 창출에 적극 기여하기도 했고 무장으로서의 역할도 맡았다. 조선 중기와 후반에도 끊임없이 많은 이들이 귀화해 왔는데, 출신지는 모두 다르지만 우리 땅에 잘 정착해 당당히 역사의 한 축을 구성했다. 귀화인들은 한반도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면서 함께 역사를 일구어나간 것이다. 이처럼 낯선 땅에서 한국인이 되어 살아온 사람들은 치열한 경쟁을 이기고 우리의 역사를 만든 대단한 인간 승리자들이다. 전쟁과 재난을 피해, 우리나라를 흠모해 한반도를 선택한 이들의 기록 오키나와의 옛 왕국인 유구국의 산남왕 온사도는 15명의 사람을 거느리고 배를 이용해 조선으로 들어왔다. 『조선왕조실록』에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태조가 의복과 식량을 내주고 조정에 불러 조회에 참석시키는 등 배려했으나, 그는 미처 조선에 적응하기도 전에 이승을 하직했다. 망명은 성공했으나 정착에는 성공하지 못한 비운의 망명객이 된 셈이다. 화산 이씨의 시조인 이용상은 베트남의 첫 독립국가인 리씨 왕조의 왕족으로, 베트남에서 고려로 귀화해 식읍을 하사받고 후손도 퍼뜨려 화산 이씨의 세보를 한반도에 정착시켰다. 10년 전 그 후손들이 베트남을 방문하자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이 모두 나와 환대하며 “800년 만에 끊겨버린 리씨 왕조의 왕통이 부활했다”며 깍듯이 왕손 예우를 했다. 함경도 북청에서 백두산의 정기를 타고 태어난 이지란은 ‘쿠란투란티무르’라는 이름의 여진족으로,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고, 조선 개국에 앞장선 일등공신이다. 또, 평소 조선의 문물을 흠모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으로 귀화한 일본의 고위 장수 ‘사야가’는 조총과 화약 제조법을 전수했다. 그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잇따라 공을 세워 벼슬에 올랐고, 김씨 성을 사성받고 이름을 충선이라 했다. 소주 가씨의 시조인 가유약은 명나라 조정의 고위 관료로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아들, 손자와 함께 조선원군 전투 지휘관으로 참전해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했고, 이 외에 배를 타고 가야로 들어와 수로대왕과 결혼해 자손을 퍼뜨린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 원나라 제국대장공주를 따라 고려에 와 충렬왕의 측근이 된 위구르 출신의 장순룡 등도 있다. 조선에 귀화한 최초의 서양인으로는 일본으로 가던 중 음료수를 구하려다 제주도에 표착해 우리나라로 오게 된 네덜란드인 벨테브레가 있다. 그는 포로가 된 왜인들을 감시, 통솔하는 한편 명나라에서 들어온 대포의 제조, 조작법을 지도했다. 열린사회, 다문화사회로 변화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해주는 책! 현재 전 세계적으로 1년에 1억 명 이상의 인구가 다른 나라로 이주하고 있고,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도 전체 인구의 1.1%를 차지한다. 또 21개 이상 나라의 여성들이 국제결혼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오고 있다. 이처럼 국제결혼의 급증과 그에 따른 새로운 성씨의 출현은 더 빠른 속도의 변화를 예고한다. 하지만 그들을 맞는 우리의 시선은 과연 어떠한가? 사실 귀화인을 포함하여 외국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는 고정관념과 편견이 심하다. 저 멀리 외국에 있는 교포들은 ‘해외동포’라는 말로 감싸면서, 엄연히 대한민국 국적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인데도 외국인들은 언제나 이방인 취급을 한다.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면 옛 선조들은 외국에서 들어오는 이들을 포용하기 위해 적극적인 동화책을 썼다. 지금의 우리보다 더 넓은 마음으로, 열린 마음으로 그들과 하나 되어 조화를 이루어온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들을 접하고, 낯선 이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선 선조들의 자세를 통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민족’이라는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고, 열린사회, 다문화사회로 변화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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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계승범 | 위즈덤하우스 | 2012-06-19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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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계승범 | 위즈덤하우스 | 2012-06-19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조선 선비, 그 고상한 이미지에 대한 발칙한 검증
선비는 개인으로서는 전인격체의 이상적인 인간상이었으며, 사회적으로는 독점적 지배층이자 유일한 지식인 계층이었고, 정치적으로는 500년 조선왕조의 오랜 실세들이자 주인공들이었다. 따라서 어느 특정 사안만을 드러내어 마치 그것이 선비의 전체 이미지인 것처럼 단정하고 평가해버리면, 선비의 실체를 설명하는 데에는 과장과 왜곡이 따를 수밖에 없다. 이에 저자는 선비들이 중요시한 덕목, 유교 이론, 그들의 생활 모습, 그들이 중요시한 가치관, 그들에게 주어진 지위와 직책에 대한 임무 수행 능력, 그리고 그들이 지배한 조선의 실상 등을 종합해 선비를 분석하고 평가한다. 이런 작업을 통해, 그동안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던 기존의 선비 평가를 뛰어넘어 선비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를 꾀하고 동시에 500년 동안 조선을 통치한 위정자로서 그들의 모습을 규명하고자 한다. 선비가 권력을 잡으면 나라가 좋아질까 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선비에 대해 다양하게 정의하고 평가했지만 유교적 가치와 덕목을 지키는 것을 지상과제로 하며 살아온 그들을 한 마디로 단언하기란 생각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 책은 선비를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유교적 지식과 윤리로 무장하고 지배층을 형성한 최고 엘리트 집단, 곧 사대부”로 정의한다. 선비는 곧, “성리학적 가치를 체득하고 실천한 유학자와 그 학생들로 조선시대라는 특정 기간 동안 한국 사회를 지배한 특권 지식인 계층”이다. 그러나 이렇게 유교적 가치와 덕목으로 무장하고 경제력과 지식뿐 아니라 정치권력까지 독점한 선비들이 지배한 조선은 가난했으며, 왜란과 호란 동안 국가의 존망이 백척간두에 섰을 정도로 군사력은 약했고, 민심은 조정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선비들은 조선이 당면한 문제들과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았다. 그들은 왜란과 호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겪었으면서도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와신상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조선의 부국책에도 진정 어린 고민을 하지 않았다. 선비들의 지조와 의리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나 지조와 의리는 선비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개념으로 실제로도 조선의 선비들이 목숨보다 중시한 유교 덕목들 중 하나다. 선비들이 의리를 가장 잘 실천한 예로 의병 활동을 꼽을 수 있는데, 저자는 ‘난신적자를 처단하기 위해 일어난’ 의병은 실제로 ‘명나라가 주도하는 중화 질서 혹은 중화 문명을 수호하기 위한 것’으로 규정한다. 왜란 때 조선에서 봉기한 의병이 조선에서만이 아니라 명나라에서도 의병으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호란 때 삼학사가 죽음까지 불사하며 지키려 했던 지조와 의리 역시 그 본질은 중화 질서였으며, 그 바탕이 되는 유교적 가치였다. 후금을 치기 위한 명나라의 파병 요청을 거부하려는 광해군에게 비변사의 당상관들이 “차라리 전하에게 죄를 범할지언정 천자에게 죄를 범할 수 없다”고 말한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을 풍미한 위정척사 운동에서 선비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 역시 중화에 바탕을 둔 보편적 유교 문명이었다. 이렇게 조선의 선비들이, 조선의 사대부들이 충성을 바치고자 한 궁극의 대상은 조선 왕이 아니라 명나라, 그리고 중국의 천자였다. 선비들이 이야기한 청빈과 안빈낙도 바로 보기 흔히 가난한 선비가 선비의 진정한 기질을 잘 간직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는데, 조선이라는 역사적 공간에 실재했던 선비는 대개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여 특정 직업에 종사하지 않으면서도 먹고 사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재산가들이었다. 500년 동안 선비들이 조선에서 독점적 지배권을 누릴 수 있었던 까닭도 그들이 노비와 전토를 소유한 재력가였기 때문이다. ‘사림’의 상징으로 알려진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이황, 이이 등 역시 서울과 지방에 막대한 노비와 전택을 보유한 부호였다. 그런 까닭에 저자는 선비들이 이야기한 청빈과 안빈낙도는 절대빈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가진 자들만의 유유자적이었으며 그들이 꿈꾼 이상적인 생활방식의 표현이었음을 강조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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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로 보는 고려사
송은명 | 시아퍼블리셔스 | 2013-10-24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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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로 보는 고려사
송은명 | 시아퍼블리셔스 | 2013-10-24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인물의 삶을 좇아 우리 역사에 다가가기
역사는 시대와 인물이 한데 어우러져 연출하는 한 편의 연극이다. 다만 이 연극에는 대본이 주어지지 않는다. 시대는 인물에게 선택을 요구하고, 인물은 결과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선택을 한다. 역사는 그 선택에 대한 기록인 것이다. 역사 속의 수많은 선택은 언제나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인물들의 몫이었다. 따라서 인물에 대한 고찰은 역사 연구에 있어서 가장 주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인물의 자취는 어쩌면 역사의 과정 그 자체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물의 자취를 좇아 살펴본 우리 역사시리즈(삼국사, 고려사, 조선사 전3권) 중 [인물로 보는 조선사]에 이어 두 번째로 출간된 이 책은 베일에 싸여 있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고려사에 색다른 방법으로 접근해 보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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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로 보는 조선사
