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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
김상태 | 책보세 | 2013-05-31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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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
김상태 | 책보세 | 2013-05-31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19)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강단ㆍ진보ㆍ재야사학이 협잡하여 중국 ‘동북공정’에 팔아먹은 우리 고대사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로 신랄히 강단 주류 고대사학계를 비판했던 저자가 다시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을 통해 강단사학은 물론 진보?재야사학계의 심각한 고대사 왜곡 문제를 비판하고 나섰다. 전작에서 보여준 학문적 상식과 과학의 틀을 그대로 가져와 진보?재야사학계를 대표하는 이이화와 강만길, 그리고 박노자, 이덕일, 《역사비평》, 경향신문, 역사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 등이 어떻게 중국 동북공정에 복무하는지 윤내현 교수의 주요 논문을 통해 그 진실을 추적한다. 놀랍게도 이들은 하나같이 윤내현 교수에 의해 무참히 깨진 논쟁들을 다시 살려와 반복하는가 하면 아예 침묵으로 일관한다. 심지어 이들 엉터리 사학자들은 학문적 논쟁을 무시하고 윤 교수를 학교에서 쫓아낼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 책 1장은 고조선의 연구와 상식의 몰락을 그리고 있다. 주류 고대사학계의 거두 이기백은 ‘진실’과 ‘민족’을 표방하는 석학으로 알려져 있지만 고대사에 관련해서는 무지한 잡배나 다름없다. 그의 저술과 논문을 통해서 이를 살펴보는데, 그는 차후 민족사학을 탄압하고 음해하는 원죄적 전통을 세운다. 또 주류 고대사학계 최고 거물인 노태돈은 중국이 동북공정을 시작하기 10년도 전인 1990년에 산해관에 있는 만리장성을 요하까지 늘려놓았다. 이는 중국 학자들의 글을 그대로 옮긴 쓰레기 같은 논문이다. 중국은 이 논문을 바탕으로 차후 만리장성을 2만 리까지 늘리고 만다. 이런 일을 필사적으로 자행한 노태돈과 그의 제자 송호정의 만행을 그들의 논문을 통해 살펴본다. 재야사학계의 원로 이이화는 애하첨고성과 호산장성을 고구려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중국의 유적이라 주장하는 중국 동북공정을 비판한다. 그러나 애하첨고성과 호산장성을 중국 것이라 주장하는 진범들은 노태돈과 송호정이다. 하지만 이이화는 이들을 놔두고 엉뚱한 곳에서 호통을 친다. 나아가 이이화는 완전한 학문적 파산에 처하고 만다. 그는 평생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하다 지금에 와서는 낙랑군이 한반도가 아닌 중국 북경 근처의 산해관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주류 고대사학자들이 왜 한국 유적을 중국 유적이라 우기는지, 왜 만리장성을 늘이는지, 이이화가 무엇을 착각하고 있는지 그들의 책과 논문을 통해 살펴본다. 저자는 이이화의 학문적 파산이 진보사학 내부에 준비되어 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2000년에 진보사학의 아성인 ‘역사문제연구소’의 기관지 《역사비평》은 송호정의 저질 논문을 게재하고 말았다. 이는 근현대사를 전공한 진보사학이 자신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고대사에 대해 주류 고대사학계를 맹목적으로 추종한 것이다. 이러한 사연의 앞뒤를 살펴보고 저자는 ‘역사문제연구소’ 초대 이사장이자 《역사비평》 편집위원이기도 한 현 서울시장 박원순에게 질문을 던진다. 강만길과 박노자는 저항적 반식민사학적 전통에 있어 신채호의 적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신채호를 제거하려고 한다. 그러나 강만길과 박노자는 고조선에 관한 문외한들일 뿐이다. 즉 신채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 이들이 터무니없는 논거로 신채호를 비판한다. 이 비상식적 역설 또한 추적한다. 진보사학이 고조선에 대해 무지하면서도 민족사학을 거부하는 데는 깊은 사연이 있다. 일제 시기부터 100년에 걸친 민족사학과 사회경제사학의 갈등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내면을 살펴보는 것은 물론 나아가 임지현을 비롯한 현 시기 진보사학의 자가당착을 분석한다. 역사문제연구소와 민족문제연구소는 같은 진보사학자들의 단체다. 그런데 역사문제연구소는 자신들이 간행한 책에 주류 고대사학자인 주보돈의 논문을 게재함으로써 유명한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과 ‘한국 고대 국가가 삼국시대 중기까지 국가를 이루지 못한 미개사회였다’는 이론을 받아들인다. 이는 사실상 일제 식민사학의 핵심이며 임나일본부를 용인하는 것이다. 도대체 고대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진보사학자들이 왜 이런 무모한 짓을 저지르는가? 한편 친일파 청산에 앞장서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과 <백년전쟁>을 만들어내면서 역사문제연구소의 식민사학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다. 아울러 이 모순도 살펴본다. 2장에서는 일제시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고조선 연구를 식민사학과 주류 강단고대사학의 소고조선론과 민족사학의 대고조선론으로 대별하여 살펴본다. 특히 저자는 1980년대 이후의 과정에 주목한다. 일반 국민들은 잘 모르고 있지만 소고조선론의 학문적 성과는 지난 100년간 한 줌도 되지 않았다. 반면 신채호 이후 대고조선론은 북한의 연구와 남한의 대학자 윤내현으로 이어지며 완벽하고 탄탄한 기반을 갖추었다. 고조선에 대한 학설로서는 대고조선론이 유일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주류 고대사학계는 이 사실을 철저히 은폐하며 대고조선론을 탄압했다. 대고조선론이 얼마나 과학적인지, 반면 주류 고대사학계의 음모가 얼마나 간교하고 잔혹했는지 그간 학계의 논문들을 통해서 살펴본다. 3장에서는 윤내현 교수의 《고조선 연구》에 대한 표절 시비 문제를 다룬다. 80년대 이후 등장한 윤내현의 대고조선론은 거대한 체계와 치밀한 논증으로 주류 고대사학계의 소고조선론을 뿌리채 흔들었다. 학문적으로 대응할 능력이 없는 주류 고대사학계는 윤내현을 모략하여 표절자로 몰아붙였다. 한국 사학계 최고·최대 잡지인 《역사학보》는 윤내현을 표절자라고 음해하는 이형구의 논문을 그대로 실었다. 유수한 역사잡지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것인데 놀랍게도 이 황당한 음해는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 음모의 허구와 의미를 파헤친다. 4장에서는 《코리안 루트를 찾아서》를 펴낸 경향신문과 이형구의 관계, 그리고 재야사학계의 현주소를 가늠한다. 경향신문은 2007년 이형구와 더불어 중국 북동지역을 24일간 답사하고 이것을 35회에 걸쳐 연재해, 2011년 단행본 《코리안 루트를 찾아서》를 출간했다. 내용은 중국 동북 지역의 문명이 한국의 유구한 고대문명이라는 것인데, 이는 중국이 주장하는 동북공정을 좇는 이론이다. 또 이형구는 동북공정을 주동하는 학자들과 밀접한 인맥을 이루고 있으며 그들의 이론을 답습한 학자다. 하지만 경향신문은 이를 몰랐다. 이 기막힌 사연의 내막을 살펴본다. 그리고 소고조선론과 대고조선론을 둘러싼 재야학계와 대중의 입장을 정리했다. 저자는 과도한 것들을 정리하고 바람직한 논쟁을 위해 제언을 한다. 한편 이덕일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는 민족사학을 주장하며 식민사학을 비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는데, 실제로는 엉망진창이다. 따라서 이를 따르는 대중은 헤어날 수 없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이는 신채호, 윤내현 등 선학들이 뼈를 깎아 만든 대고조선론을 오염시키고 내부에서부터 붕괴시키는 것으로 최남선 이후 가짜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친일파들이 민족주의를 팔아먹는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저자는 그들의 이면을 분석한다. 5장에서 저자는 고조선의 심리학을 들여다본다. 우리 국민들은 실제로 고조선을 잘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의식의 바닥에는 고조선과 한국 역사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숨어 있다. 왜 이런 일이 생겼고 이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를 살펴본다. 6장에서 저자는 윤내현을 어둠 속에 빛나는 상식의 빛으로 숭앙한다. 윤내현은 남한에서 신채호를 잇는 단 한 명의 학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상과 국수주의로 점철된 대고조선론을 과학과 상식의 학문으로 건립한 학자가 바로 윤내현이다. 그의 업적은 단순히 학문적 성과에 그치지 않는다. 학자의 삶과 성실, 무엇보다 상식과 과학을 수십 년의 세월 속에서 실천해온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 그것은 방향을 상실한 우리 사회의 진정한 사표다. 실로 어둠 속에 빛나는 한 줄기 상식의 빛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윤내현의 의미를 조명한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주장하는 논점의 핵심은 역사를 이념이나 이권 문제로 다루지 말고 오로지 상식과 과학의 차원에서 접근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고대사학계의 논문과 이론들이 얼마나 공상과 비상식과 억지가 난무하는지 제대로 볼 수 있으며, 진정한 과학으로서의 고대사를 재정립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는 동시에 우리의 삶도 올바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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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가락국의 후예들
김병기 | 역사의아침 | 2012-06-14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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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가락국의 후예들
김병기 | 역사의아침 | 2012-06-14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한국 최대 종가 가락성씨의 재발견,
