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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다시 읽는 삼국사 3 - 나당연합과 발해
이윤섭 | 책보세 | 2014-01-21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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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다시 읽는 삼국사 3 - 나당연합과 발해
이윤섭 | 책보세 | 2014-01-21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6-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5 지원기기:
닫힌 역사에서 열린 역사로, 우리 역사 바로 알기
구한말 서양 열강과 일제가 동아시아에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는 가운데 자강(自彊)에 실패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이후 제국주의 열강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으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식민지가 되었던 많은 민족이 해방을 맞이하였다. 우리도 일제로부터 독립하여 민족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였으나 주체적으로 일제를 몰아내지 못하고 초강대국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어 결국 1948년 두 개의 국가가 탄생했다. 반면 서양 열강과 일제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여 ‘병든 돼지’로 경멸받던 중국은 공산당 집권 이후 강대국으로 인정받았고 일본도 미국에 이어 두 번째 경제대국으로 화려하게 부활하는 데 성공하였다. 구한말 러시아, 청, 일본, 미국 등 4대 열강에 둘러싸였던 국제정세는 오늘날 고스란히 재현되었다. 하지만 구한말과는 차이가 있다. 일본군 1개 연대조차 당해내지 못할 수준의 국력을 가졌던 대한제국과는 달리 대한민국은 비록 주변 4대 강국에 비해 현격한 약세를 보이고는 있어도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조금이나마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국력이 미약해 전혀 외교 교섭 상대가 되지 못했던 그 시절에 비하면 현재 우리나라는 상당히 중요한 외교 파트너로 국제무대에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동아시아의 여러 민족과 국가가 치열하게 대립하고 교섭한 고대 한국의 삼국시대가 현재의 국제정세와 더 닮았다고 볼 수 있다. 오호십육국으로 불리는 북방 유목민족이 중국으로 남하함에 따라 동아시아 세계는 격랑에 휩쓸렸고, 이에 맞서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국의 실정에 맞추어 주체적으로 대응하여 성장해나갔다. 6세기 말 통일된 중국이 일원적 천하를 구축하려고 대외 침략 전쟁을 남발하자 고구려는 군사적 대응과 외교적 대응을 적절히 병행하며 이에 철저히 맞섰다. 돌궐과의 연합, 거란?말갈 등 여러 종족을 회유하려는 노력은 오늘날 외교사적 측면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켜 일원적 천하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는 듯했으나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약해져 당에 복속되었던 돌궐, 거란 등 여러 민족이 자립하였고, 고구려 유민도 국가 재건에 성공하니 그것이 발해였다. 격동하는 국제정세에 현명하게 대응한 삼국시대 한민족의 분투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는데, 이 책은 이러한 점을 잘 살려 독자들을 설득하고 있다. 또 삼국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기술하였을 뿐 아니라 전체 동아시아 역사 틀에서 한국사가 차지하는 위치를 명확히 설정하고 있다. 이 책은 적잖이 기존의 학설과 다르거나 새로운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 몇 가지 살펴보면, 첫째 백제 개로왕의 부왕인 비유왕은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둘째, 을지문덕은 조상이 중국에서 고구려로 귀화한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셋째, 연개소문의 관직인 막리지의 어원은 산스크리트어다. 셋째, 원효대사의 조상은 신라 소지 마립간이다. 넷째, 당 태종의 고구려 원정 패배는 안시성 함락 실패로 인한 게 아니라 전반적으로 고구려의 전략에 말렸기 때문이다. 다섯째, 당이 줄기차게 고구려를 침략한 이유는 도교의 기원과 관계가 있다. 여섯째, 백제의 요서 경략설은 부여인의 활동이 와전된 것이다. 일곱째, 신라 진흥왕과 진평왕의 사망 연도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보다 나중의 일이다. 여덟째, 장보고의 사망 연도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보다 5년이 빠르다. 한국 고대사는 사료가 절대 부족하여 상세한 내용을 연구할 수 없어 많은 제약이 따른데, 이 책은 기존의 책들과는 달리 중국 사료를 좀더 폭넓게 이용하여 관련 내용을 해석하고 입체적 시각에서 기술하고 있다. 이전에 나왔던 연구서들 대부분이 고대 한국을 간략하게 서술한 여러 중국 역사서의 <동이전(東夷傳)> 부문만 활용해 단편적인 내용만 전했다면, 이 책은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 《진서(晉書》 《수서(隋書)》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의 사서 전체를 꼼꼼히 참조하고 비교하였다. 또 우리의 삼국시대뿐 아니라 한족과 유목민족의 왕조 가계도, 동아시아 각국 나라의 세력을 지도로 나타내는 것은 물론, 주요 전쟁 등도 여러 연구서들을 폭넓게 인용하여 정리하고 있다. 일국사적 관점에서 서술한 한국사는 ‘올바른 역사상’과 심각한 괴리를 초래하며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 중인 현재에 있어서도 한국사의 좌표와 지향해야 할 목표를 설정하는 데 커다란 장애가 된다. 이 책은 닫힌 역사에서 열린 역사로 삼국시대를 바로 보는 역사적 시각은 물론 오늘날 우리의 미래 지향적이고 열린 사회의식을 함양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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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단재 신채호 평전
김삼웅 | 시대의창 | 2013-06-12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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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단재 신채호 평전
김삼웅 | 시대의창 | 2013-06-12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6-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5 지원기기:
단재 신채호 선생의 생애는 망국 시대에 모든 것을 바쳐 일제와 싸운 처절한 혁명가의 삶이었으며, 오로지 일제 타도와 조국 해방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선생은 일제 타도를 위해 언론·문학·사학·대종교·아나키즘·의열단 등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싸웠으며 오늘날 각 분야의 큰 업적을 남겨 참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동북공정으로 대변되는 중국의 역사 왜곡이 한민족의 울분을 자아내고 있는 지금, 선생은 이미 민족사학의 이름으로 찬란한 우리의 고대사를 연구하고 복원하였다. 오늘 우리가 선생의 발자취를 조금이라도 다시 더듬고자 하는 것은 바로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고 올바른 역사의식을 회복하기 위함이다.