김형광 | 시아퍼블리셔스 | 2013-10-2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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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로 보는 조선사
김형광 | 시아퍼블리셔스 | 2013-10-2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인물로 보는 조선사』는 조선시대 각 분야의 대표적 인물 27인에 대한 현대적 시각에서의 재조명. 격동의 시대를 헤쳐 간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남겨진 조선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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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일본은 왜 반성하지 않을까
정원식 | 좋은땅 | 2013-11-04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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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일본은 왜 반성하지 않을까
정원식 | 좋은땅 | 2013-11-04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이 책은 일본이 왜 반성하지 않는지를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기술한 책으로써 독자들 중 나의 생각에 동의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며, 동의하지 않는 독자들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나는 이 책을 많은 독자들이 읽고 또한 일본어로 번역하여 출간할 예정인데 많은 일본인들이 읽고서 그들이 현재하고 있는 행동들(왜곡된 역사 교육, 주변국들과의 분쟁, 전쟁 피해자들에게 한이 맺히게 하는 언사들 등)이 바른 행동으로 교정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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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잊혀진 근대, 다시 읽는 해방 전사
이덕일 | 역사의아침 | 2014-01-10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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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잊혀진 근대, 다시 읽는 해방 전사
이덕일 | 역사의아침 | 2014-01-10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가장 치열하게 욕망하고 저항했던 시기, 해방 전前 근대를 읽는다!
근래 ‘역사전쟁’이라는 용어가 낯설지 않을 정도로 역사 왜곡에 대한 국내외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새 정권이 들어선 이후 한국에서는 편향된 관점으로 쓰인 교과서 채택 문제가 대두되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과거 군국주의 역사를 옹호하는 우경화 세력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한국과 중국 등 이웃 국가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서적이 꾸준히 역사 분야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현상까지 보이고 있다. 이러한 역사 논란의 계보는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일제하 식민시대를 살펴보면 최근 두드러진 역사전쟁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2012년 4월~2013년 3월까지 《중앙선데이》에 연재된 〈이덕일의 사사사事思史: 근대를 말하다〉칼럼을 모은 이 책은 해방 전, 가장 치열하게 독립을 욕망하고 일제에 저항했던 한 시대의 기록이자 재현이다. 저자는 사회주의, 아나키즘 운동, 일제의 만주 침략, 부호의 등장, 일제의 패망 등 다섯 가지 프레임을 통해 해방 전 근대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신문기사와 증언록, 사진 등 사료 중심의 객관적인 서술은 우리에게 조금은 낯선, 잊히고 묻히고 지워진 해방 전 근대의 풍경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인물과 사건 중심으로 읽는 새로운 근대 패러다임을 제시한 교양서! 한국 근대사는 1945년 해방 이후 냉전체제가 고착화되면서, 일제와 맞서 싸웠던 독립운동 세력마저 이념적 취사선택에 따라 서술되어야만 했다. 즉, 독립운동의 바탕이 되었던 삼부三府 무장투쟁론이 아닌 외교독립론 위주로 논의되었으므로, 사회주의나 아나키즘을 바탕으로 한 독립운동사는 더욱 역사 속에 잊히고, 묻히고, 지워질 수밖에 없었다. 한편 현재 일본의 우경화 바람은 1930~40년대 전 세계를 전쟁으로 몰고 갔던 군국주의 체제를 청산하지 못한 데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했던 일제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학살의 전말을 제대로 살펴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근대사 중에서도 1918-1945년까지의 역사는 주요 테마로 다루지 않았던 부분이자, 우리에게 가장 낯선 역사이기도 하다. 특히 사회주의와 아나키즘 운동사는 시대를 휩쓴 이념과 사상의 영향을 받아 국제적인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민족주의 독립운동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일제 군부와 파시스트가 이웃 국가에 저지른 만행과 학살은 잘 알고 있지만, 그들의 정신세계에 대한 분석은 미흡했던 게 사실이다. 저자는 이런 점에 천착해 그동안 근대사에서 잘 다루지 않았던 주제를 선정하고, 인물과 사건 중심으로 역사적 과정을 서술하면서 새로운 근대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사회주의 운동부터 일제 패망까지, 다섯 가지 프레임으로 보는 근대사! 1920~30년대 사회주의 사회운동은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의 성공과 코민테른의 활동에 영향을 받아 시작된 민족해방운동이었다. 만주 한인, 일본 유학생, 진보적 사상의 청년들이 주축이 된 이 운동은, 사회주의 연대와 혁명을 통해 일제의 탄압을 벗어나려 했던 선구적인 움직임이었다.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며, 직접 행동을 통한 혁명도 불사했던 아나키즘 운동은 일제뿐 아니라 좌파 전체주의까지 부정했다. 일제 수장들을 저격하고 중일 합자은행을 터는 등 아나키스트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배후에는 정국을 타파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강한 목적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30년대부터 일본 정계의 핵심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군부와 민간 파시스트는 어릴 때부터 군사훈련을 받은 영관급 장교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전쟁기계가 되어 내부 쿠데타뿐 아니라 만주까지 강제 점령했다. 만주에 관동군을 파견하고 위성국인 만주국까지 세워 재만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와해시킨 침략 행위는 대부분 거짓 계략과 음모로 계획되었다. 서구 열강의 눈을 끌기 위한 자작극도 서슴지 않았다. 이 책에서는 장작림 폭살사건, 상해사변 등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 그들의 정신세계와 행태를 분석해볼 수 있다. 앞서 다루고 있는 사회주의, 아나키즘 운동사만큼 부동산, 주식투기, 금광 등으로 일확천금의 꿈을 이룬 부호들의 이야기 또한 한 시대를 온전히 복원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대목이다. 식민시대라고해서 독립운동가의 삶만 중요할 수는 없다. 이 시기에 다양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한 부호들의 삶을 통해 당시 사람들도 돈과 명예를 추구했으며, 욕망을 좇는 본성은 현대인과 다르지 않는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만주 침략 이후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 거듭된 일제의 확전은 결국 패망으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연합국의 두 주축인 미국과 소련이 개입하면서 한반도는 해방과 동시에 ‘분단’이라는 새로운 시련을 맞이했다. 저자의 말처럼 “역사는 해방과 동시에 새로운 과제”를 우리에게 부여한 것이다. 지금은 제대로 된 역사 비판을 위해 근대를 다시 읽어야 할 때! 역사학의 비판은 과거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토대 위에서 사회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모색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사는 학문권력을 장악한 세력에 의한 팩트(fact) 조작, 역사를 조각조각 나누어 파편화·분절화된 해석 때문에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정쟁의 도구로 변질되었다. 지금 한국 사회에는 반성에 기초한 제대로 된 역사학이 절실하다. 그전에 먼저 식민시대의 우리 역사를 알아야 하며, 제국주의 본국인 일본의 역사 또한 간과할 수 없다. 격동의 시대에 온몸으로 뛰어든 인물들은 대하소설의 소재로 채택되어도 손색없을 정도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들 삶의 총합은 지난한 과정을 거쳐 오늘에 도달했다. 그러나 현재 한국사회에서 그들을 대하는 태도를 볼 때, 그 의미는 이제 퇴색되거나 잊혔는지도 모른다. 제대로 된 반성의 역사 위에 미래의 역사를 쓰고자 한다면, 지금의 우리를 비추고 있는 거울인 근대를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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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왕을 말하다 1
이덕일 | 역사의아침 | 2012-07-20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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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왕을 말하다 1
이덕일 | 역사의아침 | 2012-07-20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시대와 인물을 읽어내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저술에 힘쓰고 있는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이덕일의 신작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조선 왕들을 주제별로 나누어 날카롭고 명쾌한 시선으로 그들에 대한 핵심 쟁점을 바로잡고, 과연 조선 최고의 왕과 최악의 왕이 누구인지를 객관적으로 재조명했다. 악역을 자처한 임금들-태종과 세조, 신하들에게 쫓겨난 임금들-연산군과 광해군, 전란을 겪은 임금들-선조와 인조, 절반만 성공한 임금들-성종과 영조 등의 모습을 통해 그 시대의 실상을 정확하고 예리하게 파헤쳤으며, 여러 문헌과 실증사료를 바탕으로 조선 왕들을 둘러싼 다양한 의문을 이해하기 쉽고 흥미지진하게 밝혀냈다.