김해김씨, 양천ㆍ태인ㆍ하양ㆍ김해 허씨, 인천이씨의 뿌리는 하나다! 매년 두 차례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 가락국의 옛 도읍지 김해에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김수로왕의 후손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시조제를 지낸다. 멀리 해외에서 참석하는 열성 후손들도 있다. 시조 김수로왕과 왕비 허왕후의 종묘宗廟 숭선전崇善殿에서 행해지는 춘추향 대제春秋享大祭에는 지금도 수만 명의 후손들이 모여 일대 장관을 이룬다. 어느 가문엔들 시조제가 없겠느냐마는 김수로왕의 제향祭享에는 특별한 무엇이 있다. 우선 세칭 600만에 달하는 김해김씨의 씨족 세력이 그렇고, 양천허씨, 태인허씨, 하양허씨, 김해허씨 등 이른바 가락허씨들과 인천이씨 후손들도 한자리에 모이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른바 한 지붕 세 가족인 이들의 내력을 알기 전에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다. 최근 역사의아침에서 펴낸 『가락국의 후예들 : 한국 최대 종가 가락성씨의 재발견』은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과 허왕후를 비롯한 그 후손들의 족적을 통해 2천 년을 이어져 내려온 가락성씨의 저력과 실체를 살펴보고, 가문과 뿌리에 대한 긍지와 자긍심이 후손들에게 어떻게 이어져왔는지 반추해본 책이다. 이 책에서는 가락국이 탄생하고 발전하는 과정은 물론 나라를 빼앗긴 가락국의 유민들이 신라를 장악해가는 모습 등을 여러 사료를 바탕으로 파헤쳤으며, 천문학자 김조와 경세가 김자정 부자?무오사화의 중심에 선 김일손?조선조 정통 무맥을 세운 김완?형제 청백리 허종과 허침?고문으로 이름을 떨친 허목?구한말 의병장 허위 형제?당나라 황제에게 성을 받은 허기?가문을 번영시킨 이자연 등 고려시대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가락국의 후예들이 우리 역사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생생하게 재현해냈다. 그 외에도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후손들이 어떻게 김해김씨, 양천?태인?하양?김해 허씨, 인천이씨로 분파되었으며, 나라를 잃은 후에도 그 명맥을 유지하며 현재 한국 최대 종가를 이루어냈는지에 대해서도 다각도로 재조명했다. 또한 이 책은 가문의 영광과 성공한 인물에만 집착하고, 문중 인물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용납되지 않는 풍토가 지배적인 문중사학을 바라보는 새로운 장을 제공해줄 것이다. 김수로왕을 시조로 모시는 600만 가락성씨, 2천 년 역사를 이어져 내려온 그들의 저력을 파헤친다! 가락국은 기원후 42년 김수로왕의 탄강을 시작으로 5백 년 역사를 면면히 이어가면서 동방의 강국으로 발전했다. 때로는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때로는 가락의 우수한 철기문화를 주위에 전파하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와 더불어 세력을 떨쳐나갔지만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 강력한 제국들도 결국에는 모두 멸망하고 만다. 세계 제국 로마도 멸망했고, 천 년 왕국 신라는 왕건에게 나라를 바쳤다. 진시황의 진 제국도 유방에게 망했으며 한나라 역시 조위에게 멸망당했다. 가락국 또한 힘을 잃어 신라에게 나라를 바쳐야 했다. 가락국의 후예들은 나라를 잃은 후 뿔뿔이 흩어졌다. 바다를 건너 왜국으로 건너가거나 신라의 사민정책에 의해 원치 않는 곳으로 끌려가기도 했으며, 옛 땅에 남겨진 수많은 백성들은 더 어려운 삶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가락정신’을 잊지 않았다. 지금도 그들은 수로왕을 모시고 제향을 드리고 있으니 실로 경이롭기까지 하다. 한 왕조가 5백 년의 역사를 이어갔다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거니와 2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시조와 조상의 유업을 추모하고 해마다 봄가을로 그 후손 수만 명이 시조 능묘 앞에 제향을 드린다는 것 또한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더욱이 각각 성씨가 다른 김씨, 허씨, 이씨가 함께 모여 중앙종친회를 이루고 함께 조상을 섬기는 모습은 다른 가문에서는 보기 힘든 가락성씨들만의 개방성과 화합의 미풍 전통인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본관과 종파를 가진 성씨들이 있고 각각 수많은 계파별 종친회로 모이고 있다. 그 가운데 가락국의 후손들은 분열된 종파를 만들지 않고 서로의 차별성을 인정하면서 한울타리 안에 유기적 통합을 이루고 있다. 가락성씨들이 오늘날까지 이처럼 배타적이지 않고 서로의 융합을 이루고 있는 것은 가문의 오랜 전통과 가락의 혼이 후손들 가운데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서로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하나로 화합하는 ‘가락정신’이야말로 21세기 우리 민족이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한국상이다. 인물로 밝혀낸 미완의 왕국 가야와 그 후예들 이야기 가락국의 후손들은 나라를 잃은 후에도 신라에 건너가 큰 공을 세우면서 가락인의 위상을 크게 떨쳤다. 구형왕의 아들 김무력, 손자 김서현 그리고 증손자 김유신이 대표적 인물들이다. 또한 가락국의 후손들은 고려왕조에 이르러 가문을 부활시키며 고려의 귀족문벌로 수많은 문무 장상들을 배출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좀처럼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의 역성易姓에 많은 가락의 후예들이 두문동으로 들어가 고려왕조에 대한 의리를 지켰던 것이다. 무오사화를 당해 김일손이 연산군에게 비참하게 처형되면서 가락의 후예들, 특히 김해김씨 일문은 초야에 묻혀 은인자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가 하면 가락허씨들 중 양천허씨는 수많은 상공 재상들을 배출하면서 조선조의 예학과 경세가로 이름을 크게 떨쳤다. 허목이 그랬고 허적이 그러했다. 조선 후기에는 안동김씨를 비롯한 이른바 문벌 있는 몇몇 집안의 독주체제가 깊어지면서 이들이 조선의 모든 벼슬을 독식했다. 관권의 횡포와 수탈로 백성이 설 자리를 잃었으며, 사회질서가 문란해지고 농민반란이 꼬리를 물었다. 나라는 이들을 통제할 힘이 없었다. 결국 노론가의 전횡에 빠진 조선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이른바 조선 명문가의 후예들은 앞 다투어 일제의 작위와 은사금에 자신과 가문을 팔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라는 말이 있다. 나라가 위란에 빠질 때 나라를 위해 자신과 가문을 던지는 것이 예로부터 가문의 명예요, 긍지였다. 가락국의 후예들도 나라가 위난을 맞았을 때 가문의 지조와 자긍심을 지키며 의병으로, 의열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같이 바쳤다. 허위 집안이 그렇고, 김상옥이 그러했다. 그들이 이처럼 자신의 몸과 가족들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구국운동에 나선 것은 한때의 의분이 아니라 선조 대대로부터의 교훈과 가문에 대한 긍지 때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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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이철 | 다산초당 | 2013-04-19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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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이철 | 다산초당 | 2013-04-19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식민지 경성에서 피어난 최초의 ‘연애의 계보학’
정조 취미론에서 프롤레타리아 연애론까지! 한국의 연애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그 사랑의 역사를 만난다! 중세 조선에서는 봉건적 신분 제도와 억압적인 성 윤리로 인해 자유로운 사랑이 금지됐다. 그러나 근대 경성은 달랐다. 신선한 서구 사상들이 조선에 유입되면서 사랑에 관한 대중들의 인식에도 콜럼버스적인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한국사상 최초로 ‘연애’라는 단어가 등장했고 새로운 학문을 익히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던 젊은이들은 앨렌 케이의 자유연애론을 들여왔다. 어떤 결혼이든 사랑이 있으면 도덕이고 없으면 부도덕이라는 그녀의 사상은 낡은 사회 윤리에 숨 막혀 하던 젊은이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새롭게 경성에 등장한 모던걸과 모던보이들은 식민지 시대의 폭압적인 현실과 맞서면서 사랑에 관한 과감한 담론들을 펼치기 시작했다. 정조는 육체가 아니라 정신에 있다는 신정조론을 주장한 김원주가 있었는가 하면, 정조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취미에 불과한 것이라는 정조 취미론을 펼친 나혜석이 있었다. 프롤레타리아 연애론으로 무장한 혁명가 허정숙은 여기서 더 나아가 성적 만족을 위해서라면 정신적인 사랑이 없어도 육체적 결합이 가능하다는 연애유희론을 실천에 옮겼다. 성 윤리 면에서 개방적이라고 생각되는 오늘날에도 파격적이라고 생각되는 연애사건들이 100년 전 경성을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한국 근대사에 천착해 온 젊은 역사가가 써 낸 이채로운 미시사! 이 책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은 소설보다 흥미로운 스토리 안에 이채로운 미시사를 촘촘히 박아놓은 작품이다. 책의 초반부에 소개되는 1920년대 3대 연애 사건에서는 자유연애의 주역들이 기생에서 신여성, 다시 카페의 여급들로 이동했음이 드러난다. 모델 소설 논쟁으로 희생당한 김명순의 이야기에서는 한국의 근대 문학사가 슬며시 끼어들고, 김용주과 홍옥임의 자살 사건을 통해서는 동성애에 관한 시각이 지금보다 오히려 100년 전에 더 관대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독살 미인 김정필 사건에서는 구여성들이 자신들의 비참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남편 살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진다. 조국의 독립과 혁명을 꿈꾸며 경성 시내를 활보하던 삼인당과 여성 트로이카의 이야기, 일제하 운동사상 가장 낭만적인 로맨스로 기억되는 박진홍과 김태준의 연안행에는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가 그대로 묻어나며 이를 통해 독자들은 그들이 일본과 중국, 러시아를 넘나드는 세계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저자 이철은 한국 노동자의 역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혼돈과 격동의 도시 경성을 만났고 이후 당대의 인간 군상들을 연구하면서 식민지 조국의 폭압적 현실을 사랑으로 돌파해 나가려는 청년들과 조우했다. 친일과 반일의 이분법적 틀로만 인식되던 경성 시대 사람들이 실은 빛나는 젊음의 에너지를 지닌 인간이었다는 진실에 공감한 그는, 낡은 활자들 사이에서 인간의 더운 숨결을 살려냄과 동시에 과거의 담론에 현실을 비추는 역사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현재는 경성의 살인, 암살, 엽기 사건 등 주변부 역사로 치부되었던 분야들을 파고들고 있으며 중국사와 일본사에도 관심을 가져 근대 동아시아사에 관한 책을 쓸 계획을 품고 있다. 100년 전 경성에 펄떡거리는 심장을 지닌 인간이 살고 있었다! 경성은 전前 근대와 현대, 동양과 서양이 공존하던 공간이었다. 한편에서는 자유연애를 부르짖는 젊은 목소리들이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는 여전히 억압적인 유교적 윤리의 벽이 굳건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너무나 달랐던 두 흐름은 비극적인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죽음으로써 맹세를 지킨 사회주의자 장병천과 기생 강명화, 사의 찬미를 노래하며 현해탄에 몸을 던진 윤심덕과 김우진, 죽음의 연애 공식을 실행에 옮긴 청년 의사 노병운과 카페 여급 김봉자. 그들은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사랑에 생명을 던지며 죽음을 맞았다. 한편 마초적인 남성 문인들에 의해 탕녀로 낙인 찍혔던 김명순은 여성으로서, 온전한 인간으로서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다 끝내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또한 연인 백성욱과의 절대적인 사랑을 나누었던 김원주는 그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구도자의 길을 걸었다. 비록 그들은 지금 이 세상에 없지만 그 사랑만큼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마음껏 사랑을 향유할 수 있는 것도 이들에게 빚지고 있는 터일 것이다. 이 책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은 경성 시대의 생생한 공기와 함께 100년 전에도 이 땅에 펄떡거리는 심장을 가진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는 진실을 가슴으로 느끼게 해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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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광개토대왕