“아와 비아의 투쟁적 삶을 살다간 고결한 혁명가” 독립운동사에서 단재 선생만큼 남북한 공히 존경받는 인물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해방 후 극심한 이념대결의 장에서 독립투사들의 이념에 따라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선생만은 자신이 남긴 업적만큼이나 위대한 혁명가로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남북한이 전쟁을 치룰 만큼 한쪽의 역사를 잃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린 아직도 선생의 국적조차도 회복시키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 책 『단재 신채호 평전』은 단재 선생의 생애를 연구하고 선생의 발자취를 끊임없이 찾아 새로운 자료를 발굴했던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의 발로 쓴 역작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실제 저자가 몇 차례 뤼순 감옥을 방문해 입수하게 된 선생의 감옥 입소 때 찍은 사진을 게재했으며, 잡지 『천고』의 2권을 연변에서 입수해 최초로 국내 언론에 소개했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아울러 저자는 선생의 국적회복은 물론 동북공정 프로젝트로 대변되는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남북한 흩어진 단재 선생의 자료들을 모아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단재 신채호 전집』을 출간하자고 호소한다. 단재 선생의 삶은 그야말로 자신이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 일컬었던 역사의 정의만큼이나 치열하게, 또는 고뇌하며, 고결하게, 한점 흐트러짐 없는 혁명가의 삶을 살았다. 또 그 삶의 무게만큼이나 선생이 남긴 업적 또한 오늘날의 참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단재는 사학자로서 민족사학의 골격을 세웠을 뿐 아니라 한국 고대사 복원은 물론 잘못된 역사의 과오와 왜곡된 역사에 대해서도 비판의 칼을 들이댔다. 이러한 단재사학의 가장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낭가사상’은 민족사상의 기원, 전승, 기능을 구명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한 근대적 자주독립정신을 세워 민족의 진로와 시대정식을 밝히고자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겠다. 또한 선생이 남긴 『조선상고사』 등 수많은 저작물들은 오늘날 역사 연구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언론인으로서의 단재는 결기 그 자체라 말할 수 있겠다. 선생은 일찍이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을 지냈을 뿐 아니라 장지연이 쓴 「시일야방성대곡」의 후반부 원고 집필을 도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만방에 알리기도 했다. 또한 『대한매일신보』 주필로서 일제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 행위를 통렬히 비판하는 논설과 사설들을 쏟아내기도 했으며, 이 시기 애국심과 자강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해외 역사 서적을 번역(『이태리 건국 삼걸전』)하고 한국 사상의 영웅전(『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전』 『동국거걸 최도통전』)을 직접 저술하기도 했다. 선생은 망명길에 올라서도 『대동공보』에 관여하고 『권업신문』 주필로도 활약했다. 이승만의 임시정부에 대항하기 위해 항일신문 『신대한』을 창간하기도 했으며, 개인잡지 『천고』를 발행, 중국인과 한국인을 결속하는 항일투쟁과 한국 고대사 연구에 열정을 불태웠다. 독립운동가로서의 단재는 무장투쟁노선을 견지한 혁명가였다. 「의열단선언문」으로 불리는 「조선혁명선언」은 일제 시대 수많은 독립 선언문 중에서 내용과 문장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선생은 이 선언문에서 폭력에 의한 민중의 직접혁명을 부르짖었다. 또한 고급 밀정 김달하를 처단했던 다물단의 선언문도 집필했으며, 단원들과 함께 기거하며 조선사 등을 강의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아나키스트로서의 단재는 “지배계급이 민중들을 억압하거나 민중들을 속여 자신들의 지배에 복종시키고 혁명을 소멸시키기 위하여 이용하는 지배계급의 일체의 지배기관이나 수단은 파괴되고, 지배계급이 제정한 일체의 사회제도도 철폐되어 존재하지 않으며, 사유재산제도 부정되고 모든 재화의 공유제가 실시되어 일체의 착취가 없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선생의 이러한 사상적 변화에 대해 비판하기도 하지만 민족주의의 발전된 단계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책에서는 선생에 대한 여러 다양한 의견들과 비판들을 실어 아나키스트 신채호의 면모를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했다. 단재 선생이 서거한 지 70여 년이 지나고 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친일 역사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이 늦은 감은 없지만 이제라도 제대로 된 역사를 청산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일찍이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은 “죽어라 독립운동해서 나라 찾았더니 친일파에게 진상한 꼴”이 되었다고 통탄한 바 있다. 자칫 이번 청산 작업에서 친일파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엉뚱한 일이 일어나질 않길 바란다. 이것은 선생의 삶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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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류성룡의 징비
박기현 | 가디언 | 2015-01-07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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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류성룡의 징비
박기현 | 가디언 | 2015-01-07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6-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5 지원기기:
7년 임진왜란의 전시 수상 류성룡이 남긴 반성과 교훈!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도망가려는 선조를 붙잡고, 이순신·권율을 천거하여 왜적을 막아냈으며, 지원군으로 온 명군의 온갖 횡포와 조선 분할 획책을 저지하여 조선의 사직을 지켜낸 류성룡. 그럼에도 국정 책임자로서 처참한 전란을 막아내지 못한 죄인임을 자처하며 후세를 위해 《징비록》을 남긴 이 땅의 진정한 위정자 류성룡, 그의 뼈아픈 반성과 교훈이 400년이 지난 지금 더 크게 울리는 것은 왜일까? 역사의 홀대에도 묵묵히 빛나는 조선의 수호자 류성룡,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후세에 《징비록》을 남긴 진정한 위정자. 임진년(1592년) 4월 13일(음력),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명가도’를 내세우며 20만 정예 병력을 파병하여 조선을 파죽지세로 유린했다. 부산성과 동래성에서 잠깐 교전하고,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 장군이 막아섰지만 불과 반나절을 지체했을 뿐 왜군이 한양까지 점령하는 데 걸린 시간은 채 20일도 안 되었다. 맨몸으로 걸어도 힘든 천 리 길을 무장한 병력이 이런 속도로 이동했다는 것은 불가사의하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임금 선조는 평양성 어전회의에서 백성과 사직을 버리고 명나라로 도망갈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신료가 선조의 말에 동조하던 그때 단 한 사람, 류성룡만이 막아선다.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면 이 땅은 우리 땅이 아닙니다.’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했던 선조와 달리 민심 이반까지 염려해 이 같은 고언을 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7년, 조선의 국토와 백성이 처절하게 유린당하는 현장에는 영의정이자 도체찰사이며 훈련도감 제조이기도 했던 류성룡이 있었다. 전시 행정 수반으로, 군 최고사령관으로, 국방부 장관으로 전쟁과 행정 그리고 외교까지 1인 3역을 해낸 것이다. 《류성룡의 징비》는 임진왜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조명한 책으로 역사적 사실과 함께 류성룡의 활약상, 즉 초유의 국난을 온몸으로 치러야 했던 치열한 세 가지 전쟁을 여실히 보여준다. 건국 후 200년 동안 전쟁이 없어 해이해진 조정과 무너진 군을 추스르며, 한편으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이순신과 권율을 천거하여 16세기 당시 세계 최강 전력을 자랑하던 침략자 왜군과의 전쟁을 진두지휘한 것이 첫 번째 전쟁이다. 