조선 최고의 왕과 최악의 왕은 누구인가? "역사학자 이덕일, 조선 왕들의 업적을 평가하고 핵심 쟁점을 바로잡다!” 역사를 살펴보면 변화를 미리 예측하고 사회를 미래지향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감으로써 한 시대의 흐름을 바꾼 경우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래서 한 사회를 연구할 때 그 사회의 정점에 있었던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영웅사관을 신봉하든, 거꾸로 민중사관을 신봉하든가에 관계없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국왕이나 재상처럼 한 사회의 정점에 있었던 사람들은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정확하게 평가할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당사자가 생존했던 시대에 이미 그에 대한 평가가 내려지고 그것이 후대에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시대 왕들에 대한 평가에는 사관의 시각과 당파적 관점이 크게 반영되어 있어, 이 두 가지 관점을 배제하지 않으면 역사의 진실에 접근하기 어렵다. 최근 역사의아침에서 출간된『조선 왕을 말하다-이덕일 역사평설』는 시대와 인물을 읽어내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저술에 힘쓰고 있는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이덕일의 신작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의 가치관을 담으려 노력하기보다는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조선 왕들에 대한 핵심 쟁점을 날카롭고 명쾌하게 바로잡고, 과연 조선 최고의 왕과 최악의 왕이 누구인지를 객관적으로 재조명했다. 특히 그들을 '악역을 자처한 임금들-태종과 세조', '신하들에게 쫓겨난 임금들-연산군과 광해군','전란을 겪은 임금들-선조와 인조','절반만 성공한 임금들-성종과 영조'등으로 주제를 나누어 좀 더 이해하기 쉽고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예를 들어 측근 공신을 제거하고 후계자를 양성했으며, 자신을 희생해 미래를 준비한 태종과 성군의 자질이 있었으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공신들과의 공존을 선택한 세조, 거대한 훈구세력을 약화시키라는 시대적 소명이 주어졌지만 이를 인지할 만한 지적 능력이 부족했던 연산군과 시대를 앞서갔으나 신하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통합에 실패해 외롭게 몰락한 광해군, 불투명한 왕위 계승으로 재위 기간 내내 정통성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전란을 겪으면서도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선조와 해괴한 명분으로 선왕을 내쫓고, 명분만 좇다 병자호란이라는 굴욕을 겪었으며, 아들과 며느리를 죽이고, 심지어 손자까지 죽음으로 몰고 간 인조, 신진 사림에게 탄핵권과 언론권을 주고 시대의 금기와 맞섰으나 궁중의 애정 다툼을 투기로 몰아 참극의 씨를 뿌린 성종과 경종을 독살했다는 혐의를 받고 즉위해 지나칠 정도로 검소하게 생활하며 탕평책을 펼친 영조 등의 삶과 당대에 벌어진 사건을 통해 그 시대의 실상을 정확하고 예리하게 파헤쳤으며, 여러 문헌과 실증사료를 근거로 조선 왕들을 둘러싼 다양한 의문을 밝혀냈다. 과거의 가치관이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거울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역사학과 군주학을 제시하는『조선 왕을 말하다』는 자신의 선택을 역사라는 거울에 비춰보고 미래를 예측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유익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명쾌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조선 왕 바로보기! "성리학적 관점과 당파적 관점을 걷어내야 그들의 참모습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대한민국 사람들 중에는 현재 사회가 조선시대를 계승한 것으로 막연히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현재에도 만연한 문중 의식과 족보를 중시하는 경향들은 거의 예외 없이 조선시대에 기반을 두고 있다. 아직도 우리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가치관으로 그 시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시각이 대부분 두 가지 관점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하나는 성리학적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 중기 이후 집중된 현상인 당파적 관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왕들을 바라볼 때 사료에 담겨 있는 관점의 영향을 제대로 걸러내지 않으면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연산군이다.『연산군일기』를 남긴 사관들은 연산군을 황음무도한 인물로 그려놓음으로써 신하로서 군주를 쫓아내고 죽인 불충을 합리화했다. 연산군이 실제로 황음무도한 군주였다는 실제 증거는 거의 없음에도 조선 사관들이 덧칠한 가치관은 연산군이 세상을 떠난 지 500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 이는 실제로 있었던 일들과 사료를 남긴 사람들의 가치관을 분리해서 인식해야만 과거 사람들의 행적을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렇듯 저자는 과거 다른 저술에서도 그랬듯이 이 책에서도 자신의 가치관을 담으려 노력하기보다는 당시의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조선 왕들에 대한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또한 저자는 주희를 만세의 스승으로 여겼던 과거의 가치관이 아니라 21세기를 지향하는 현재의 가치관, 나아가서 미래지향적 가치관으로 조선 왕들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 어떤 임금들은 치세에 성공했고, 어떤 임금들은 실패했는가? ① 태 종 - 태평성대를 위하여, 수고는 모두 내가 맡겠다 모든 군왕은 성군으로 기억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성군은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군주의 피나는 노력이 시대의 요구와 합치될 때 탄생할 수 있다. 때로는 성군의 등장을 위해 역사는 악역을 요구하기도 한다. 태종은 역사가 자신에게 부여한 악역의 길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간 군주였다. ② 세 조 - 리더가 시대를 잘못 읽으면 나라가 혼란해진다 역사는 때로 양자택일을 요구한다. 쿠데타로 집권한 공통점을 갖고 있는 태종과 세조는 모두 공신 제거를 통한 왕권 강화나 공신과의 권력 분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미래를 위해 공신 제거를 선택한 태종의 결과물이 세종인 반면 오늘을 위해 공존을 택한 세조의 결과물은 후사 예종의 의문사였다. ③ 연산군 - 뜻이 옳아도, 고립된 권력은 실패한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세력관계이다. 연산군은 왕권을 능가하는 공신세력을 제거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는 공신들의 빈자리에 좋든 싫든 공신세력의 정적인 사림을 배치해 우군으로 삼아야 했으나 갑자사화 와중에 사림까지 제거하는 우를 범했다. 공신들은 군사를 일으켜 그를 쫓아냈고 사림은 붓으로 쿠데타를 합리화했다. ④ 광해군 - 서른세 살의 준비된 임금, 세 살 적자와 후계를 겨루다 광해군의 즉위길은 험난했다. 안으로는 적자 계승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선조와 권력의 독점을 원하는 소북이 흔들었고, 밖으로는 원군 파견을 계기로 그간의 형식적 조공관계를 실질적 지배관계로 전환하려는 명나라가 흔들었다. 광해군은 피를 토하며 이런 상황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 그것은 새로운 군주상의 탄생 과정이었다. ⑤ 선 조 - 불투명한 후계자 계승, 정통성 콤플렉스에 시달리다 절차의 투명성은 결과 못지않게 중요하다. 특히 대통처럼 최고 권력을 잇는 절차는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 절차가 불투명하면 정국이 혼란해진다. 