노윤생 | 도서출판 큰방 | 2012-01-09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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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광개토대왕
노윤생 | 도서출판 큰방 | 2012-01-09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광개토대왕』은 아시아 대륙의 판도를 바꾼 고구려 군의 전투신화, 광개토 대왕과 철기병 이야기를 다룬 역사서다. 철기병을 앞세워 만주 벌판을 달리던 고구려의 군대는 동으로는 추코트 반도에서부터 서쪽으로는 북시베리아를 넘어 러시아의 움스크를 지나 쿠르간까지 카자흐스탄은 물론이고 터키의 구르지야와 이란의 엘부르즈 산맥까지, 남으로는 중국의 황하 이남까지를 새로운 영토로 만드는 위업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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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나는 조선이다
이한 | 청아출판사 | 2013-01-17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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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나는 조선이다
이한 | 청아출판사 | 2013-01-17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뛰어난 왕자들, 빼어난 인재들, 그리고 수십 년 단위의 프로젝트들이 맹렬하게 돌아가던 세종의 시대, 이 모든 것이 존재하고 굴러갈 수 있었던 것은 위대한 왕 세종이 있었기 때문이다. 왕자들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강한 끈으로, 신하들에게는 유능하고 열성적인 상사로, 이 시대 사람들의 강렬한 개성은 세종의 조용한 카리스마와 힘을 통해 하나로 묶였다. 조선의 최고 선정기를 이룩한 세종대왕. 세종대왕의 인간관계부터 업적, 그리고 후세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세종의 모든 것을 알아본다.
조선왕조의 절대군주 세종 왕자의 난을 일으킨 태종의 셋째아들로 태어나, 세자 양녕대군을 제치고 왕이 된 세종. 처음 왕이 아니었던 자가 왕이 되었지만, 세종이 다스리며 키워낸 조선은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상 다시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태평성대였다. 이는 세종의 냉철한 성격과 카리스마적인 리더십, 꾸준한 학문에의 정진, 반상을 아우르는 인재의 등용에 기인한다. 이 책은 어린 시절의 세종부터 세종이 승하한 후에 변화한 조선까지, 세종을 둘러싼 모든 것을 다룬다.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하여 그의 성격부터 가족들, 신하들과의 관계, 그리고 세종조의 눈부신 업적을 살펴보며, 이런 위대한 업적이 이후 세대로 이어지지 않은 이유까지 고찰한다. 우리는 결국 조선이라는 큰 틀을 만든 성군 세종, 그 자체가 조선임을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세종 이후의 조선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세종의 리더십 흔히 세종대왕은 인자한 성격의 성군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종에게 인내심이 있었을망정, 인자한 면모는 찾아보기 힘들다. 실록에는 철두철미하게 공부를 한 후 그 지식을 바탕으로 신하를 맘껏 휘두른 독선적인 모습이 많이 보인다. 그러나 또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었던 세종은 대체로 스스로의 성정에 휘둘리지 않고 판단했으며, 때로는 능글맞을 정도로 깊이 생각한 후 신하들을 대했다. 자신의 수족이 될 신료들을 고를 때에도 계급을 상관하지 않았고, 선택한 인재들을 꾸준히 교육시키는 것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세종조의 인재들은 완벽한 이들이 아니었다. 청렴결백의 대명사인 명재상 황희는 사실 비리혐의가 있었고, 조선 음악의 아버지인 박연은 돈을 밝혔다. 대쪽 같은 집현전 중진 변계량은 부인을 학대하기도 했으며, 6진을 개척한 김종서는 고집 세고 꽉 막힌 사람이었다. 세종은 이렇게 결함이 있을지언정 능력이 뛰어난 인재들이 마음대로 활개를 칠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그것은 세종이 성격이나 계급을 상관하지 않고, 그들이 가진 전문가로서의 능력만을 최우선으로 보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문제가 되는 부분은 자신의 카리스마와 학식으로 적절히 억눌렀다. 이런 개성 강한 신료들의 우두머리였던 세종은 아랫사람들의 불평불만에 대응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학식을 지닌 군주였고, 이것은 평생을 통한 공부에서 얻은 것이다. 스스로의 지식을 바탕으로 한 세종의 인재활용은 조선 초를 안정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세종과 여러 신료들과의 관계를 통해 세종의 업적들을 다시 되짚어 보며, 인내심 강하고 때로는 독선적이기 했던 세종의 성격과 리더십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본다. 선량한 독재자가 가고 난 후 그러나 세종의 승하 후, 이러한 업적은 후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세종이 발굴하고, 열심히 가르친 학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세종대왕의 태평성대 이후 바로 조선조 최고의 비극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세종이 살아 있을 당시는 보이지 않았던 문제점이 왕의 사후 서서히 표출되었다. 세종의 말년부터 미처 알려지지 않은, 혹은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들을 살펴본다. 그 궁금증을 파헤쳐보는 동시에, 인자한 왕이라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교활하고 독선적으로 신하들을 휘두른 또 다른 면모도 함께 살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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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단숨에 읽는 글로벌 한국사
글로벌 한국사 편집위원회 | 풀빛 | 2013-09-02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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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단숨에 읽는 글로벌 한국사
글로벌 한국사 편집위원회 | 풀빛 | 2013-09-02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한국사를 조망한
신개념의 통사, 글로벌 한국사 정리 노트 출간 !! 글로벌 한국사 시리즈는 세계사의 큰 흐름 속에서 한국사가 다른 세계의 역사와 어떻게 연관되었는지를 중점적으로 조명한 새로운 개념의 역사책이다. 이는 새로운 역사 교육과정이 추구하는 바를 충실히 반영하는 한편, 그동안 따로따로 배워 온 세계사와 한국사를 한데 통합해 엮음으로써 ‘오늘’을 사는 ‘우리’가 역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를 충실히 안내하고 있다. 2012년, 마지막 권인 《글로벌 한국사 5 글로벌 시대와 한국 현대사》의 출간으로 완간된 글로벌 한국사 시리즈는, 여기에 다섯 권의 주요 내용 중에서도 반드시 알아야 하는 알짜만 골라내어 한눈에 한국사와 세계사를 알아보기 쉽게 엮은 정리 노트 《단숨에 읽는 글로벌 한국사》의 출간으로 화룡점정을 찍었다. 정리 노트만 읽어도 글로벌 한국사의 흐름을 꿰뚫을 수 있다! 글로벌 한국사 시리즈는 인류의 탄생부터 바로 얼마 전인 2007년까지 세계사 속의 한국사 전체를 성실히 담아내다 보니 그만큼 읽어야 할 분량이 적지 않다. 그래서 글로벌 한국사 편집위원회는 독자들이 방대한 인류사를 접하면서도 순간의 역사에 함몰되지 않도록 수천 년 역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만을 골라내어 전체 시대 구성에 맞도록 재정리하여, 세계사와 한국사의 유구한 흐름을 읽어 내면서도 그때그때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조망할 수 있도록 정리한 《단숨에 읽는 글로벌 한국사》를 펴내어 글로벌 한국사 시리즈에 덧붙였다. 이 정리 노트의 기본 구성은 글로벌 한국사의 구성을 그대로 축소한 것이다. 1~5권의 각 권의 내용을 하나의 부로 구성하고, 각 권에 속한 부를 장으로 구성하면서 각 권과 부의 내용을 압축해 정리했다. 이를 통해 독자는 글로벌 한국사의 시대 구성을 따라가면서 각 시대의 중요한 사건과 역사적 맥락 그리고 결과물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글로벌 한국사가 지향하는 세계사 속 한국사의 위치, 한국사와 세계사의 관계 등을 그대로 파악해 가며 역사를 읽어 낼 수 있다. 《단숨에 읽는 글로벌 한국사》는 글로벌 한국사 다섯 권을 읽은 다음에 읽어 보면 방대한 역사 속에서 놓쳤던 역사적 흐름과 주요 사건의 배열을 다시금 정리할 수 있을 것이며, 반대로 먼저 읽을 경우에는 인류사의 전체 흐름을 미리 머릿속에 그려 본 다음에 각 권에 반영된 역사를 읽어 가며 개개의 역사를 좀 더 정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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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맛있는 한국사 인물전
양창진 | 이숲 | 2013-12-28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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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맛있는 한국사 인물전
양창진 | 이숲 | 2013-12-28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미처 몰랐던 한국사 인물들의 숨은 이야기