국정 책임자로서 지원군으로 참전한 명나라 대군에 군량을 조달하고, 그들의 온갖 횡포를 감내해야 했으며, 조선을 전쟁의 울타리로 삼으려는 저의를 간파하고 ‘조선 분할 획책’을 저지한 것이 그 두 번째 전쟁이다. 전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사대부와 당쟁을 일삼으며 백성을 돌보지 않던 뿌리까지 썩은 조정과의 전쟁이 세 번째이다. 기실 왜나 명과의 전쟁보다 더 힘든 싸움이 바로 썩은 조선 조정을 개혁하는 것이었다. 류성룡은 자신도 사대부였음에도 불구하고 면천법 제시, 사대부들도 군에 입대해야 하는 속오법 시행, 소금 전매법 완화 등 조선 사회를 지탱하던 사대부들의 경제적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는 개혁을 주저 없이 단행한다. 그 결과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들에 의해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실각하는 아픔을 겪는다. 하지만 류성룡은 귀향 후에도 권력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일에 매진한다.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조선을 구해낸 영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각 이후 고향 안동 하회마을에서 전란을 막지 못한 위정자로서 책임을 통감하며 전쟁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교훈과 반성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었다. 《징비록》이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전쟁 기록이라는 점에서 그는 시대의 저널리스트이기도 한 셈이다. 그런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반복되어 그의 사후 양대 호란과 구한말 망국의 길을 걷다가 나라를 송두리째 일본에 넘긴다. 치욕의 역사를 끊어내지 못한 우리에게 오늘 류성룡은 어떤 말을 들려주고 싶을까? ‘하늘이 내린 명재상’ 류성룡과 ‘백성을 사랑한 어버이 같은’ 류성룡을 한 권에서 만나다! 그동안 임진왜란을 극복한 대표적인 인물로 이순신 장군이나 권율 장군 정도를 떠올린다. 그들을 발탁해 적재적소에 기용하고, 7년 전쟁을 막아낼 수 있게 한 총지휘관이자 사령탑이었던 류성룡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징비록》의 저자라고 안다면 그래도 꽤 역사를 아는 사람쯤으로 생각할 정도이다. 그래서 《징비록》은 많이 번역되어 출간되었지만 정작 류성룡을 연구하여 출간된 책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류성룡이라는 인물 탐구와 그가 겪었을 당시 상황을 상상하는 과정 자체가 내게 참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난세에 스스로를 다잡으며, 헐벗은 백성을 위해, 유린당한 국토를 수복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던 진정한 참모이자, 거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자 서애 선생을 다시 한 번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가슴에 가득 차올랐다”고 술회한 저자는 류성룡을 더 깊이 만나기 위해 안동 하회마을을 직접 찾아 후손으로부터 기록된 역사적 사실뿐만 아니라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도 꼼꼼히 챙겨 들었다. 저자는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 모은 자료를 다듬어 각 장의 앞부분마다 생생히 살아있는 팩션으로 재구성했다. 뒤이어 앞에서 묘사한 일화의 역사적 현장 속으로 깊게 파고 들어가는 집요함을 보인다. 마치 정교한 한 편의 다큐멘터리 같은 스토리는 독자에게 소설적 재미와 지적 호기심을 채워준다. 또 임진왜란의 극적 구성을 위해 《징비록》을 연구한 저자는 맨 먼저 독자를 평양성에서 어디로 또 도망가야 할지 허둥대는 선조에게 이끌어준다. 그리고 전쟁을 감지한 류성룡의 예지력을 시작으로 임진왜란의 발발, 전쟁 중 명나라군의 군량 지원과 수많은 개혁을 통해 난관을 극복하는 류성룡의 활약상과 전쟁이 끝나고 어이없는 모함으로 실각한 후 귀향하여 《징비록》을 집필하고 세상을 떠나는 류성룡을 마치 한 편의 역사소설처럼 그려냈다. 이 책 속에서 우리는 의주까지 쫓겨 갔다가 한양에 돌아와 왜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힌 백성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전쟁 중에 먹을 것이 없어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을 위해 군량을 푸는 어버이 같은 모습은 물론, 지방 말단직을 전전하던 이순신을 기용하여 바다를 막아내고, 천민 출신 신충원을 면천해 조령 일대의 방어를 맡기는 한편, 의병과 승병을 불러내어 전쟁을 이겨낸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명재상’ 류성룡을 만날 수 있다. 조선에 맞는 축성법을 연구해 쓴 《축성방략》을 보급하는 등 새로운 방어시스템을 구축하고, 소금 전매를 풀어 조선 경제를 활성화하고, 중강개시를 열어 국토 손실로 수급이 어려운 쌀을 수입할 수 있도록 실용적인 조처를 하는 부분에서는 무릎을 칠 정도이다. 무엇보다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명나라로 내부하려는 선조와 조정 신료들을 막아 끝까지 싸우도록 한 류성룡 앞에서 우리는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류성룡이 선조를 막지 않았더라면 지금 우리는 어느 나라의 국민으로 살고 있을까. 류성룡은 당시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명쾌하고 유용하게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한 실질적인 전시 수상이었다. 이렇듯 이 책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류성룡의 다양한 면모들을 《조선실록》과 《징비록》 등의 문헌을 통해 복원하고 세세하게 들려준다. 실록에서도 볼 수 없었던 임진왜란의 처참한 실상을 낱낱이 밝히며 백성과 국토가 유린당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은 진정한 용기를 보여준 위정자이자, 이 땅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을 반성하고 후대에는 이 같은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징비록》을 쓴 깨어 있었던 지식인으로의 류성룡을 탁월하게 복원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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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자유의 종을 난타하라
손동우, 양권모 | 들녘 | 2014-12-30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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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자유의 종을 난타하라
손동우, 양권모 | 들녘 | 2014-12-30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6-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5 지원기기:
격동의 굽이마다
명문이 있었다 명문이란 무엇인가? 시공을 초월해 읽는 이들에게 울림을 주고, 그 울림의 여운이 진하고 오래 남아 정신의 푼푼한 자양분이 되는 글이 명문이다. 해서, 미문(美文)이 곧 명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시대정신이 녹아 있지 않다면 명문이 될 수 없다. 명문을 대하기 힘든 세상이다 보니 결국 명문을 찾는 순례는 역사 속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다. 조선 시대를 비롯해 고대, 중세의 고전 명문들을 소개하는 작업은 그나마 근래 들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하지만 오늘의 역사와 삶에 보다 직결될 뿐더러 한글이라는 모국어로 된 명문과 명연설문의 보고라 할 수 있는 근대 이후의 것을 제대로 소개해놓은 책 하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일제의 식민지배와 독립투쟁, 민족의 나아갈 바를 놓고 좌우의 이념대립이 불꽃을 튀긴 해방 공간, 분단과 한국전쟁, 경제개발과 독재, 그리고 가혹한 탄압과 희생 속에서 꽃핀 민주화. 파란과 곡절로 점철된 근현대사의 굽이굽이에서 시대의 고뇌를 갈파하고, 역사의 물꼬를 바꾼 명문과 명연설문을 한 묶음으로 만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어쩌면 극히 평이할 수 있는 이 같은 물음이 이 책을 쓰게 했다. 신문사 논설위원들의 현장감 넘치는 해설 이 책의 실린 명연설문의 태반은 우리 근현대사를 수놓은 위인, 혁명가들의 것이다. 1894년 동학혁명에서부터 1960년 제2공화국의 시작까지 아우르면서 글로서의 완성은 물론이고, 우리 역사의 고비에 굵은 궤적을 남긴 것들을 추린 결과다. 그리고 여기에 해당 연설문을 쓰게 된 배경과 인물 설명을 한 길라잡이 글을 매번 곁들였다. 길라잡이 글은 당시의 신문과 증언, 자서전과 회고록 등을 참고해 최대한 사실에 충실하면서도 발표된(혹은 연설된) 현장과 시대를 보다 생생하게 체감할 수 있도록 현장감을 살렸다. 연설문의 경우에는 미리 준비한 글 없이 현장에서 즉석으로 시도된 것이 많아 전해지는 판본도 여럿인데다 서로 다른 부분이 많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연설문을 읽으며,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 앞뒤 정황을 살펴 임의로 오자를 수정하고 최대한 원문에 가깝게 전하려고 노력했다. 또 1940년대 이전의 글만 해도 한자 표현이 많아 지금 읽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 중간중간 번역글을 달았다. 1894년부터 1960년의 격동기를 총 4개의 장으로 나눠 27개의 연설문을 실었다. 좌우의 이념적인 잣대를 최대한 배제하여 그동안 접하기 힘들었던 해방정국에서의 김일성, 박헌영의 연설문도 포함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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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선비들의 행복 콘서트