당사자는 정통성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이는 정국 운용에 큰 부담이 된다. 호문과 호학의 군주 선조의 큰 문제점이 바로 불투명한 왕위 계승 과정이었다. ⑥ 인 조 - 어진 임금 인조, 어린 손자들까지 죽음으로 내몰다 명분과 현실의 괴리는 비극을 초래한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섬겨야 했던 인조는 청나라를 인정하려던 소현세자를 제거했다. 청나라에 맞서 싸우지는 못하면서 청나라를 인정하면 난적이 되는 모순은 이후 조선 지배층의 정신세계에 숱한 악영향을 끼쳤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모순은 분노의 표적을 찾았고 세자의 남은 가족이 그 대상이 되었다. ⑦ 성 종 - 권력은 공신들 손에, 어린 임금은 때를 기다렸다 현실에 참여해 활동하는 것 못지않게 때를 기다리는 것도 중요하다. 때가 아닌데도 섣불리 나섰다가 불행한 종말을 맞은 사례는 무수히 많다. 갓 즉위한 성종은 어렸지만 때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현실이 공신집단의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성종은 공신집단에 맞서는 대신 때를 기다렸다. 기다림 또한 정치의 일부라는 사실을 어린 나이에 터득했던 것이다. ⑧ 영 조 - 검소한 군주의 눈물도 양반을 누르지 못했다 군주가 백성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궁극적 길은 스스로 가난한 생활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군주는 백성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잘못된 제도를 혁파하는 제도개혁에 앞장서는 것으로 백성들의 고통에 동참해야 한다. 영조는 절검생활을 앞장서 실천하는 유학 군주였으나 백성들은 물론 시대도 그런 개인적 실천보다는 잘못된 제도개혁을 요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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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왕을 말하다 2
이덕일 | 역사의아침 | 2012-07-20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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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왕을 말하다 2
이덕일 | 역사의아침 | 2012-07-20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21세기가 요구하는 군주학과 리더학
시대와 인물을 읽어내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저술에 힘쓰고 있는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이덕일의 『조선 왕을 말하다』가 1, 2권으로 완간됐다. 독자들의 뜨거운 호응과 함께 ‘2010 SERI CEO 추천도서’로 선정되기도 한 『조선 왕을 말하다』 1권(2010년 5월 출간)에 이어 이번에 출간된 2권에서도 저자는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조선 왕들에 대한 핵심 쟁점을 날카롭고 명쾌하게 바로잡았으며, 동시에 그 시대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살펴보고 그 군주가 그 지점으로 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조명했다. 특히 조선의 왕들을 ‘삼종 혈맥의 시대를 연 임금들-효종, 현종, 숙종’, ‘독살설에 휩싸인 임금들-예종, 경종’, ‘성공한 임금들-세종, 정조’, ‘나라를 열고 닫은 임금들-태조, 고종’ 등으로 주제를 나누어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역사는 읽는 이유는 그 안에서 교훈과 반성을 찾기 위해서다. 시대와 환경의 한계는 국왕에게도 있고 백성 개개인에게도 있다. 그러나 역사는 그런 한계를 극복하려 한 노력을 보여주며, 때로는 그런 노력이 큰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노력 여하에 따라 시대의 한계를 일정 정도 극복하고 성공한 국왕, 성공한 리더가 된 군주가 있는 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역사가 개인에게나 시대에나 타산지석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조선 왕을 말하다』를 통해 21세기가 요구하는 군주학과 리더학은 무엇인지 가늠해볼 수 있다. 역사의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 신하들이 군주를 내쫓고 만든 인조반정 체제가 소현세자를 죽이고 여러 국왕의 독살설을 낳았다. 『조선 왕을 말하다 2』의 1부는 소현세자의 자리를 차지한 효종·현종·숙종시대를 ‘삼종의 혈맥’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많은 비극의 뿌리가 인조반정과 소현세자의 독살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부는 조선 전기의 예종과 조선 후기의 경종을 통해 ‘독살설에 휩싸인 임금들’을 살펴보았다. 국왕 독살설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국왕만 사라지면 그 권력의 공백을 차지할 수 있는 거대 정치 세력이나 당파가 있을 때 가능하다는 권력 구조의 프레임을 들여다본 것이다. 3부 ‘성공한 임금들’은 조선 전기의 세종과 조선 후기의 정조를 통해 성공한 군주, 성공한 리더의 길에 대해 살펴보았다. 4부 ‘나라를 열고 닫은 임금들’에서는 개국 군주 태조와 망국 군주 고종을 살펴보았다. 특히 44년이나 재위하며 조선을 망국의 길로 이끈 고종 치세의 핵심 문제를 파악해 역사의 격변기에 요구되는 군주의 역할을 짚어보았다. 누가 왜, 그들의 승패를 뒤집었는가? 승자와 패자가 뒤바뀐 조선 왕들의 역사 ‘영·정조시대’라는 용어가 있다. ‘태·세종시대’나 ‘효·현종시대’라는 말은 없는데, 각각 정치 지형이나 지향점도 다르고 결과도 다른 영조와 정조의 시호를 묶어 시대를 구분한 이 말은 사실상 존재할 수 없는 몰역사적 용어다. 영·정조시대라는 용어는 노론 후예 학자들이 당파적 시각에서 만들어낸 것으로, 정조의 독자성을 부인하고 영조의 부속 인물처럼 만들기 위한 의도에서 생겨났으며 노론에 맞선 정조 치세를 부인하거나 축소하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다. 이는 주류 사관을 반영한 국사 교과서에 영조의 탕평책은 극찬하면서 정조의 탕평책은 ‘결과적으로 세도정치의 빌미가 되었다’고 비난하는 내용을 통해 확연히 드러난다. 영조는 집권 초기에는 소론 온건파도 일부 등용하는 탕평책을 실시했지만 점차 소론을 배제하다 재위 31년(1755년) 나주 벽서 사건을 빌미로 소론 인사 500여 명을 사형시키며 탕평책을 무너뜨렸고,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후에는 모든 정파를 내쫓고 노론 일당독재 체제를 수립했다. 그러나 정조 때는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왕후 김씨가 노론을 배경 삼아 끊임없이 정조를 압박한 것을 제외하고는 외척이 정치에 발을 붙이지 못했다. 외척 세도정치의 폐해를 절감한 정조가 외척의 정사 참여를 원천적으로 배제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부친을 죽인 적당 노론도 탕평책을 실시해 끌어안으면서 함께 미래로 가자고 권유했고, 성리학 유일사상 체제와 신분제를 완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서구의 과학 기술을 실시간으로 받아들여 조선을 미래로 이끌려 했다. 최근 정조 신드롬이 불기도 했지만 정조의 이런 진면목이 드러난 것은 불과 10여 년 전에 불과하다. 그만큼 오랜 기간 동안 정조는 노론이 만든 역사 해석 속에 갇혀 있었다. 한편 근래 들어 고종은 ‘개명 군주’이자 ‘근대화를 앞장서 이끈 군주’라는 식으로 호평받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고종은 전제왕권을 꿈꾸며 많은 인재를 죽였는데, 급진 개화파 김옥균은 물론 온건 개화파 김홍집도 죽이고, 농민의 리더 전봉준도 죽였다. 독립협회도 강제로 해산시켰다. 근대국가 수립에 목숨 걸 인재와 세력을 모두 제거한 결과 주위에는 이완용 같은 출세주의자만 남게 되었다. 또한 고종은 실현 불가능한 전제 국가 수립에 집착하면서 모든 변화를 거부했다. 그 결과 흥선대원군에게 무조건 반대하는 정책으로 일관하면서 문호 개방 그 자체에 집착함으로써 일본의 침략 야욕에 말려들었다. 