어린 시절 우리는 서구 제국주의가 남긴 탐험과 정복과 표류의 기록들을 읽으며 자랐다. 콜럼버스, 하멜, 로빈슨 크루소, 걸리버,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전사와 모험가, 선교사의 이야기가 지금도 추억의 한 대목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도 그에 못지않은 흥미진진한 표류기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혹은 국경을 넘어 서역을 정벌한 사람의 이야기는 어떠한가? 나폴레옹과 한니발이 고작 해야 ‘한 번’ 넘은 알프스는 해발 2,500미터 내외의 산이지만, 우리나라 고선지가 ‘수시로’ 넘나들었던 파미르 고원은 무려 4,500미터에 이른다. 그가 세계 문명 교류사에 큰 획을 그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또 요즘 일이라고 여기는 ‘낙하산 인사’가 과거 우리 역사에 버젓이 있었다는 사실도 놀랍지 않은가? 그 외에도 고려나 조선 시대에는 다양한 방식의 신분 이동이 있었다. 미천한 신분의 제약을 극복하고 스스로 운명을 바꾼 사람도 있었고, 성차별이 일반화된 당시 상황에서 남성과 경쟁하여 당당히 자신의 꿈을 펼쳤던 여인도 있었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으로 사라져간 사람들. 교과서에서 배운 선택적 지식으로는 알 수 없었던 역사 속 인물들의 생생한 이야기 스물여섯 편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역사의 인물이 우리 삶을 바꾼다 모든 역사는 인물의 역사이고, 모든 역사 자료는 인물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다. 그것은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가 바로 인간이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같은 맥락에서 보자면, 역사적 인물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는 것과 같다. 따라서 한국사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입체적인 이해야말로 ‘살아 있는’ 한국사를 이해하는 필수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역사와 인물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지식의 지평을 넓힌다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학창 시절 학교수업을 통해 다양한 역사적 인물에 대해 배우지만, 대부분 그 지식은 단편적이거나 표면적이다. 그래서 학교를 졸업한 후에 위인의 전기를 읽고, 그들의 삶과 시대적 상황을 돌아보는 이가 예상 외로 많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역사적 인물의 삶을 전범으로 삼아 자신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이러한 욕구는 때로 인생의 큰 성공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처럼 역사의 인물이 시대를 가로질러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고 하겠다. 우리 역사의 엉뚱한 사건들 이 책은 인물과 일화를 주제에 따라 분류하여 독자가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여기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과 다양한 인물의 일화는 참으로 엉뚱하고 놀라워서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진 독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인물의 심리적 배경이 눈앞에 선연히 떠오르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런 방식의 인물전이 지닌 장점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익히 아는 인물과 주요 사건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는 데 있다. 흔히 우리가 주목하는 거대 담론보다는 어쩌면 ‘사소하게’ 여길 수 있는 엉뚱한 사실들을 통해 시대정신을 짚어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주입식·암기식 역사교육에 싫증을 느끼는 청소년에게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맛있는’ 역사 교양서가 될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된 일화 가운데 몇 가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이 질문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대답을 할 수 있을까? ● 혜초는 어떻게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까? ● 강홍립의 묘는 왜 신림동 주택가에 있을까? ● 궁녀 고대수는 왜 개화파의 거사에 가담했을까? ● 김종서 장군은 왜 자주 곤장을 맞았을까? ● 궁녀 김개시는 정말 선조와 광해군 두 임금의 사랑을 받았을까? ● 천민이었던 끝남이, 얼동이, 더퍼리는 어떻게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었을까? ● 우리나라 국왕 중 가장 오랜 기간 왕위에 있던 사람은 누구일까? ● 충선왕은 왜 세계의 지붕이라는 티베트 오지까지 쫓겨갔을까? ● 피타고라스 정리를 푼 조선의 수학자는 누구일까? ● 추사 김정희는 왜 이름을 503가지나 가지게 되었을까? ● 세종의 며느리 봉씨는 정말 동성애자였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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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문밖에서 부르는 조선의 노래
이은식 | 타오름 | 2013-03-12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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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문밖에서 부르는 조선의 노래
이은식 | 타오름 | 2013-03-12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노비, 궁녀, 서얼 등 시대가 외면한 자들이 노래하는 또 다른 조선의 역사!
소외된 시대 속에서 빛나는 역사를 만들다 문밖에서 부르는『조선의 노래』. 시대가 외면한 자들, 노비, 궁녀, 서얼…. 그들은 그들이 살던 조선이라는 신분 사회에서 외면당하고 멸시받던 계층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슬픈 환경 속에서도 좌절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이겨 나갔다. 이 책은 시대가 외면한 이러한 자들이 노래하는 또 다른 조선의 역사를 보여준다. 이 책은 노비와 궁녀, 서얼이라는 세 가지 주제로 나누어져 있다. 천출이라는 신분의 굴레를 뛰어넘어 자신의 꿈과 역량을 펼친 반석평과 유극량, 한을 사랑으로 풀어낸 궁중 여인들 숙빈 최씨와 소빈 노씨, 숙명적일 수밖에 없었던 서얼의 신분에서 세상으로 나간 신유한과 이달 등이 이 책을 통해 소개된다. 저자 특유의 필체를 통해 당시 시대로부터 주목받지 못한 신분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드라마를 사실감 넘치게 펼친다. 직접 발로 뛰어가 찾아낸 생생한 자료들을 통해 우리의 숨겨진 역사를 읽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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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신라 천년사
한국인물사연구원 | 타오름 | 2013-02-26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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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신라 천년사
한국인물사연구원 | 타오름 | 2013-02-26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신라 천년사』는 전설과도 같은 992년 신라의 역사를 혁거세 거서간의 탄생 신화부터 제56대 마지막 왕조의 이야기까지 연대별로 풀어냈다.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작은 나라 신라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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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신복룡 교수의 이방인이 본 조선 다시 읽기
신복룡 | 풀빛 | 2013-09-02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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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신복룡 교수의 이방인이 본 조선 다시 읽기
신복룡 | 풀빛 | 2013-09-02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신복룡 교수의 이방인이 본 조선 다시 읽기. 백년 전의 한말 풍운을 되돌아보면서 지금을 반추해 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취지이며, 특히 그 당시 이땅을 찾아온 서구인들의 시각을 통해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되짚어 보려는 것은 역사의 윤회가 주는 교훈 때문이다. 그들의 글과 사진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빛바랜 자화상을 되돌아봄으로써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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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영조의 세 가지 거짓말
김용관 | 올댓북(오이북) | 2013-09-20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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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영조의 세 가지 거짓말
김용관 | 올댓북(오이북) | 2013-09-20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조선시대를 뒤흔든 출생의 비밀을 밝히다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다.” 조선시대를 뒤흔든 유언비어의 실체는 무엇인가? 중고등학교를 보내면서 탕평책으로 인재를 고르게 등용시키고, 개혁통치를 실시했던 영ㆍ정조 시대에 대해 배우면서 영조와 정조가 조선시대의 왕으로서 얼마나 훌륭했는지 끊임없이 배워왔다. 그러나 정실 왕비의 적자가 아닌 무수리의 자식이라는 핸디캡을 누르고 왕의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몰아야 했던 영조의 이면에는 또 다른 아픔과 고통이 뒤따랐을 것이다. 특히 영조가 통치하는 기간 동안 영조를 압박하고 왕의 권위를 떨어뜨리려고 했던 사건들이 일어났다.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다.” 절대 권력의 권좌를 뒤흔드는 이 유언비어는 조선시대를 뒤흔들었을 뿐만 아니라 반란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특히 영조의 아버지 숙종과 닮지 않았다는 사실은 영조 스스로도 자기 자신의 방어막을 치게 만들었고, 이런 면면들이 실록의 곳곳에 숨어 있다. 18세기 조선을 52년간 통치하면서 탕평책, 균역법 등의 시행으로 개혁통치를 실시했던 영조는 평생을 세 가지 거짓말과 싸워야 했다. ‘왕실의 혈통이 바뀌었으니 바로 잡아라!’라는 선의왕후의 언문교서로 1728년 이인좌 난이 일어나면서 20만 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숙빈 최씨와 김춘택의 정략적 결합으로 태어났다는 영조 탄생의 유언비어는 조선을 뒤흔들었고, 이런 출생의 콤플렉스 때문에 형을 죽이고 아들 사도세자를 죽여야 했을까? 저자는 긴 시간 동안 실록을 파헤치고, 여러 자료를 꼼꼼히 살펴보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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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왕의 여자
김종성 | 역사의아침 | 2012-07-19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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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왕의 여자
김종성 | 역사의아침 | 2012-07-19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500년 조선, 그 내밀한 역사의 새로운 탐닉!