김봉규 | 행복한미래 | 2014-11-12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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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선비들의 행복 콘서트
김봉규 | 행복한미래 | 2014-11-12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6-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5 지원기기:
조선의 선비들, 행복한 삶을 말하다
일시적인 즐거움이나 쾌락이 아니라 진정한 행복, 행복한 일상의 삶을 누리기란 쉽지 않다. 그런 행복은 로또 당첨되듯이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옛 선비들은 어떻게 하면 모두가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지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성찰하며 실천하는 삶을 산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성리학을 공부한 선비들은 자신은 물론이고, 국가와 사회가 행복한 세상을 구현하기 위해 심신을 수양하며 성현의 가르침을 실천한 사람들이다. 본성을 밝혀 언제나 깨어있는 삶,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평생을 수양한 주인공들이다. 유학(성리학)의 가르침은 다른 종교나 철학에 비해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다. 그래서 유학을 공부한 선비들의 삶은 특히 올바른 삶,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구체적 방도를 어느 부류의 지식인들보다 잘 제시하고 있다. 그런 삶을 추구한 선비들이 남긴 글들을 통해 현대를 사는 우리를 돌아보는 일은 참된 행복의 길을 가는데 각별한 가르침을 줄 것이다. 그들의 행복관을 비롯해 부부관계, 자녀교육, 풍류와 멋, 직장(공직)생활, 음주, 음식과 건강, 마음수행, 죽음 등 삶의 여러 분야에 대한 글들을 가려 뽑아 정리했다. 글의 주인공들은 널리 알려진 이황, 이이, 조식, 정약용, 류성룡, 김성일, 이규보, 박지원, 김홍도, 이광사, 정철, 김굉필, 이익, 김상헌, 이산해, 채제공, 허목, 기대승, 최한기, 이원조, 정구, 송시열, 장흥효, 권벌, 허균, 주세붕 등 50명 정도에 이른다. 선비들은 때로는 근본적인 가르침을, 때로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실천 지침을 남기고 있다. 선비들이 남긴 옛 글, 그들이 가꾼 '지혜의 숲'을 거닐어 보자. 진정한 행복은 쉽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때 '부자 되세요' 라는 인사가 유행이었다. 이 말은 부자 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생각한 것이라기보다는, 부자가 되면 행복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주고 받았을 것이다. 부자가 되면 행복해질까. 아닌 것 같다. 최근에는 '웰빙' '힐링'이라는 말이 넘쳐나고 있다. 또한 '행복하세요' 라는 말을 수없이 주고받는다. 행복에 대한 갈증이 그 만큼 심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하겠다. 옛날보다 돈을 더 벌고 물질적인 부분이 충족되어도 '행복'은 따라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경제적으로 부유해져도 만족을 모르고 경쟁은 더욱 심해지는 사회가 되고 있으니, 행복에 대한 갈증은 오히려 더해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행복'을 얻기 위한 아우성이 도처에 울려 퍼지고 있다. 우리 사회가 행복을 강요하는 듯하기도 한데, 이렇게 아우성을 친다고 행복이 찾아올까? 죽기 살기로 헬스를 하고, 성형을 하고, 다이어트를 한다고 해서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로또에 당첨이 된다고 해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일시적인 쾌락이나 만족을 행복으로 착각하고 달려가는 것은 아닐까 싶다. 진정한 행복은 그렇게 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삶, 행복한 삶이 어떤 것인지 선비들의 삶을 통해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옛 선비들의 다양한 글들을 통해 행복을 길을 제시하다 네 잎 크로버는 ‘행운’을 상징하고, 세 잎 크로버는 ‘행복’을 뜻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수 없이 널려 있는 세 잎 크로버(행복)를 밟으며, 네 잎 크로버(행운)를 찾아 헤맨다. 사람들은 왜 어리석게 이렇게 널려 있는 ‘행복’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얻기도 어려운 오히려 불행의 씨앗이 되는 '행운'을 찾아 헤매는 것일까? 일상의 행복, 진정한 행복을 언제나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과도하고 헛된 욕심을 버리는 것이 관건이다. 온 세상이 달콤한 맛을 내세우며 유혹하고 광분하더라도 거기에 현혹되지 않는, 맑은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청정한 마음’을 잘 보존하며 길러가지 않고는 진정한 행복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이치다. 마음도 육체와 마찬가지다. 건강한 마음을 만들고 유지하려면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고 헛된 욕심을 없애야 하고, 맑은 마음을 단단하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단련해야 한다. 이 마음을 되찾아 보존해가면 삶은 행복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이것이 행복의 길이다. 하지만 실제 이렇게 사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이런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지 않고는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 어려울 것이다. 옛 선비들이 남긴 편지나 일기, 수필, 수행기록 등을 통해 우리가 행복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지 돌아보는 기회를 이 책이 제공할 것이다. 일상의 삶부터 본격적인 수행방법까지, 행복한 삶을 가는 다양한 길을 제시하다 이 책은 음주나 취미생활, 독서, 산행, 자녀교육, 직장(공직)생활 등 일상적인 삶에 대한 선비들의 글은 물론, 본격적인 수행방법에 관한 글들도 담고 있다. 한훤당 김굉필이 제자에게 써준 <한빙계(寒氷戒)>는 ‘욕심을 막고 분함을 참아라’ ‘사치를 버리고 검소하라’ ‘마음을 한결같이 하라’ 등 평범하지만 지극히 소중한 가르침들을 제시하고 있다. 퇴계 이황이 옛 성현들의 마음수행법을 엮은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에서 뽑은 글들 역시 언제나 곁에 두고 보며, 마음을 가다듬어야 할 주옥같은 가르침들이다. 중국의 무왕, 주희, 정이, 진덕수 등 성군과 대학자들이 거울이나 세숫대야, 서재의 벽 등에 새기거나 써놓고 평생 심신수양의 좌우명으로 삼은 글들이다. 이런 글을 통해 조선의 선비의 행복한 삶을 알아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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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엽기 스캔들 1
김성기 | 21세기북스 | 2013-09-03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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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엽기 스캔들 1
김성기 | 21세기북스 | 2013-09-03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6-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5 지원기기:
조선판 스포츠서울! 조선 시대 속사정을 속속들이 파헤친다.