세상은 변했지만 고종은 변하지 않았고, 결국 조선은 열강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무려 44년이라는 재위기간 동안 잘못된 처신과 선택 때문에 나라를 식민지로 전락시켜 백성들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 ‘망국 군주’ 고종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더욱 엄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주요 내용 1부 삼종 혈맥의 시대를 연 임금들 ① 효종-같은 현실을 보고도 소현과 봉림(효종) 두 형제의 꿈은 달랐다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처럼 때로는 전혀 의외의 인물에게 대권이 돌아가는 경우가 있다. 대운大運이 따라준 것이다. 그러나 대운은 여기까지다. 대운을 천명天命으로 승화하는 것은 전적으로 본인의 몫이다. 인조가 소현세자 일가를 죽임으로써 생각지도 않게 대권을 잡은 효종은 굴러온 대운을 천명으로 전환할 방법을 숙고했다. 그것이 북벌이었다. 효종은 현종·숙종을 잇는 삼종三宗 혈맥血脈의 시대를 열었다. ② 현종-국상 예법을 둘러싼 사대부의 싸움에 왕권만 추락하다 인조반정 이후 국왕은 천명에 의한 절대적 존재에서 사대부가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 존재로 전락했다. 서인은 소현세자를 제거하고 효종을 추대했지만 둘째 아들로 낮춰 보았다. 국왕을 사대부 계급의 상위에 있는 초월적 존재로 보려는 왕실의 시각과 제1사대부에 불과하다고 보는 서인의 시각에는 큰 괴리가 있었다. 국왕의 권력 강화냐, 사대부의 권력 균점이냐 하는 문제였다. 그런 양자의 시각은 현종 재위기에 두 차례에 걸친 예송 논쟁으로 나타났고, 서인들은 경신 대기근으로 고통을 겪는 백성들은 뒤로한 채 당파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 몰두했다. ③ 숙종-왕권 강화, 임금에겐 달고 백성에겐 쓴 열매가 되다 숙종은 두 당파를 경쟁시켜 왕권을 강화하는 길을 택했다. 한 당파를 이용해 다른 당파를 제거할수록 왕권은 강해졌다. 그러나 숙종은 왕권 강화 자체에 목적을 두었을 뿐 강화된 왕권으로 추구할 목표를 찾으려 애쓰지 않았다. 왕권은 강화되었지만 백성은 여전히 사대부의 착취에 시달렸다. 왕권 강화와 백성이 따로 노는 괴리 현상이 심해진 것이다. 숙종은 조선 후기 가장 강력한 권력을 거머쥔 군주였지만 그 권력을 백성과 나눌 줄 모른 실패한 군주이자 외로운 군주였다. 2부 독살설에 휩싸인 임금들 ④ 예종-힘보다 뜻이 큰 군주, 개혁 능력의 한계에 다다르다 당위성만으로는 개혁에 성공할 수 없다. 명분뿐 아니라 개혁 대상의 저항을 넘어설 수 있는 현실적 힘을 갖추어야 성공할 수 있다. 예종은 공신 집단 해체라는 분명한 개혁 목표와 실천 의지가 있었지만 현실적 힘을 확보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특히 남이를 비롯한 신공신 집단을 제거한 것은 구공신에 맞설 세력을 스스로 꺾은 결정적 하자였다. 예종과 공신 집단 간의 갈등은 예종의 급서로 해소되고 구체제로 회귀했다. ⑤ 경종-정권에 눈이 먼 노론, 힘없는 국왕 경종 제거를 당론으로 삼아 실행하다 왕조 국가의 가장 중요한 헌정 질서는 왕권 계승의 예측성과 투명성이다. 갓 태어난 왕자가 원자가 되거나 세자로 책봉되면 차기 국왕으로 결정되었다는 뜻이다. 세자를 국본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경종은 세자 대리청정을 거쳐 국왕이 되었지만 집권 노론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노론은 ‘경종 축출, 연잉군 옹립’이라는 당론을 정할 정도로 당력이 막강했다. 그러나 왕조 국가에서 국왕을 몰아내고 특정 인물을 추대하려는 구상은 심한 반발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정권에 눈이 먼 노론은 이를 강행하면서 숱한 비극을 낳았다. 3부 성공한 임금들 ⑥ 세종-지식 경영의 시대를 열어 르네상스와 국력 신장을 이루다 세종은 지식 경영인이었다. 그는 방대한 독서를 통해 축적한 지식으로 국가를 경영했다. 공리공론보다는 역사처럼 현실에 응용할 수 있는 ‘산지식’을 선호한 것이다. 또한 세종 재위기에는 입지전적 인물이 많이 출현했는데, 능력만 있으면 천인이라도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만큼 역동적인 사회였고 이것이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⑦ 정조-민심이 원하는 변화 위해 신도시발 농업·상업 혁명에 시동을 걸다 국가정책을 목적의 선함이나 당위성만으로 추진해서는 성공하기 어렵다. 정책에 관계된 여러 세력의 이해를 조정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고 무엇보다 민심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정책 추진 능력과 도덕성을 겸비한 세력이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추진해야 가능한 일이다. 정조의 사도세자 묘소 이전 과정은 이런 정책 수행의 전범을 보여준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면서 사도세자의 배후 도시라는 정치적 의미를 뛰어넘는 가치를 담았다. 조선의 농업 혁명과 상업 혁명을 선도하겠다는 미래 가치를 담아냈다. 4부 나라를 열고 닫은 임금들 ⑧ 태조-전쟁 영웅에게 쏠린 민심, 개국의 원동력 되다 전통 시대에는 왕의 즉위나 새 나라 개창의 정당성을 ‘천명’에서 찾았다. 천명을 받았는지 여부를 나타내는 지표가 바로 민심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엎기도 한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은 공허한 수사가 아니다. 집권 세력이 기존 체제를 유지할 정당성과 능력을 상실했을 때 민심은 새 나라가 열리기를 희구하기 때문이다. ⑨ 고종-자질 부족한 임금의 오락가락 정치 행보, 망국은 필연이었다 역사의 격변기에 변화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 그러나 고종은 실현 불가능한 전제 국가 수립에 집착하면서 모든 변화를 거부했다. 군주 혼자 힘으로 나라의 운명을 완전히 바꿀 수는 없지만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는 있다. 그렇기에 군주는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그 흐름에 부응하거나 맞서 나라의 운명을 유리한 쪽으로 이끌려고 노력해야 한다. 군주는 나라에 대한 무한 책임을 지는 자리로 때로는 목숨까지도 거는 자기희생을 해야 한다. 그러나 고종은 이 모든 것을 거부했고 망국 군주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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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은 어떻게 부정부패를 막았을까
이성무 | 청아출판사 | 2013-01-16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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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은 어떻게 부정부패를 막았을까
이성무 | 청아출판사 | 2013-01-16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아침에 고언하고, 저녁에 사약을 마실지라도…
조선시대 부정부패를 막던 3중 장치, 대간, 감찰, 암행어사 이야기 감시받지 않는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입법, 행정, 사법이 서로 정립해 권력의 남용을 견제하고, 제4부라 불리는 언론이 외곽에서 권력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것은 권력집중이 낳을 부정과 부패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오랜 고민의 소산이다. 시야를 과거로 돌려 보자. 조선시대에도 권력의 집중과 타락을 예방하려는 제도적 장치가 있었을까? 권력자의 전횡을 차단하는 장치가 마련되지 않고 한 왕조가 500년을 지속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성무 국사편찬위 위원장이 쓴 《조선은 어떻게 부정부패를 막았을까》는 조선시대 권력의 견제장치와 그 변모의 역사를 잘 정리해 소개한 책이다. 조선시대 정치 권력은 1차적으로 왕권과 신권의 분립 양상으로 나타났다. 신하는 왕권을 견제하고 왕은 신권을 견제했다. 또 신권 내부에서도 어느 한 사람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도록 서로가 서로를 제어했다. 그런 긴장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부패의 독버섯이 함부로 자라지 못했다. 이렇게 여러 권력체들 사이에서 견제와 균형의 정치역학이 작동하는 데 핵심적 기능을 했던 것이 대간, 감찰, 그리고 암행어사 제도다. 이 책은 이 세 가지 부패방지 제도를 적실한 실례를 들어가며 흥미롭게 살피고 있다. 