조선을 읽는 또 하나의 키워드! 왕후ㆍ후궁ㆍ궁녀, 그들의 삶을 클로즈업하다 조선 왕의 여자라 할 수 있는 왕후, 후궁, 궁녀의 모든 것을 소개하는 책으로, 이들의 다양한 기원, 자격, 선발 과정, 인원, 직무, 품계, 사랑, 출산 등을 각종 표와 통계를 함께 제시하며 이야기하고 있다. 사료를 근거로 하여 있는 사실을 ‘분석’하고 ‘정리’한 이 책은 독자들로 하여금 텔레비전이나 영화 등을 통해 막연히 알고 있는 ‘그녀’들의 삶에 가까이 접근하여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 역사에서 소외되어 이미지로만 현존하는 조선 왕실사의 나머지 절반의 복원 시도 500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조선을 통치한 27인의 왕 옆에는 36인(후궁 출신 4인 포함)의 왕후와 101인의 후궁, 그리고 통계조차 낼 수 없는 수많은 궁녀들이 있었다.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는 한 명을 위해 존재했던 왕후와 후궁, 그리고 궁궐의 곳곳에서 그들의 손과 발의 역할을 했으며 때로는 눈과 귀의 역할까지도 한 궁녀들 모두는, 좁게는 조선 왕과 조선 왕실사의 한 부분이었으며 넓게는 500년 조선 역사의 한 축이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역사 기록에서 소외되어, 한정된 사서 기록과 약간의 증언, 개인의 문집과 몇 권의 문학작품 등에서만 찾을 수 있다. 또한 그렇게 남아 있는 기록들조차도 기록될 당시의 사회ㆍ정치적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왕후였지만 지금까지 후궁, 그리고 악녀로만 기억되는 장희빈(희빈 장씨)과 같은 역사적 희생양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에 투영되는 그들의 모습은 텔레비전 사극에서처럼, 약간의 역사적 사실에 상상이 더해진 하나의 가공된 이미지로 재생산되어 존재하게 되었다. 이 책은 현전하는 사료들의 분석과 정리를 통해, 여러 가지 연유로 우리 역사와 그 담론에서 소외되어 단지 이미지로만 남아 있는 왕후와 후궁, 궁녀의 다양한 모습과 일상의 복원을 시도하는 또 하나의 ‘미시사’다. 이들의 다양한 기원, 자격, 선발 과정, 유형, 인원, 직무, 품계, 사랑, 출산 등의 내용을 각종 표와 통계를 통해 제시하여 독자들이 좀더 구체화되고 객관화된 그리고 다양한 그들의 본모습을 가늠할 수 있게 하였다. 궁궐의 꽃이 될 수 없었던 노비, 궁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궁녀제도의 원형은 고려시대에 비로소 나타난다. 물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의 역사서에서 궁인 등의 명칭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하나의 제도로서 정비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고려 현종 때의 일이다. 궁녀제도는 조선에도 계승되어 여러 번의 정비를 거치면서 내명부 품계까지 부여된 하나의 완전한 제도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비록 예외적인 경우가 존재했지만, ‘관청의 노비(공노비)에서만 선발’된 그들은 어디까지나 궁궐에 예속된 ‘노비’였다. 궁인, 나인, 항아, 홍수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으며 지밀, 침방, 수방, 세수간, 소주방 등 궁궐의 각 처소에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했다. 그것이 궁녀가 존재한 이유다. 게다가 관념상 왕의 여자였던 그들은 입궁 후, 평생을 한 명만을 바라보며 독신으로 살아야 했다. 이는 어떤 이유로 궁궐을 떠나게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항상 조정 대신들과 왕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주상과 하룻밤을 같이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궁궐이라는 화려함 속에 그렇게 그들은 가려졌고 잊혀졌다. 왕자의 생산과 왕후를 보좌한 왕의 첩, 후궁 1910년 국권침탈 이후 후궁이 된 광화당 이완흥(이귀인)을 제외한 후궁들의 총수는 기록상으로 모두 101인이다. 정칙적인 목적에 의해 간택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선발되기도 했고, 승은을 입어 왕의 자녀를 생산한 궁녀 등이 후궁으로 책봉받기도 했지만, 일부일처제가 관념으로 자리 잡은 조선에서 그들은 ‘왕의 또 다른 부인’이라기보다는 명목상으로 내명부의 수장인 왕후를 보좌하는 존재였다. 그런 이유로 그들에게는 법으로 규정한 품계와 함께 품계에 따른 직무가 부과되었다. 물론 후궁제도를 법으로 규정한 본질적인 목적은 궁녀처럼 일을 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왕의 첩’을 합법적으로 궁궐 안에 두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후궁이 된 그들에게는 공통적인 꿈이 있었다. 그들의 꿈은 왕후가 되는 것이었으며, 주상의 자녀를 생산하는 것이었고, 자신이 생산한 자녀가 보위에 오르는 것이었다. 이를 모두 이룬 여인이 연산군의 모친인 폐비 윤씨와 인종의 모친인 장경왕후 윤씨, 그리고 경종의 모친인 장희빈이다. 하지만 세 명 모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자신의 자녀가 보위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폐비 윤씨와 장희빈의 경우는 생전에 왕후에서 폐위까지 되었으니 역사 기록에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후궁들이나 자녀가 왕이 되지 못한 왕후들에 비해 그들의 삶이 나았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내명부와 외명부의 수장이자 또 하나의 주상, 왕후 ‘좋은 가문’과 ‘좋은 품성’을 지닌 여인들 중에서 세 차례의 심사과정을 거쳐 선발된 조선의 왕후는 궁궐 여인들로 조직된 내명부와 관료들의 아내로 조직된 외명부의 수장으로 그 구성원들을 지휘하고 감독했으며, 대신들의 하례를 받는 등 그 위상이 또 하나의 주상과 다름없었다. 그들의 위상은 왕의 사후에도 계속되었다. 후궁은 왕의 사후 궁궐이 아닌 별도의 공간에서 생활해야 했지만 왕후는 왕실의 최고 어른인 왕대비가 됨으로써 위상과 권력이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새로운 왕의 등극을 승인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왕대비의 몫이었다. 게다가 새로 등극한 왕이 미성년인 경우에는 수렴청정을 통해 국정을 총괄하는 것도 왕대비, 혹은 대왕대비였다. 하지만 왕후들의 궁중생활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화려하고 안락한 것만은 아니었다. 철저히 유교적 여성관의 전형을 요구받은 왕후들은 평생을 인내해야 했고 정치적 격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또한 가장 사적인 순간인 남편과의 잠자리마저 공식적인 의례로 치러야 했으니 어쩌면 왕후라는 자리는 왕만큼이나 고독한 존재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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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유교ㆍ전통ㆍ변용
정두희 | 국학자료원 | 2012-05-2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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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유교ㆍ전통ㆍ변용
정두희 | 국학자료원 | 2012-05-2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미국의 역사 학자들이 보는 한국사의 흐름을 정리한 책. 1999년에 출판된 <미국에서의 한국사 연구>를 보완하여 새롭게 펴냈다. 이 책에서는 1974년부터 2001년 사이에 미국에서 출판된 한국사 연구 단행본 15권을 주제별로 묶어, 미국 학계의 경향이 체계적으로 드러나도록 서술하였다. 지난 번 책에서 다루었던 Wagner 교수의 조선초기 정치사에 대한 원고는 더욱 심층적으로 새롭게 썼으며, 나머지 10권에 대한 평은 그대로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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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윤치호의 협력 일기
박지향 | 이숲 | 2013-12-26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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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윤치호의 협력 일기
박지향 | 이숲 | 2013-12-26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윤치호를 통해 친일의 현실을 파헤치다
이 책에서 박 교수는 그동안 금기시되어왔던 한국의 친일청산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면서, 수년에 걸쳐 완독한 윤치호의 일기에 관한 책을 펴내게 된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친일파라는 표현이 행사하는 대단한 영향력에 비추어 볼 때 그에 대한 진지한 학문적 연구는 창피할 정도로 일천하다. (…) 최근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에 대한 보도를 들으면서 나는 유치하고 정략적인 정치 놀이가 아닌, ‘제대로 된’ 친일 청산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모든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당시 척박하고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선조들의 현실을 바라보자고 말하는 박 교수는 ‘현재의 잣대를 과거에 들이대고 선대 사람들을 비판하는 후손들의 오만함’에서 벗어나 윤치호라는 인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것을 독자에게 호소하면서, 친일문제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유지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극일(克日)’하는 길임을 역설한다. 한국사회의 원죄(原罪)와 같은 친일문제 해방 후 한국 사회의 ‘원죄’가 되어 버린 친일문제에서 자유로운 한국인은 없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한국사를 전공한 학자들마저도 불행했던 일제강점기를 충분히 연구하고 이해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 엄혹한 시대를 살았던 인물 가운데 ‘친일파’를 가려내는 작업이 얼마 전 《친일인명사전》이란 이름으로 그 결실을 보았다. 선정 기준을 두고 논란도 많았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당시 현실을 우리가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 친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혹시 우리는 민족개혁을 부르짖다가 마지막 순간에 일제의 핍박에 굴복하여 협력하게 된 민족주의자들을 일신의 영달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乙巳五賊)이나 악질적인 민족반역자와 똑같은 범주에 넣고 돌을 던지는 것은 아닐까? 혹시 우리는 당시 현실을 냉정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일제와 친일파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이 앞선 나머지 모든 일제 협력자를 무차별하게 단죄하는 너무 성급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닐까? 혹시 우리는 그 시대를 살았던 내 아버지와 조부와 고조부의 삶에는 눈을 감아 버리고, 우리가 합의하여 ‘친일’로 규정한 사람들에게만 돌을 던짐으로써 한국인으로서 자신의 원죄에 면죄부를 받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더구나 한번 낙인이 찍히면 영원히 오명을 쓰고 살아야 하는 이 주술적 힘을 가진 ‘친일’이라는 천형을 사적인 보복의 수단으로 삼는 일은 없었을까? 그리하여 역사가들이 흔히 말하듯, 현재의 잣대를 과거에 들이대고, 선대 사람들의 과오를 비난하는 ‘후손들의 오만함’을 저지른 적은 없었을까? 혹시 친일의 현실을 냉정하고 치밀하게 파헤치는 작업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바친 독립운동가 선열들의 희생에 조금이라도 누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연한 우려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유럽 저항 신화의 붕괴와 친일의 현실 1970년대 초 팩스턴(Robert Paxton)의 《비시 프랑스》라는 책이 출간되면서 식민지배 세력과 피지배 세력 간의 협력관계가 새롭게 조명되었다. 