왕과 궁전, 후궁의 삼각관계부터 내시들의 은밀한 이불 속 사정까지. 조선의 은밀한 실상을 재미있게 파헤치는 조선엽기스캔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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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엽기 스캔들 2
김성기 | 21세기북스 | 2013-10-19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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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엽기 스캔들 2
김성기 | 21세기북스 | 2013-10-19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6-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5 지원기기:
조선판 스포츠서울! 조선 시대 속사정을 속속들이 파헤친다.
왕과 궁전, 후궁의 삼각관계부터 내시들의 은밀한 이불 속 사정까지. 조선의 은밀한 실상을 재미있게 파헤치는 조선엽기스캔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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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왕들, 금주령을 내리다
정구선 | 팬덤북스 | 2014-05-17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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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왕들, 금주령을 내리다
정구선 | 팬덤북스 | 2014-05-17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6-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5 지원기기:
주식동원酒食同源, 주약동원酒藥同源?
국상 중에 술을 마셔 파면된 관리들, 임금에게 술 마시라고 강권하는 신하들, 소주에 산초를 타서 마신 세자의 스승, 술에 취하여 임금을 ‘너’라고 부른 정승까지…… 조선 시대의 천태만상 음주 풍습을 들여다보다! 술 마시기를 늘 하지 말고, 덕으로써 몸을 가지도록 하라. 어찌 해로우랴 말하지 말라. 그 해로움이 날로 심해지리라. - 숙종 요절한 왕자들, 임금의 옥좌에 올라간 관리, 임금의 명을 잊은 내시, 왕이 부탁한 점을 무시한 점쟁이, 말에서 떨어져 죽은 재상 등의 공통점은 모두 술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조선 시대 임금들이 내린 금주령은 여러 제약 때문에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한양에 크고 작은 술집이 가득 차고 넘쳤고, 어떤 이는 온 나라가 미친 듯이 술 마시기에만 전념하고 있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 시대의 술 문화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점잖고 엄숙한 유교 문화와는 사뭇 다르다. 술은 만악의 근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강력 사건의 대부분은 술이 주요 원인이라고 한다. 《조선 왕들, 금주령을 내리다》는 조선 시대를 살다간 선조들의 음주 실태를 살펴봄으로써 현대인들에게 술의 해악에 대한 경종을 울린다. 기본 자료는 《조선왕조실록》이며 모두 2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조선의 국왕과 술의 관계를, 제2부는 조선 시대 대표적 주당들의 행태와 술의 폐해를 살펴보았다. 조선의 국왕과 술 조선 시대에는 대궐에서 아침에 열리는 조회를 마치고 나면 국왕이 수고한 신하들에게 술을 내려 위로의 자리를 마련하곤 하였다. 국왕은 신하들만이 아니라 백성들은 물론, 심지어 죄수들에게 술을 하사하기도 했다. 이처럼 술을 내려 주는 것은 국왕의 중요한 통치 행위의 하나였다. 술과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였던 것이다. 조선의 왕들 중 술을 좋아한 애주가를 꼽는다면 태종, 세조 ,영조를 들 수 있다. 그들은 술을 자주 마시다 보니 자연히 주량도 강했다. 아무래도 즉위 전이나 재위 중 어려운 일을 많이 겪은 왕들이 술을 좋아했다. 태종은 ‘왕자의 난’이라는 골육상잔의 아픔을 겪었고, 세조는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조카를 몰아냈다. 영조는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나 왕위에 오르기까지 많은 고초를 겪었고, 재위 중에도 소론이 일으킨 무신란戊申亂 등의 변란과 치열한 당쟁을 치러야 했다. 임금의 주량은 당대의 정국 동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고 할 것이다. 반대로 술을 가장 싫어했던 왕은 아마 세종일 것이다. 그는 본래 주량이 약하여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부왕인 태종과 신하들이 술을 강권하는 바람에 거절하느라 큰 곤욕을 치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주식동원酒食同源, 주약동원酒藥同源 조선 시대에 술은 바로 약이요, 음식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몸이 아프거나 허약할 때 약으로 술을 마시거나, 약을 먹을 때 술을 함께 마셨다. 술은 곧 약주藥酒요, 음주는 복약服藥, 즉 약을 복용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당시에 자주 쓰인 주식酒食이라는 말도 술이 일종의 음식으로 여겨졌음을 보여 준다. 술과 약, 술과 밥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약식동원藥食同源이라는 말처럼 주식동원酒食同源이자 주약동원酒藥同源이었다. 조선인들에게 술은 몸이 좋지 않을 때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먹는 약이요, 약을 먹을 때도 반드시 같이 마셔야 하는 일종의 음식이었다. 술은 오곡의 정기가 들어 있으므로 적당하게만 마시면 참으로 좋은 약이었다. 신하들은 임금이 매일매일 술을 마시지 않으면 몸을 상할까 염려하여 술을 드시라고 강권하였다. 술을 즐기는 임금들에게는 괜찮았겠지만, 세종처럼 술을 싫어한 임금에게는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그렇다 보니 조선 시대에는 고위 관료들부터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술을 마시는 풍조가 널리 퍼져 있었다.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즐기는 것을 당시 사람들은 술을 숭상한다는 의미의 숭음崇飮이라고까지 일컬었다. 숭음 풍조는 건국 직후부터 나타나 나라의 큰 문제가 되었다. 조선 중기에 이르면 숭음 풍조가 더욱 확산되어 신분이나 지역을 막론하고 음주가 거의 생활화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한양 도성 안에 큰 술집이 골목에 꽉 차고 작은 술집이 처마를 잇대어 있었다. 온 나라 사람들이 마치 미친 듯이 오로지 음주만 일삼고 있다는 개탄이 나올 정도였다. 금주령의 허와 실 나라에서는 수시로 금주령을 내려서 술을 마시는 자와 빚는 자들을 엄히 단속하고자 했다. 금주령을 어겨 체포되거나 처벌받는 자들은 대부분 힘없는 백성이었다. 