사림파 영수 조광조, 주자학의 거성 퇴계 이황, 《목민심서》의 정약용…… 이들이 모두 암행어사였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신라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조선시대에 꽃핀 대간, 감찰, 암행어사 제도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감사제도의 정수라 할 수 있다. 대간은 왕의 독주와 고위관료들의 비리를 막기 위해 끊임없이 탄핵하고 상소를 올리며 조선왕조의 파수꾼 노릇을 했다. 감찰은 사헌부의 하급관원이었지만, 곳곳에 파견되어 일반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감시하고 적발했다. 감찰의 감시기능은 정부 부처 어느 곳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광범위했고, 유동적으로 움직였다. 업무 분담과 업무 추첨제, 현대적인 업무 로테이션 등 자체 정화 노력 역시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사 박문수로 우리에게 친숙한 암행어사 제도는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선왕조의 남다른 노력이었다. 조선에만 있었던 이 제도는 지방 수령, 토호들의 전횡을 막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아래로는 민생 안정을, 위로는 중앙집권화의 기틀을 탄탄히 다졌다. 자, 이제 정약용, 조광조, 퇴계 이황 등의 선조들과 함께 흥미진진한 조선시대 감찰관료들의 부정부패 적발기를 만나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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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을 구한 13인의 경제학자들
한정주 | 다산초당 | 2013-04-27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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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을 구한 13인의 경제학자들
한정주 | 다산초당 | 2013-04-27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민생을 고민했던 조선 경제학자 13인의 삶과 사상
<조선을 구한 13인의 경제학자들>은 민생과 부국을 치열하게 고민했던 18세기 조선 경제학자들의 삶과 사상을 다룬 책이다. 저자가 경제 전문 월간지인 '이코노미플러스'에 2006년 11월부터 연재했던 글들을 다듬고 보충해 엮은 것이다. 18세기 전후 당시 현실을 분석하여 조선이 나아갈 경제 발전 모델과 개혁 전략을 밝힌 경제학자 13명을 소개한다. 인간의 가치를 정신적 삶에 대한 추구에서 찾았던 성리학과 달리, 조선 경제학자들은 부국안민과 부국강병을 위해 물질적 가치가 더 우선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봉건 체제 내부의 경제 현상은 물론, 근대적인 경제 현상과 징후들을 분석하고 발전 경로를 밝혔다. 이 책에서는 피폐한 백성들의 삶을 구제하려 했던 경제학자 13인의 삶과 사상을 살펴본다. 저자는 조선 경제학자 13인의 경제 이론과 사상을 다루면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그들의 '경제학자로서의 참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자 했다. 아울러 역사를 따라 흘러내려온 중상주의와 중농주의의 흐름을 함께 살펴본다. 18세기 경제학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21세기 글로벌 시대를 살아갈 지혜와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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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연애사건
이수광 | 다산초당 | 2013-04-24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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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연애사건
이수광 | 다산초당 | 2013-04-24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자유연애가 금지된 조선시대에도 남녀상열지사가 있었다!
16가지 연애사건, 그 안에 감추어진 내밀한 조선시대를 읽는다! “조선을 발칵 뒤집은 16가지 화려한 연애 스캔들!” 엄격한 유교사상과 신분제도가 개인을 철저히 억압한 조선시대에도 화려한 ‘연애사건’은 그칠 줄을 몰랐다.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연애사건》은 조선 왕조 500년 역사를 뒤흔든 최대의 연애사건과 스캔들을,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흥미진진하게 재구성한 책이다. 책에 등장하는 16가지 연애사건은 오늘날 관점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조선시대의 성 모럴을 낱낱이 드러내 보여준다. 자유연애가 가능했던 고려시대와 달리 자유연애가 금지된 조선시대의 연애는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때로는 당사자의 목숨마저도 위험했다. 이 책을 읽어 내려다가 보면 신분과 목숨을 전부 걸고 뜨겁게 연애한 조선의 남녀들을 만나게 된다. 더불어 딱딱한 역사 속에 꼭꼭 감춰진 내밀한 남녀상열지사의 한 장면을 들여다보는 각별한 재미를 마주할 수 있다. 양반 사대부와 조선 왕실의 치명적인 스캔들을 파헤친다! “조선 왕조 500년의 스캔들” 그 이면에 자리한 권력과 성(性) 조선시대 지배층 사대부와 구중궁궐 왕실에서도 숱한 염문과 스캔들이 있었다. 사대부는 겉으로는 성을 금기하는 척했으나 실상은 풍류라는 이름으로 기생과 성을 거리낌 없이 향유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권력을 이용해 남의 첩을 가로채 열렬히 사랑에 빠진 양녕대군 사건, 아버지의 애인을 빼앗은 사대부 무신 사건, 세종의 며느리가 궁중에서 벌인 동성애 사건 등,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연애사건》은 조선의 권력자들이 일으킨 스캔들을 파헤쳐 조선시대 양반들의 이중적인 성 윤리를 들여다보게 한다. 봉건사회를 뛰어넘어 자유롭고자 한 대담한 여성을 만난다! “금지된 사랑에 맞선 용감한 여자들, 그리고 사대부들을 농락한 팜므파탈” 조선시대 연애사건의 최대 피해자는 여성이었다. 조선시대 양인 여성에게 연애는 곧 간통이었다. 미혼 여성이 연애하는 것도 간통이었으며, 여자는 이혼이나 재가를 하기 힘들었다. 조선시대 양인 남성의 연애는 너그럽게 용인되었지만 양인 여성의 연애는 심할 경우 죽음도 각오해야 했다. 그러나 여성의 연애가 허락되지 않았던 시대에도 과감히 자유로운 연애를 한 대담무쌍한 여성이 있었다.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천민 남자를 사랑하다 국가에 의해 이혼당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가이, 자유연애를 꿈꾸고 과감히 직접 신랑감을 고른 규방 부인, 조선시대 최고의 두 팜므파탈인 감동과 어을우동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사대부의 윤리를 벗어난 대가로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 책에 실린 여성의 연애사건에는 그 당시 자유로운 사랑을 꿈꾼 조선시대 여성의 간절한 목소리가 담겨 있다. 죽음도 빗겨간 불멸의 로맨스, 그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 “조선시대 최고 로맨티스트들의 이야기!” 조선시대에도 운명적인 사랑과 로맨스가 있었다. 여류시인 삼의당 김씨 부부는 한날한시에 태어나 사랑의 시를 주고받으며 평생을 해로했다. 이들 부부가 평생토록 나눈 아름다운 부부애는 시공을 넘어서 은근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또한 동갑내기 아내를 잃은 선비 심노숭은 떠난 아내를 미치도록 그리워하며 절절한 아픔으로 눈물의 제문을 지었다. 이 밖에도 비천한 신분의 기생이지만 첫사랑을 죽을 때까지 지키며 살다간 일선의 이야기, 죄인의 신분으로 전락한 남자 곁을 평생토록 지킨 기생 가련의 이야기 등, 오로지 한 사람을 영원히 사랑한 조선 최고 로맨티스트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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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기생들
이수광 | 다산초당 | 2013-04-23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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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기생들