포스트식민주의의 주변부 이론은 제국의 운영이 근본적으로 식민지 협력세력의 존재에 달려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러한 상황은 4년간의 나치 지배기간 동안 프랑스에서도 다를 바 없었으나, 해방 후 집권한 드골은 마치 전 국민이 나치에 저항(resistance)했던 것처럼 역사를 조작하여 ‘저항의 신화’를 만들어 내었다. 그것은 해방 후 국가재건의 밑그림을 그리는 작업이었고, 특히 나치가 사리진 유럽의 세력 개편에서 프랑스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프랑스는 해방 후 숙청 과정에서 38,000명을 수감하고 1,600명을 실제로 처형하였는데, 처음에 협력자들의 숙청을 외쳤던 알베르 카뮈는 불과 1년 후에 숙청의 실패를 인정하면서 정의의 이름으로 인간을 파괴하는 현실에 환멸을 느꼈음을 고백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도 “점령된 프랑스에서는 살아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 억압의 묵인을 포함했다”고 지적하였으며, 시몬 베유(Simone Weil)도 그 시대의 복잡성을 이해하기는 너무 어렵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그 당시 상황은 “오늘날 사람들이 그리는 것처럼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무엇보다도 나치 점령기간 프랑스인들의 행적을 고발하고 조작된 저항의 신화를 무너뜨린 것은 마르셀 오퓔스의 다큐멘터리 영화 <슬픔과 연민>이었다. 이 영화는 비시 괴뢰정권 아래 프랑스인들의 삶은 대다수가 나치에 저항하고 소수가 협력한 것이 아니라, 소수만이 저항하고 대다수가 협력했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특히, 영화는 나치의 괴뢰정권이었던 비시정부의 수장 페탱에게 환호하던 똑같은 사람들이 해방군 드골에게 환호하는 모습을 그대로 비춰주면서, 당시 사람들이 대의를 따른 것이 아니라, 단지 승자 편에 섰을 뿐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로부터 시작된 1970년대 프랑스의 탈신화 작업은 영화와 책과 정치 담론 등을 통해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며, 이제 프랑스에서는 적어도 전시 협력문제로 누군가를 단죄하는 사례는 사라졌다. 우리나라 역시 해방 후 반민특위가 ‘참고서’로 사용했다는 <친일파 군상>은 전시에 황국신민서사를 부르고, 보국채권을 매입하거나 국방금품을 헌납한 자들을 모두 친일자, 전쟁협력자라고 부른다면 “국내에 거주한 조선사람들은 거의가 범좌자”가 된다며, ‘한계의 도를 무시’한 말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자발적 친일과 강압에 의한 친일을 구분하자면 만주사변과 특히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일제가 엄혹한 감시체제를 작동한 시점을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를 구분해야 할 것이다. 심지어 한국현대사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부르스 커밍스(Bruce Cummings)조차도 “재주 있는 한국인이 식민지에서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었겠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나서 “거부하고 인생의 기회를 포기하는 것, 저항하고 죽거나 감옥에 갇히는 것, 혹은 협력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었으리라고 결론짓는다. 반드시 해야 할 ‘제대로 된’ 친일청산 저자는 이 책이 프랑스가 경험했던 것과 같은 탈신화의 작은 노력임을 밝힌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친일’의 탈신화가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조금 덜 비겁해지고, 조금 더 진실해지며, 조금 더 서로를 배려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제대로 된’ 친일청산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한 예로서 윤치호를 소개하는 저자는 친일파 거두의 한 사람으로 당연시되는 윤치호만 놓고 보더라도 인명사전의 몇 줄 기사나 보고서 몇 쪽으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삶의 복잡함과 다면성에 부딪힌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런 복잡함과 다면성을 제대로 알고 난 후에야 그를 감히 재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저자는 진지하고 심도 있는 학술적 연구를 통한 '제대로 된' 친일청산을 촉구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지금까지 금기시되었던 친일문제를 해결하고, 일본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임을 역설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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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공주실록
신명호 | 역사의아침 | 2012-06-22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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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공주실록
신명호 | 역사의아침 | 2012-06-22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그 누구보다 화려하고 행복하게 살았을 것 같으나 사료에 기록조차 되지 못한 공주들의 역사 최초 복원!
공주는 최고의 권력자인 왕의 딸이다. 또한 전국의 처녀들을 대상으로 시행된 간택에서 최종 선택된 왕비의 딸이기도 하다. 그런 왕과 왕비에게서 태어났으니 공주는 분명 빼어난 지성과 미모를 가졌으리라 상상되곤 한다. 게다가 공주는 왕과 왕비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는 존재였으니 세상에 부러울 게 하나도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들의 삶은 언제든지 수단화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조선의 많은 공주들이 국익이라는 이름 아래 개인적 삶을 희생당했다. 이 책에서 저자 신명호 교수는『조선왕조실록』은 물론 각종 사료와 묘지명 그리고 정황 등을 비교, 조사하여 그동안 자료와 관심 부족 등을 이유로 단 한 번도 다루어지지 않은 조선시대 공주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최초로 복원해냈다.『조선왕비실록』에서 역사 기술의 관점을 왕비, 곧 여성으로 바꿈으로써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킨 신명호 교수가 이번에는 누구보다 화려하고 행복하게 살았을 것 같으나 사료에 기록조차 되지 못한 조선시대 공주들의 모습을 정교하고 치밀하게 재조명해낸 것이다. 그 대상으로는 조선왕조 500년간 총 116명이나 되는 공주들과 옹주들 중에서 왕의 딸이기에 겪어야 했던 삶의 모습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7명을 선별했다. 조선시대 부마간택의 역사적 연원이 된 정선공주와 왕의 딸이라는 이유로 권력투쟁에 휘말렸던 경혜공주, 정명공주, 효명공주, 화완옹주 등의 삶을 깊이 있게 살펴보았으며, 국익을 위해 다른 나라에 인질로 잡혀가야만 했던 의순공주와 덕혜옹주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조선시대 공주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이 책에서는 지성과 미모, 부귀와 영화, 사랑과 명예 등 모든 것을 가졌으리라 생각되는 조선시대 공주들의 실제 삶은 어땠는지, 왜 그렇게 살아야 했는지, 그런 삶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지 등을 깊이 있게 살펴보았다. 부왕인 태종의 뜻에 따라 과부의 아들과 혼인했으나 부부관계가 단절돼 갖은 어려움을 겪은 정선공주, 계유정난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남편과 친동생 단종을 잃고 노비로까지 전락한 경혜공주, 왕실 저주사건에 연루되어 서궁에 유폐되었으나 불우한 자신의 처지를 서예로 승화시킨 정명공주, 인조의 편애를 받으며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보냈으나 저주혐의로 어머니와 남편을 잃고 귀양에 처해진 효명공주,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 섭정왕 도르곤에게 시집보내기 위해 효종의 양녀로 공주에 봉작된 의순공주, 어린 세손(정조)을 편집증적으로 아꼈으나 후일 정조의 최고 라이벌이 되어 사사건건 대립한 화완옹주, 14세 때 일제에 의해 강제로 도쿄로 유학 갔다가 대마도 번주 종무지와 정략적으로 결혼한 덕혜옹주 등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그 외의 공주들과 옹주들도 간략하게나마 부록에서 정리했다. 남성 중심의 역사에 가려진 공주들의 역사! 지금까지 조선시대 왕의 딸들, 곧 공주에 관한 단행본은 한 권도 출간되지 않았다. 의순공주와 덕혜옹주를 다룬 글이 몇 편 있지만 본격적인 평전과는 거리가 있다. 왕의 딸들에 관한 대중의 관심과 궁금증이 적지 않은데 어떻게 그와 관련된 연구 성과가 이렇게나 없을까. 그런 와중에 일본 학자가 덕혜옹주를 다룬 전문 연구서를 출간했고 그 연구서를 한국 학자가 번역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가장 큰 이유는 그간 조선의 왕실사람들이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해서였다. 요즘 들어 그런 경향이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주로 왕, 세자, 왕자 등에 주목했을 뿐 공주들의 역사는 살펴보지 않았으며, 막상 재조명하려 하다가도 자료의 한계 때문에 포기하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왕의 딸들을 대상으로 하는 개설서 한 권쯤은 낼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서 저자는 이 책을 집필했다. 이 책을 쓰는 동안 저자가 마주친 가장 큰 어려움 또한 자료의 한계였다. 공주와 옹주는 왕의 딸들임에도 관련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저자는『조선왕조실록』은 물론 각종 사료와 묘지명 그리고 정황 등을 샅샅이 조사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기록조차 되지 못한 역사 속 여성들에 대한 관심과 조명이 한층 더 깊어지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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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기담
이한 | 청아출판사 | 2013-01-18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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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기담
이한 | 청아출판사 | 2013-01-18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추천!>장기 절도사건, 방화사건, 술을 강요한 임금님, 연애소설을 돌려본 선비들,