현장에서 집행하는 하급 관리들은 고위 관료들과 권세가들은 건드리지 못하거나 눈감아 주고 일반 백성들만 엄하게 단속하였다. 단속을 기화로 뇌물을 챙기는 일도 있었다. 금주령을 내리면서 사람들이 술병을 들고 밖에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는 조치를 병행하기도 했다. 집에서 마시는 술은 단속이 어렵자 대신 밖에서 술병을 가지고 다니며 마시는 것을 막아 보려는 궁여지책이었다. 물론 혼인, 장례, 제사 때와 노병老病에 약으로 마시거나 활쏘기를 할 때는 술병을 지니는 것이 허용되었다. 금주령은 조선 초기부터 시행했으나 예외 조항이 많아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기가 어려웠다. 우선 임금이 베푸는 연회, 종묘 등에서의 국가 제사, 외국 사신 접대 때는 금주령의 적용을 받지 않도록 했다. 늙고 병들어서 약으로 먹는 경우, 친지를 영접하고 환송하는 경우, 과거 합격자의 유가遊街 시에도 예외적으로 술을 허용하였다. 집안의 혼인, 장례, 제사, 환갑 등의 행사에도 술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더구나 솔선수범해야 할 관료와 양반들이 잘 지키지 않았다. 금주령이 뜻대로 되지 않자 조선 후기에는 위반자를 처형하기도 하고, 단지 술에 만취하여 주정하는 짓만을 금지하는 선으로 후퇴한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으나, 역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금주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각종 폐해가 잇따르자 임금들은 계주교서戒酒敎書 등을 내려 술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지나친 음주를 훈계하고 경계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세종이 가장 적극적으로 술을 경계하였고, 선조와 영조 등의 왕들도 음주를 삼가라는 교서를 잇달아 반포하였다. 임금들에 의하면 술은 재물을 허비하고, 인성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생명을 잃게 하고, 가정과 나라를 멸망시키는 원흉이었다. 특히 영조는 술이 사람을 미치게 하고 착한 사람을 악한 사람으로 만들어 각종 범죄에 빠져들게 하는 광약狂藥이라고까지 하면서 술을 함부로 마시지 말고 절주하라고 당부하였다. 조선의 술꾼들 세종 때 이조 판서를 지낸 허지, 병조 참판을 역임한 우승범, 세조 시절 좌의정이었던 이사철은 술이 무척 센 두주불사의 관료들이었다. 세조의 공신인 홍달손도 술을 매우 좋아한 대신이었다.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윤회는 세종이 술을 자제하라고 여러 번 당부하였으나 끝내 술을 끊지 못하였다. 태조의 우대를 받았던 재상인 홍영통은 태조의 탄신일 잔치에서 만취하여 집에 돌아가다가 말에서 떨어져 그만 사망하고 말았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 소현 세자와 봉림대군을 청나라 수도 심양으로 모셨던 한형길은 소주가 싱겁다며 독한 산초를 타서 먹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조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영의정까지 오른 정인지는 술을 마시고 임금을 ‘너’라고 부른 적도 있다. 세조 8년에는 영의정 정창손이 어전에서 술을 마시고 실수하여 임금이 선위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하기도 하였다. 예조 정랑 우계번이 술을 마시고 취하여 양반 부인을 모욕한 일이 있었다. 사헌부 관리인 이예는 술이 취하여 무엄하게도 임금이 앉는 평상에 올라가 술주정을 하기도 했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 무장인 어유소는 성균관에서 공자에게 지낸 제사 후 음복을 하고 취해 궁녀를 희롱하면서 술을 따르도록 하였다. 사헌부에서 처벌을 주청하였으나, 임금은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취중에 한 일이라면서 특별히 용서하여 주었다. 임금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내시 중에도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시 최습은 술에 취하여 승정원에 전할 임금의 교지를 잃어버렸다가 의금부에 하옥되었다. 내시 박인손은 대궐 밖으로 임금의 심부름을 갔다가 술에 취하여 곧바로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는 결국 곤장 60대를 맞아야 했다. 임금을 비방했다가 참형에 처해질 뻔했던 안동 부사 이전, 정승 조준을 저주했다가 참형을 당한 사헌부 감찰 김부도 술이 원인을 제공하였다. 세종 때의 이조 판서 홍여방은 동료 판서들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과음하여 이튿날 갑자기 죽고 말았다. 효종 때의 병조 판서 박서는 연일 과음하다가 급사하였다. 개국 공신으로 오랜 기간 도승지로 재임한 박석명은 술병이 들어 36세에 요절하였다. 명재상 하윤의 아들인 하구도 술병이 걸려 37세에 죽었으며, 성종 때에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최경지도 술병으로 어느 날 갑자기 사망하였다. 조선 시대의 주폭과 벌주 풍습 조선 시대에도 주폭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있었다. 건국 직후에 안말건이 술에 취하여 거리에서 사람들의 재물을 약탈하고 말리는 사람을 구타하였다. 그는 곤장을 맞고 수군으로 강제 편입되었다. 자기 할머니의 상중에 풍악을 울리며 술을 마시고 남의 집에 들어가 행패를 부린 최선, 최굉 형제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성종 때는 그야말로 주폭 삼 형제라고 할 이들이 나타나 갖은 행패를 부렸다. 평양에 살던 생원 김하, 김거, 김석 삼 형제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함께 이모의 집에서 술을 마시며 이웃집의 여종을 불러다가 술을 따르게 하고 노래를 시키며 희롱하였다. 이것도 모자라 자신들을 제지하고 항의하는 여종의 남편을 심하게 때렸고, 남편의 여동생도 구타하여 업고 있던 아이를 죽게 만들기까지 하였다. 사헌부에서는 김거를 주범으로 보아 교수형에, 김하와 김석은 거든 자라 하여 곤장 1백 대에 해당한다고 결정하였으나, 이미 모두 도망쳐 처벌하지는 못했다. 그러자 영구히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는 처분을 내렸다. 조선 초기에는 조선으로 귀화하거나 귀순한 여진인, 즉 야인野人들을 위무하기 위해 재물을 넉넉하게 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선지 밤낮으로 모여 술을 마시고 술주정을 하는 야인들이 많았다. 여진인만이 아니라 조선에 오는 일본인들도 술을 많이 마시고 술주정을 하는 폐해를 끼쳐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무언가 잘못을 하면 벌로 술을 억지로 마시게 하는 벌주 풍습이 널리 행해졌다. 왕실에서도 널리 행해져서 태조가 태종에게 벌주를 내린 적도 있고, 세조가 어떤 일을 자책하며 스스로 벌주를 마시려고 한 일도 있다. 세조는 신하들에게도 벌주를 자주 내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전기에는 새로 임명된 육조의 정랑과 좌랑에게 선임자들이 자질구레한 일들을 모두 맡겼다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술을 큰 잔으로 두세 잔 마시게 하는 벌주 풍습이 있었다. 