이수광 | 다산초당 | 2013-04-23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조선 기생의 진짜 모습을 복원한 이수광 여성 역사서 “나는 사랑을 하면 할수록 사랑에 목마르다” 비단 옷을 벗은 기생들의 진짜 모습을 공개한다! 조선 팔도에는 남자들을 치마폭에 두고 휘둘렀다는 황진이 말고도 그 미모와 재능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기생들이 많았다. 유교사회인 조선에서 여자의 몸으로 금기서화를 익히고, 사대부들과 자유롭게 교제했던 기생은 조선의 또 다른 이면을 드러내는 특별한 계층이었다. 기생과는 인연이 없을 것 같은 꼿꼿한 선비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도 기생들의 치명적인 매력 앞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현대에 와서는 조선의 춤과 노래를 전승한 예인으로 조명되는 기생들에게는 지금껏 드러나지 않은 색다른 면모가 많이 있다. 황진이로 대표되는 조선의 기생들을 단순히 ‘요부’쯤으로 생각했다면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기생들>은 매우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이 책은 오늘날로 보면 인간문화재이기도 했고, 패션을 선도했던 연예인이기도 했고, 부를 쌓은 성공한 여성이기도 했던 기생들의 다양한 모습을 살펴본다. 인물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잡아내는 데 탁월한 저자 이수광식 묘사로 기생들은 지금까지의 선입견을 벗고 조선이라는 시대를 살다간 젊은 여성으로 복원되었다. 단양 기생 두향은 퇴계 이황과 시경의 시를 나눌 정도로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세종조의 궁중 악무를 유일하게 전승한 초요갱은 당시에도 예인으로서 대우를 받았다. 그렇기에 기생들의 이야기는 조선을 뒤흔들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들의 역사에서 지금껏 기생들의 이야기는 배재되고 소외되었다. 저자 이수광은 지배층인 사대부와 문화를 공유하면서도 질곡의 삶을 살아야 했던 조선의 기생들을 살피는 것은 조선의 여성사를 살피는 것이라고 말한다. 기생들의 모습과 성향은 지방에 따라 달랐고, 그 수는 생각보다 꽤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생생히 살아 숨 쉬었던 기생의 이미지를 그려내는 이수광식 시각과 필체야말로 조선의 여인, 기생을 똑바로 바라보게 한다. 사랑을 하는 여자가 세상을 뒤흔든다! 여자이면서 천민이었던 기생들이 학문깨나 읽는다는 사대부는 물론 왕까지 쥐락펴락했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특히 춤과 노래, 혹은 시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기생들은 당대에도 만인의 관심을 받으며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했다. 그것은 그들이 규방여인들보다 자유롭고, 가슴에는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자유’를 사랑했던 기생들 “남자들을 내 치마 앞에서 무릎 꿇게 하리라” 한양 기생 초요갱 초요갱은 평원대군 이임의 첩이었으나 화의군 이영과도 정을 통했다. 소위 두 형제가 초요갱과 간통을 한 것이다. 그러나 초요갱은 두 형제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계양군 이증과도 사통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증 역시 세종의 아들이오, 수양대군의 이복동생이었다. 초요갱은 마음이 가는 대로 많은 남자들과 교류했다. “임금도 나를 소유하지 못한다” 보천 기생 가희아 1407년(태종 7) 한양 저자에서 집단 난투극이 벌어졌다. 백주대낮에 병력까지 동원되어 저자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던 이 패싸움은 기생 가희아를 차지하려는 금군총제 김우와 이를 저지하려는 대호군 황상이 벌인 치정싸움이었다. 이 사건으로 가희아를 첩으로 삼았던 황상은 파직되었고, 궁중연회에 동원되는 기생을 첩으로 삼은 많은 대신들이 탄핵되었다. 조정을 뒤흔들 정도로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였던 가희아는 움직이지 못하는 꽃이 아니라 자유를 찾아 돌아다니는 나비 같은 여인이었다. ‘세상’을 사랑했던 기생들 “지키기 위해서라면 칼을 드는 것도 불사하겠다” 가산 기생 연홍 변경 지방의 기생들은 무예를 연마하여 사열을 하는가 하면 군사들과 사냥을 나가기도 하고, 외적이 침입하면 창을 들고 나가 싸우기도 했다. 가산 기생 연홍은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결사대를 조직하여 가산을 지켜냈다. 감히 기생의 업적이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적의 기세에 맞섰던 그녀에게서 남성 못지않은 기개와 용기를 엿볼 수 있다. “배고픈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나의 업이다” 제주 기생 만덕 제주 기생 만덕은 의술과 상술로 부를 축적했다. 옷 한 벌 버리지 않는다 하여 억척녀로 소문이 난 만덕은 제주도에 돌풍이 불어 백성들이 굶어 죽어나가자 전 재산을 들여 백성들에게 쌀을 나눠주었다. 이후에도 만덕은 굶주린 사람들에게 구제의 손길을 중단하지 않았다. 제주도에서는 구휼미로 백성을 구제한 만덕의 공을 지금도 칭송하고 있다. ‘사랑’을 멈출 수 없었던 기생들 “젖가슴 하나를 베어 미망에서 벗어나게 해주소서” 단양 기생 두향 퇴계 이황의 마음을 한번에 사로잡은 단양 기생 두향은 이황과 시를 나누고, 풍류를 함께 했다. 하지만 이황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풍기로 발령이 나 떠나버렸다. 이제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이었지만 두향은 퇴계를 그리며 수절을 선택했다. 이황이 그리우면 강선대 위에 올라 울었다는 두향은 끝내 일편단심의 마음을 안고 강선대에 몸을 던졌다. “어찌하여 여자로 세상에 태어나게 했습니까” 부령 기생 영산옥 관기는 관가지물(官家之物)이라 하여 거취를 옮길 수도 없었고, 첩으로 삼아 주지 않으면 기생 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또한 마음대로 수절을 할 수도 없었는데, 수절을 하기 위해서는 관장의 혹독한 벌을 견뎌내야 했다. 부령 기생 영산옥은 첫사랑 서시랑을 떠나보내고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절개를 지켜냈다. 조선 기생의 발자취를 찾아 떠난 여정 저자 이수광은 조선을 뒤흔든 기생들 이야기를 쓰면서 그들의 발자취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 퇴계 이황과 단양 기생 두향의 아름다운 사랑을 찾아 안동 도산서원을 찾았을 때는 때마침 매화가 피어 두향의 맑은 영혼을 떠올리게 했다. 조선의 기생들이 미모와 재능으로 화려한 꽃처럼 살았다고는 하나, 미처 피지도 못하고 꺾여버린 수많은 기생들을 잊을 순 없다. 아무나 꺾을 수 있는 길가의 꽃이라 하여 노류장화(路柳墻花)라 일컬어지던 수많은 기생들은 신분의 굴레 속에서 힘든 삶을 살았다. 노류장화라는 말에는 기생을 하찮게 생각하던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멸시와 밤마다 술과 웃음을 팔아야 했던 여인들의 가슴 저린 애환이 함축되어 있다. 어머니가 기생이었기 때문에 딸도 기생이 되어야 했던 숙명과 같은 삶, 기생의 굴레를 벗어던지기 위해 몸부림을 쳐도 남자들이 만든 신분의 족쇄는 풀 수 없었다. 기생들은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잊고자 혼을 실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귓전을 암암하게 울리는 그녀들의 웃음소리와 탄식, 슬픈 노랫가락과 혼을 실은 춤사위가 떠올라 내내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화려함 속에 가려졌던 기생들의 진짜 모습을 우리는 쉽게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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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왕후들
이수광 | 다산초당 | 2013-04-26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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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왕후들
이수광 | 다산초당 | 2013-04-26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역사는 그녀들의 권력에 대한 의지를 잊고 있었다!”