종이로 은을 만드는 사기꾼, 여염집의 여자를 성희롱한 성균관 유생들….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낸 사건들을 흥미롭게 재구성하였다. 현대와 다를 바가 없는 15세기의 조선으로 이제부터 여행을 떠나자.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은 뜻밖의 사건들 조선의 왕과 신하, 기묘한 사건을 논하다! 21세기와 다를 바가 없는 15세기의 조선 태평성대로 알려진 세종의 시대 때 한성의 5분의 1이 불타버리는 대화재가 벌어졌는가 하면, 개혁군주로 알려진 정조가 사실은 굉장히 고리타분한 성격에 신하들에게 술을 강권하기도 했다. 사람 쓸개를 빼 간다는 뜬소문을 믿고 부화뇌동한 사람들이 있었으며, 종이로 은을 만들어낸다는 사기꾼도 있었다. 또한 성종은 우리나라에서 후추를 재배하겠다며 후추씨구매원정단을 만들기까지 했고, 근엄한 중신이 과거에는 바바리맨의 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폴터가이스트 현상, 인간의 장기 절도사건, 사이비종교의 창궐, 성추행범 등 온갖 기기묘묘한 사건들은 현재에도 벌어지는 일들과 다를 바가 없다. 더군다나 야사처럼 보이는 이 사건들은 모두 조선왕조실록에서 기록되어 있는 것들이다. 흥미진진하고 재밌으며 때로 엽기적이고 황당하기까지 한 조선 사회의 이면을 파헤친다. 뜻밖의 사건들로 가득한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까지 근 500년간 일어났던 사실을 왕의 치세별로 기록한 것으로, 그 수준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뛰어나다. 실록에는 왕의 위대한 치정이나 정치적인 사건들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파장을 끼친 사건들이 때로는 소소하게, 때로는 자세한 정황까지 그대로 담겨 있다. 《조선기담》에서 수록하고 있는 사건들은 기존에 쉽게 만나보지 못한 실록의 또 다른 면을 쏙쏙 찾아내어 현실적으로 풀어낸 것이다. 왕과 신화들의 유쾌한 대화, 나라를 뒤흔든 엽기적인 사건들을 자세하게 재구성하였으며, 실록에 수록된 대화나 보고서 등을 그대로 수록하여 정확성을 더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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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도 몰랐던 조선
신봉승 | 청아출판사 | 2013-01-1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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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도 몰랐던 조선
신봉승 | 청아출판사 | 2013-01-1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조선왕조 5백년> 극작가 신봉승이 전하는
조선사의 숨겨진 행간 읽기! 조선 500년 역사를 이은 27명 왕들의 치세, 그 속에 어우러진 신하와 선비들, 새로운 세계를 꿈꾼 사상가들, 그리고 유교 사회에서 살아야 했던 비운의 여인들까지. 이 모든 사람들이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이룩했다. 극작가 신봉승의 붓끝에서 펼쳐지는 조선의 진짜 모습, 500년 역사의 행간에 숨어 있는 진짜 조선을 만나자. 역사에세이를 통한 역사읽기의 즐거움 조선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통해 새로운 조선을 발견한다. 저자는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가 몰랐던 조선의 모습을 재발견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갖는다. 단순히 조선을 유교국가, 왕이 다스린 500년의 역사라고만 인식하기 쉽다. 그러나 그 안에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수많은 사건과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한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발견하는 것이 바로 역사읽기의 새로운 즐거움이다. 이 책에 실려 있는 50여 편의 에세이는 저자가 조선을 주제로 한 에세이들을 엮은 것이다. 조선왕조 개창의 비화, 국보 1호 숭례문의 수모, 우리가 왜곡되게 알고 있었던 이이의 10만 양병설의 진실, 정약용의 <애정양>에 얽힌 이야기, 1세대 개화사상가의 활약과 근대화에 미친 영향, 그리고 조선 마지막 왕의 유조를 통해 우리가 조선에 대해 미처 알지 못했거나, 혹 알았더라도 잘못 알고 있었던 것들을 바로잡는 기회가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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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시대 농업사 연구
한국농업사학회 | 국학자료원 | 2012-05-29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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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시대 농업사 연구
한국농업사학회 | 국학자료원 | 2012-05-29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이 책은 한국농업사학회가 지난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인 연구자들이 동아시아농업사학회에서 발표한 연구논문들을 저자들의 협조를 얻어 다시 수집. 정리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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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을 뒤흔든 아버지와 아들
이종호 | 역사의아침 | 2012-04-2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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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을 뒤흔든 아버지와 아들
이종호 | 역사의아침 | 2012-04-2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조선을 뒤흔든 아홉 쌍의 아버지와 아들, 그 숙명의 역사를 파헤치다!
아버지와 아들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떼려야 뗄 수없는 관계다. 그들은 불가분의 관계여서 칭송과 악평을 함께 듣기도 한다. 주어진 역할과 과제, 그 책임에서도 스승과 제자, 군주와 신하 등 다른 어느 경우보다 막중하다. 그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느냐에 따라 자신의 인생은 물론, 시대와 역사의 방향이 달라진다. 최근 역사의아침에서 출간된 『조선을 뒤흔든 아버지와 아들』에는 아홉 쌍의 아버지와 아들이 등장한다. 송사련-송익필, 이원수-이이, 허엽-허균, 선조-광해군, 인조-소현세자, 송갑조-송시열, 윤선거-윤증, 김수항-김창집, 박지원-박종채-박규수가 그들이다. 모두가 부자관계에 관한 이야기지만 아버지의 잘못으로 인해 고통받은 아들, 너무나 유명한 아들 때문에 묻혀버린 아버지, 자질과 인격에서 서로 대비되면서도 동질적인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의 실수로 광포한 권력의 희생양이 된 아들, 제3자의 언어로 인해 죽고 죽이는 데까지 이른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의 뜻을 고집스럽게 지키다가 갈등과 파멸을 낳은 아들, 아버지 때문에 존경하는 스승을 배반한 아들, 아버지의 유훈을 소홀히 하여 비극을 되풀이한 아들, 3대에 걸쳐 가학家學을 키워간 할아버지-아버지-손자 등 그 양상은 모두 다르다. 지난 10여 년간 주로 역사 인물에 관한 글을 써온 저자는 이 책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기묘사화, 신사무옥, 을사사화, 기해예송, 경신대출척, 기사환국, 갑술환국, 신임사화, 갑신정변, 임술민란 등 역사 속의 굵직굵직한 사건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자세하게 살펴보고, 나아가 부자관계를 성공적으로 유지해나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부자관계로 재조명한 새로운 조선사! 그들은 과연 조선 역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이 책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은 모두 조선시대 사람들이이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의 이야기가 더 이상 과거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현재 우리 주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고, 앞으로도 일어날 수 있는 사례들이다. 역사 속의 이야기를 과거의 것으로만 돌린다면 우리는 역사에서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 인간의 삶은 시대와 장소를 넘어 보편적인 면이 있기에 지난날의 일도 현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최근 들어 책뿐만 아니라 드라마, 영화 등에서 우리 역사를 소제로 한 작품들이 많이 눈에 띄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군주와 신하, 스승과 제자, 친구, 연인 관계 등 지금까지 다루어진 내용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에 초점을 맞춰 조선사를 새롭게 바라보았다. 각기 다른 듯하면서도 얽혀 있는 아홉 쌍의 아버지와 아들.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복잡한 그들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만나보자. ① 송사련-송익필 : 아버지의 잘못으로 인해 고통받은 아들 송익필은 예학에 밝았고 그것을 중시하여 생활에서 예를 엄격하게 지키며 살려고 했다. 그런 그를 괴롭힌 것은 역설적이게도 예를 저버린 아버지 송사련의 그릇된 처신이었고, 그것은 그의 일생을 바꾸어놓았다. ② 이원수-이이 : 너무나 유명한 아들 때문에 묻혀버린 아버지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에 대한 행장은 지었으면서도 아버지 이원수의 행장은 짓지 않았다. 행장이 돌아간 어버이에 대한 추모와 존경의 뜻으로 마련되는 것임을 감안할 때 문제는 제법 심각해진다. ③ 허엽-허균 : 자질과 인격에서 서로 대비되면서도 동질적인 아버지와 아들 허엽과 허균은 삶의 궤적에서 순응과 거부라는 아주 대조적인 면을 보여준다. 허균에게서 나타나는 거부의 자세가 너무나도 순응적인 아버지에 대한 반발에서 왔다고 애써 추론하고 싶을 정도다. ④ 선조-광해군 : 아버지의 실수로 광포한 권력의 희생양이 된 아들 장자가 아니었고, 적자도 아니었기에 부왕 선조에게 물려받은 광해군의 권력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굳건히 하기 위해 본의든, 타의든 형과 동생을 죽이고 자신의 잠재적 경쟁자들을 경계해야 했다. ⑤ 인조-소현세자 : 제3자의 언어로 인해 죽고 죽이는 데까지 이른 아버지와 아들 소현세자의 1차 귀국 때 인조의 태도는 써늘했다. 부왕의 귀에 전달된 언어와 그에 따라 움직인 그의 생각이 아들을 대하는 태도에 이처럼 장애를 일으킨 것이다. 소현세자는 인조에게 점점 낯설고 위협적인 존재로 변해가고 있었다. ⑥ 송갑조-송시열 : 아버지의 뜻을 고집스럽게 지키다가 갈등과 파멸을 낳은 아들 송시열은 노년에 이를수록 아버지에게서 전수받은 주자학에 대한 신념을 더욱 확고하게 다져갔다. 그는 주자학 외의 유학은 모두 ‘사문난적’이라고 하여 배척했다. 그의 이러한 태도가 당시의 학문 조류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⑦ 윤선거-윤증 : 아버지 때문에 존경하는 스승을 배반한 아들 윤증은 아버지라는 그 대체 불가능한 존재를 위해 힘들지만 사방으로 뛰며 변호에 나섰다. 그런데 얼마 후 그도 세인들의 논란에 휩싸이게 된다. 노소론의 정파 싸움으로 그것이 비화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⑧ 김수항-김창집 : 아버지의 유훈을 소홀히 하여 비극을 되풀이한 아들 김수항은 김창집을 비롯한 자식과 후손들에게 항상 겸손하게 물러나려는 뜻을 가지라는 유언을 남겼다. 자신의 운명을 되돌아본 데서 나온 뼈저린 가르침이었으나 김창집과 그 자손들은 이를 준수하지 못했고, 그로 인한 여파는 참으로 엄청났다. ⑨ 박지원-박종채-박규수 : 3대에 걸쳐 가학家學을 키워간 할아버지-아버지-손자 공자나 박지원 모두 그 학문이 아들을 거쳐 손자 대에 이르러 세상에 더욱 크게 드러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간 고리인 아버지로서의 박종채가 없었다면 할아버지 박지원의 학문은 결코 손자 박규수에게 전승되지 못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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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메멘토모리
정구선 | 애플북스 | 2011-01-20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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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메멘토모리
정구선 | 애플북스 | 2011-01-20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06)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은 조선시대 자살 사건!”