만약 끝까지 사양하면 배척하여 동렬에 끼어 주지 않았다. 조광조와 함께 대표적인 사림파인 김식은 벌주를 무척 싫어한 인물이었다. 그는 벌주를 마시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료들에게 따돌림을 당한 일이 있다. 술을 멀리한 사람들 사실 술을 싫어하고 멀리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개국 직후 태조의 우대를 받았던 조운흘은 세상일에 아무런 욕심 없이 초연하게 살다간 사람이다. 고려 말에 전법총랑으로 있다가 관직을 버리고 물러가 경상도 상주의 노음산 아래에 살면서 일부러 미친 척하기도 하였고, 출입할 때는 반드시 소를 타고 다녔다. 그러면서 술과 풍악을 멀리하고 세속을 희롱하며 고고하게 살았다. 단종 때의 재상 최부는 사람됨이 편안하고 조용하며 맑아서 음주와 장기, 바둑을 좋아하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예문관 대제학이었던 윤형은 성격이 온순하고 인정이 많았으며, 음악과 여색을 즐기지 않았다. 특히 사람들이 가진 술을 보면 반드시 “이름을 더럽히고 일을 망치는 것으로는 이것보다 심한 것이 없다.”면서 음주를 경계하였다. 세조 때 의정부 좌참찬을 지낸 박중손은 스스로 계주명戒酒銘을 지어서 자신을 경계하기도 하였다. 세조 6년에 중추원사로 있다가 죽은 기건은 성품이 맑고 검소하고 곧았으며, 작은 행실도 반드시 조심하고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그는 특히 지방 수령으로 부임한 뒤 백성들의 고통을 보고 술을 마시지 않을 정도로 모범적인 청백리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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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비운의 공주들
김학민 | 21세기북스 | 2012-12-10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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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비운의 공주들
김학민 | 21세기북스 | 2012-12-10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6-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5 지원기기:
비극으로 얼룩졌으나, 베일에 가려졌던 왕실 속 여성들.
조선의 공주, 가장 고귀한 여성이자 가장 천대받았던 그녀들의 삶 속 비극의 그림자를 엿보다. 공주에서 노비로 전락했던 경혜공주, 남편과 시어머니의 위협으로부터 목숨조차 부지하지 못했던 정선공주, 조선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비운의 덕혜옹주까지. 조선의 공주, 시대에 따라 울고 웃었던 그녀들의 파란만장한 열세 가지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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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
이우상 | 다할미디어 | 2014-02-20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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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
이우상 | 다할미디어 | 2014-02-20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6-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5 지원기기:
조선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
조선왕릉을 중심으로 조선왕조와 그 역사의 뒷이야기를 풀어내는 책이다. 조선왕릉은 조선왕조 27대 왕과 왕비, 추존 왕과 추존 왕비의 능으로 총 42기에 이른다. 한 왕조의 능이 모두 보존되어 있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기 힘들다. 저자와 사진작가는 조선왕릉 곳곳을 누비며, 왕릉의 이모저모를 담았다. 『조선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는 조선왕가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조선왕조 518년을 되돌아본다. 저자는 특유의 섬세한 감성으로 죽음은 최상의 법문이며, 그것은 곧 자비라는 조용한 깨달음을 전한다. 이 책은 조선왕조 시대를 다룬 충실한 역사서이다. 더불어 숨겨진 야사를 이끌어와 진실의 양면을 흥미롭게 재조명하는 하며, 왕릉답사 가이드 코너를 마련하여 가이드북으로의 활용도 또한 높였다. 조선왕실의 무덤이면서 문화유산인 왕릉을 답사하면서 조선왕조의 역사를 공부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이다. 조선왕조 518년, 27대 역대 왕과 왕비, 추존 왕과 왕비가 있다. 이들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며, 현재 조선 왕릉은 42기가 있다. 왕의 사친과 왕세자, 그 비의 무덤은 13기가 있으며, 원(園)이라 부른다. 묘(墓)는 대군과 공주, 옹주, 후궁, 귀인 등의 무덤으로 64기가 있다. 통틀어 119기가 있는 것이다. 조선왕릉, 영원한 안식을 꿈꾸고 있는가 만백성 위에 군림하던 최고 권력자들, 내명부의 주인이 되기 위해 온갖 모략을 서슴지 않던 여인들, 왕가의 발치에서 숨죽여 살아가던 내시와 궁녀들. 한때 화려하고 찬란한 왕가를 이루었으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들이다. 그들은 과연 영원한 안식을 꿈꾸며 깊은 잠에 빠져 있을까? 진보한 시대를 향한 발걸음은 갈등과 분열의 저항에 끊임없이 맞서야만 한다. 역사는 반복된다. 평화와 안정을 위해 나아가는 과정 속에 지난 시대의 비극이 숱하게 재생된다. 저자는 직접 조선왕릉터를 누비며 옛 왕조가 넌지시 전해주는 ‘서늘한 교훈’을 체험한다.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부터 의친왕의 의왕묘까지 이 책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부터 의친왕의 의왕묘까지 조선왕릉으로 조선왕조 518년을 정리했다. 조선왕조 27대 왕과 그 일가들의 삶은 곧 조선의 역사이다. 어린 조카의 목숨을 빼앗고 왕위에 오른 냉혈한 세조는 어린 자식을 잃고 비극에 잠긴 슬픈 아비였다. 왕의 여자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장희빈은 사약을 받는 순간 훗날 왕의 자리에 오를 세자를 저주했다. 역사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알려진 이야기 속에 감추어진 이면에 맞닥뜨리게 된다. 더불어 조선왕가를 이루었으나 소리 없이 살아간 왕의 후손들과 내시궁녀의 삶도 빠뜨리지 않았다. 죽음은 곧 최상의 법문 빛과 어둠은 실존을 위해 서로를 위협하나 변증을 이루며 세계 안에 공존한다.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어떻게 살았는가’ 라는 물음은 ‘어떠한 생을 마감했는가’와 다르지 않다. 죽음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으며, 죽음을 통해 인생은 완성된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죽음을 떠맡기고, 스스로도 죽음의 주인공이 된 그들의 삶을 돌아보며 저자는 삶과 죽음이 하나로 연결되며 결국 죽음이 최상의 법문임을 우리에게 전한다. 역사 기행과 도심 산책을 한꺼번에 왕릉 순례는 ‘죽음과 역사’라는 두 가지 화두와의 만남이다. 사색과 성찰, 휴식과 운동이란 부가가치도 뒤따른다. 조선 왕릉은 왕조 500년 역사의 타입캡슐이다. 대부분 경복궁을 중심으로 100리 안에 있다. 즐거운 소풍놀이다. 후손들에게 남긴 최고의 선물이다. 삶과 죽음으로 풀어본 조선왕조 500년 사를 통해 옛 왕조의 혼을 느끼고, 왕릉답사 가이드를 따라 왕릉터로 발걸음을 옮기면 역사 기행과 도심 산책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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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을 뒤집은 황당무계 사건들