당당하게 절대 권력에 도전했던 왕후들의 이야기!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왕후들』. 팩션형 조선 역사서 작가 이수광이 오랜 고증과 치밀한 추리로 되살아난 조선 퍼스트레이디들의 숨소리를 이야기한다. 사극이나 소설에서 다뤄지는 왕후들은 단아하거나 정치력 있는 모습보다는 왕의 총애를 둘러싸고 암투와 모함, 독살로 얼룩진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책은 일반적으로 다뤄지던 왕후들의 모습에서 벗어나 치밀한 판단력과 불굴의 의지로 정치력을 발휘했던 왕후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역사 속에 있었으나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았던 조선의 국모들의 실체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저자는 총 16명의 왕후들과의 대화를 통해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진 그녀들의 모습을 재조명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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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을 만든 사람들
이성무 | 청아출판사 | 2013-01-17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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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을 만든 사람들
이성무 | 청아출판사 | 2013-01-17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대립과 갈등 위에 꽃피운 조선 역사 500년
역사의 라이벌로 만난 14인의 맞수들, 그러나 그들이 꿈꾼 것은 모두 하나 된 ‘조선’이었다! 역사는 대립과 투쟁 위에 만들어진다. 역사의 전환점에는 반드시 ‘걸출한 천재들’이 등장하며, 두 천재들의 대립으로 역사의 방향이 결정된다. 분열과 단합, 분쟁과 화해를 통해 꽃피운 조선 역사 500년!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이라는 그림의 조각들은 역사적 분기점들마다 등장하는 두 맞수들의 대결을 통해 완성되었다. 청아출판사에서 펴 낸 《조선을 만든 사람들》은 조선왕조의 건국에서부터 조선 후기까지 조선 역사의 방향을 바꾼 7가지 역사적 전환점을 살펴본다. 이 전환의 순간을 주도한 14명의 라이벌들의 모습을 통해 조선이라는 총체적인 그림을 읽어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선비’라는 유약한 문사의 얼굴 뒤에 가려진 구국을 위한 충정과 열정을 지닌 14인의 라이벌들. 이들의 투쟁은 때로는 정책 결정 방향에서, 때로는 사상에서, 때로는 당파적 명분에서 촉발되었다. 이들의 관계, 대결의 원인과 구도와 그 뒤에 숨겨진 각자의 생각들을 살펴보면 조선 500년의 역사가 왜 그렇게 이루어졌는지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경쟁자이자 적수, 동시에 동지인 14인의 선비들, 그들이 만들고자 했던 조선은 어떤 모습인가? 개인적, 당파적 대결의 차원을 뛰어넘어 일국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14인의 맞수들. 저자는 이들의 사투가 결국 하나 된 ‘조선’을 만들기 위한 충심의 결과라고 말한다. 시대의 호적수였지만 결과적으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위한 충정에서는 동지였던 이들의 대결은 조선을 어떻게 그려갔을까? -조선의 운명을 가르다 …정도전 vs 이방원 정도전과 이성계는 함께 조선을 건국한 개국 공신이다. 그러나 조선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대한 관점에서 두 사람은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오랫동안 앙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상적인 조선이라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 한 사람은 강력한 신권 정치를, 한 사람은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했고, 이에 대해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대립으로 일관했다.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을 통해 정도전을 제거했지만, 조선왕조는 정도전의 설계대로 이룩되었으니, 과연 누구를 역사의 승자라 칭해야 할까? -권력욕인가, 충심인가 …조광조 vs 남곤 조광조와 남곤은 연산군의 폭정으로 야기된 국정의 총체적 난맥을 수습해 왕권을 강화하고 성종 대의 안정된 정치를 재구현해야 하는 정치적 풍파 속에서 한쪽이 살기 위해서는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상황에까지 치달았다. 남곤과 조광조는 일개인이기보다 반정공신과 사림이라는 당파를 대변했다. 반정으로 폭군을 몰아내고 귀족정치를 구현한 반정 공신들과 급진적 개혁을 주도했던 젊은 사림들. 이들의 대립은 정치적 중흥을 위한 것이었지만, 세 번의 사화라는 피바람을 불러일으키며 정국을 뒤흔들었다. -가깝고도 먼 주자학의 동반자 …퇴계 이황 vs 남명 조식 이황과 조식은 조선 중기 도학자로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두 사람은 같은 도에서, 같은 해에 태어나 비슷한 해에 천수를 다하는 등 한 세월을 함께 한 동지였다. 그러나 이황은 관직에 나아가 세상을 바로잡으려 했고, 조식은 재야의 지식인으로 남아 현실정치를 비판하고자 했다. 평생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비판하고, 한 시대를 살아 낸 주자학의 동반자, 이 두 사람의 교류는 조선 성리학을 완성시켰다. -십만양병설의 진정한 의미 …율곡 이이 vs 서애 유성룡 문정왕후 사후 외척 세력이 몰락하면서 조선 사회는 왕권을 둘러싼 갖가지 당론의 분열과 대립을 겪었다. 이로 인해 군사제도와 국방체제는 문란해져갔고, 이는 결국 임진왜란의 참패를 겪게 했다. 진취적인 사상과 제도 개혁안으로 선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던 율곡과 그런 율곡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지나친 급진성을 우려해 비판한 서애. 십만양병설의 존재 여부에 대한 가불가 논의는 제쳐두고,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해 내기 위한 젊은 선비들의 맞대결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다. -생존이냐, 명분이냐 …최명길 vs 김상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속에서 극명하게 대립했던 최명길과 김상헌. 젊은 시절에는 학문에 뜻을 두고 비슷한 길을 걸었지만, 인조반정을 계기로 정치노선이 갈린 두 사람은 양차 호란을 겪으면서 극명하게 대립한다. 국토를 보존하기 위해 주화를 택한 최명길과 명분이 없다면 무엇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한 김상헌. 훗날 이역만리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두 사람은 옥사에서 서로의 입장을 이해했지만, 후손들은 노론과 소론이라는 파벌로 나뉘어 싸움을 계속했다. -조선 역사상 최대의 사상 논쟁 …송시열 vs 윤휴 조선 후기, 중국과 일본, 조선, 삼국 간의 평화가 지속되면서 성리학적 이상국가 건설을 추진했던 조선 사회는 이념 논쟁을 벌이게 된다. 주자학의 정통을 따른 송시열과 기존의 학문관을 뛰어넘어 스스로 공맹의 도를 깨우치려 했던 윤휴. 이 두 사람 간의 사상 논쟁은 비정한 정치 논리와 맞물렸고, 결국 당파싸움으로 발전했다. 두 차례의 예송논쟁은 송시열의 승리로 끝난다. 당대 후학들에게는 송자로 추종받았지만 조선의 사상계를 경직시킨 송시열.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역사는 그에게 승자의 칭호를 흔쾌히 내 줄 수 있을 것인가? -개혁의 시대, 진보와 보수라는 이름으로 …정약용 vs 심환지와 노론 벽파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촉발된 시파와 벽파의 대립에서 군주권을 강화하고자 한 정조의 개혁정치는 결국 노론 벽파의 공격에 결국 그 싹이 잘리고 만다. 선비의 몸이지만 실사구시의 학문을 추구한 정약용은 정조 사후 관직을 잃고 오랜 세월 유형생활을 하게 된다. 정조의 24년의 치세와 개혁을 짓밟은 심환지와 노론 벽파는 정치싸움에서는 승리했지만 훗날 역사의 간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유배지에서도 민생안정을 위한 정약용의 노력과 실사구시의 정신은 수많은 저작들로 탄생되어 후대에까지 살아남아 전해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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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지명이 품은 한국사 1
이은식 | 타오름 | 2013-01-19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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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지명이 품은 한국사 1
이은식 | 타오름 | 2013-01-19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2-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2009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에 선정된 이은식 박사의 최신작『지명이 품은 한국사: 서울 경기도편』. 서울과 경기도의 지명에 얽힌 이야기를 다양한 참고자료를 통해 쉽게 풀어냈다. 이제까지 전승되어 온 고유한 지명을 총체적으로 정리하여 전통 지명의 고유성을 유지하고 지명에 얽힌 선조들의 생활상과 애환을 비롯하여 내가 살고 있는 터전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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