왕실을 둘러싼 자살에서 민초들의 자살까지 조선시대 비극적인 죽음을 기억하라! - 조선이 숨긴 ‘자살’을 말하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얻을 만큼 대한민국의 자살률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최근 ‘행복 전도사’ 최윤희 씨의 자살을 포함해 전직 대통령의 자살,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 기업인들의 자살, 정치인들의 자살 등 공인들의 자살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사회 전반에 생명 경시 풍조 또한 팽배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자살은 어땠을까? 인조 대의 문신 ‘홍호’는 마음가짐에 따라 자살을 세 가지 등급으로 나뉘었다. 가장 높은 등급은 인仁을 이루고 의義를 취하기 위해 자살하는 것, 그다음 등급은 비분강개하여 자기 몸을 희생하는 것, 마지막 등급은 형세가 반드시 환난을 면할 수 없음을 알고 자결하는 것이 그것이다. 머리카락 한 올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유교적 신체관 때문에 자살을 죄악시하는 전통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 자살은 비일비재했다. 왕족으로 태어나 왕으로 추대되었다 하여 자결을 강요받은 인성군 이공,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어 자결의 길을 택한 유성원, 기묘사화 후 남편이 사약을 받고 죽자 남편의 명예 회복을 위해 따라 죽은 김정의 부인 송씨,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막아내지 못해 몸을 던진 신립 장군 등 자살은 예나 지금이나 다양한 이유와 다양한 방법으로 계속되어왔다. 조선이 만든 비극적인 자살을 통해 조선을 다시 보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처럼 삶, 돈, 사랑 등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나 욕심에서 비롯된 개인적인 이유에서의 자살보다는 정치적인 이유, 체제 저항의 수단, 또는 절개를 지키기 위한 이유에서 죽음의 길을 택한 자살이 많았다. 대게 조선의 집권층인 양반 사대부들은 정치적으로 패배하거나 역모에 실패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당쟁으로 억울하게 목숨을 끊기도 했다. 또 힘없는 백성들은 체제 저항의 수단으로 죽음을 택했으며, 여성들은 관리들의 착취에 저항하고 정절을 지키려고 세상을 등졌다. 저자는 ‘왕실을 둘러싼 자살, 정치적 패자들의 자살, 여인들의 자살, 전쟁터에서의 자살, 권력에 저항한 약자들의 자살’로 구성해 비극적인 조선시대 자살을 다루고 있는데, 특히 왕실이나 정치적 패자들의 죽음보다 여성들의 죽음과 전쟁터에서의 죽음 그리고 민초들의 죽음을 재조명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어 신숙주의 부인 윤씨의 자살은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 있지만 남편 신숙주가 성삼문 일행을 배반하고 살아남은 것을 부끄럽게 여겨 자살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또 군역으로 인한 고통으로 자살할 수밖에 없었던 민초들의 죽음, 조선 초기에 중국에 바쳐야 했던 공녀들의 자살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공녀로 차출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확률이 높았고 돌아온다 하더라도 시집을 가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중국으로 가지 않으려 통곡하다 죽거나 구덩이에 몸을 던진 것이다. 한 시대를 이끈 왕실을 둘러싼 자살뿐 아니라 이처럼 민초들의 자살까지,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으로 조선시대 자살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또 역사에서 배제되었던 혹은 잘 드러내지 않았던 비극적인 자살 사건을 통해 조선시대의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일면을 알아보고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정치적이면서 사회적인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알려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살 뒤에 가려진 사회문제를 통해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고 아직도 의문으로 남은 조선시대 자살에 대해 낱낱이 파헤친다. 조선이 버린 자들의 죽음을 기억하다 _ 왕실을 둘러싼 자살 사건, 광해군의 세자 ‘이지’ 조선시대에는 왕족 및 권력의 암투에 희생당한 비극적인 죽음이 많았다. 광해군 15년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을 왕으로 세운 정변인 인조반정으로 폐세자가 된 이지는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정치적 이유로 세자의 자리에서 쫓겨나 폐세자로 떨어진 비운의 인물 중 유일하게 자결한 사람이다. 그로 인해 아내인 폐비 박씨 그리고 폐비 박씨의 아버지 박자흥, 박자흥의 아버지 박승종까지 자결하게 된다. _ 정치적 암투와 그 패자들의 죽음, 유영경 조선시대 당파 싸움은 굉장히 치열했다. 각 당파는 상대 파를 용서하지 않고 아예 뿌리를 뽑아버려야 직성이 풀릴 정도였다. 유영경은 당시 소북파의 영수였는데, 대북파와 세자 문제로 심한 마찰을 빚었고, 막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다 선조가 갑자기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대북파에 의해 자결하라는 명을 받는다. 그러나 죽음으로도 당쟁이 끝나지 않을 만큼 조선 사회를 갉아먹은 주된 폐해인 당쟁으로 인한 자살 사건을 알려준다. _ 여인들의 한스러운 자결, 김정의 부인 송씨 남성들에게 사회, 정치적 명예가 중시되었듯 조선의 여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명예는 정절이었다. 이를 지키지 못할 위기에 처하거나 몸을 더럽혔을 때 선택한 자살은 뭇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으며 열녀문을 세워주는 등 나라에서 은전을 내리기까지 했는데 이 장에서는 정절을 지킨 여성뿐 아니라 의로운 죽음을 택한 여성들의 자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조광조와 함께 사림파의 중심인물로, 폐출된 중종의 왕비 신씨의 복위를 주장했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고 기묘사화로 인해 유배되고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아 김정이 억울하게 죽자 남편의 명예 회복을 위해 남편을 따라 김정의 부인 송씨의 자살 등. 정난정, 장희빈, 화순옹주, 박문랑, 황해도의 열녀 126인의 자결에 대해 재조명하고 있다. _ 전쟁터에서의 의로운 결단, 신립, 신급 형제 전쟁터에서의 죽음은 수도 없이 많지만, 의로운 결단으로 자살한 경우는 흔치 않다.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적을 막아내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상황에서 몸을 던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무예 닦기를 좋아한 신립 장군은 1592년 임진왜란 때 고니시를 선두로 한 왜군이 대대적으로 공격해 수적 열세로 포위되어 참패를 당하자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스스로 남한강에 뛰어들어 순절했다. 그의 형인 신급도 적병을 만나 쫓기다 절벽해서 투신했다. _ 민초들의 마지막 선택, 군역으로 인한 죽음 요즘 병역 기피 문제가 이슈가 되고 있지만 요즘과는 달리 조선시대의 군역의 고통은 자신의 목숨과 일가족의 생계가 걸린 일이었다. 조선 중종 때에는 병사와 수사의 횡포 때문에 자살하는 수군들이 많았고, 또 군대에서 번을 서는 대신에 바치던 돈인 번가의 독촉도 매우 심했다. 그 고통과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처자를 이끌고 목을 매거나 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권세가들이 글을 읽는 동안, 힘없는 백성들은 군역을 질 수밖에 없던 조선시대의 민초들의 고통을 알려주고 있다. _애도할 수만은 없는 죽음, 시역 사건과 간통 지금도 뉴스를 장식하는 끔찍한 사건들, 예를 들면 패륜아나 간통과 관련한 사건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계모와 재산 다툼을 벌이다 자살한 이가 있는가 하면 몽둥이로 제 어미를 때려죽인 후 자살한 이도 있었다. 또 사노가 주인집 처녀와 사통하여 자식을 낳고 자살한 사건 등, 슬퍼할 수만은 없는 자살 사건에 대해 살펴본다. 또 자신의 실수나 실패를 불명예로 여겨 할복자살하는 것을 명예로 여기는 조선 땅에서 자살한 일본인들의 이야기도 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