정구선 | 팬덤북스 | 2014-10-2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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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을 뒤집은 황당무계 사건들
정구선 | 팬덤북스 | 2014-10-2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6-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5 지원기기:
점을 쳐서 수도를 결정하다, 임금을 몰래 미행한 사관,
젖비린내 나는 아이가 관리가 되다, 판서가 졸병과 함께 보초를 서다, 코끼리에게 밟혀 죽은 판서, 서울에 운하를 건설하려고 하다, 노비에게도 봉급과 휴가를 주다, 화폐 위조범을 찾아라, 외국 사신을 놀라게 한 불꽃놀이……. 조선판 ‘세상에 이런 일이’ 조선에서 일어난 흥미롭고 놀라운 사건들! 조선 시대라 하면 고루하고 답답한 시대였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아주 흥미로운 시기였다. 《조선왕조실록》을 찬찬히 읽다 보면 조선의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야말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 야사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마치 ‘세상에 이런 일이!’라고 놀랄 정도의 역사가 가득하다. 《조선을 뒤집은 황당무계 사건들》은 실록 속에 숨어 있는 흥미진진하고 황당한, 때로는 놀라운 역사를 정리하여 담아낸 이야기보따리다. 책에 실린 이야기를 통해 조선의 생생한 역사 속으로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 그동안 감추어진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아가 조선 시대, 조선 사람들에 대하여 좀 더 폭넓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책의 기본 배경은 조선 건국 직후인 태조 때부터 3대 태종 때까지이다. 해당 시기의 국왕과 왕실, 관료, 백성, 명나라 사신과 관련된 역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후대 왕의 연간에서 관련 일화를 첨부하기도 했다. 왕실에 그런 황당한 일이!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공신들은 고려 왕실의 후예인 왕씨들이 살아 있는 한 편히 발을 뻗고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들은 모반을 도모했다는 허무맹랑한 구실을 꾸며 왕씨들을 일망타진하였다. 조선은 태조 3년 9월에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지만, 그 이전에는 계룡산 부근에 수도를 정하려다가 취소하였다. 다시 서울의 무악재 아래 신촌 일대로 옮기려다가 포기한 적도 있다. 한양에 수도를 정한 조선은 ‘왕자의 난’ 이후 개성으로 잠시 옮겼다가 태종 때 한양으로 재천도하였다. 한양으로 재천도하는 결정은 종묘에서 동전으로 점을 쳐서 정했다고 한다. 덕수궁이란 이름을 가진 궁궐은 엄연히 조선 건국 직후부터 있었다. 태조 이성계가 1398년 10월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 그가 머물던 궁궐을 태상궁이라고 불렀다. 정종 2년 6월에 당시 세자로 있던 이방원의 청에 따라 태상궁의 이름을 덕수궁이라고 고친 것이다. 신생 왕조를 안정시키고 기틀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콧대가 한껏 높아진 무신들을 억누르고 상대적으로 의기소침해 있는 문신들을 다독여 주어야 했다. 무관 출신인 태조 이성계와는 달리 과거에 급제한 문관 출신인 태종은 무관을 무시하거나 경멸하는 태도를 보였다. 태종은 무예를 한갓 미친 짓이라고 하기도 했다. 문무의 균형을 맞추려는 태종의 현명하고 원대한 정치적 안목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조선 시대에는 재상 등의 고위직을 역임한 신하들이 사망하면 임금이 부의금을 하사하고,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 주며, 시호를 내렸다. 부의로 1품은 쌀과 콩을 아울러 60?100석, 정2품은 40?50석, 종2품은 30석 이하를 주었다. 1석을 2가마로 치고, 1가마를 80kg으로 환산하면 100석은 약 200가마로 16,000㎏이다. 당시 재상들은 정말 어마어마한 부의금을 하사받았던 것이다. 임금님의 지나친 부의금 때문에 나라 곳간이 거덜 날 정도였다. 사초는 사관이 임금이나 신하들의 언행을 날마다 기록한 것으로, 실록 편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초 자료였다. 사관들이 안심하고 직필하도록 실록을 편찬하기 전까지는 임금을 비롯한 그 누구도 사초를 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태조와 태종은 굳이 사초를 열람하려다가 신하들과 충돌을 빚었다. 고려 32대 왕으로 공민왕의 아들인 우왕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후 폐위되었다가 죽임을 당했다. 우왕에게는 모두 9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대부분 궁궐에서 쫓겨나 본가로 돌아갔다. 본가로 쫓겨난 왕비 중에는 우왕의 제8비였던 선비 왕씨도 포함되어 있었다. 선비는 본가로 쫓겨난 뒤 조선이 들어서자 판통례문사를 지낸 유은지와 재혼하였다. 한때 자기가 섬기던 왕의 부인을 아내로 삼은 것은 군신의 예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삼강오륜을 어지럽히는 짓이라는 여론이 거셌다. 태종이 어느 날 포천군에서 사냥을 하였다. 수행하던 사람들 가운데 6명이 숙소에서 쑥갓과 거여목처럼 생긴 독초를 잘못 먹고 갑자기 죽는 일이 벌어졌다. 소식을 들은 임금은 앞으로 자기의 식탁에 쑥갓과 거여목을 올리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관리들이 감히 이런 일을! 조선 초기에는 나이 어린 사람들이 관리가 된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는 젖비린내 나는 아이가 관리가 되어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도 요즈음의 인사 청문회와 비슷한 서경署經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관리 후보자들의 신분, 조상, 과거 합격 여부 등을 조사하여 관리로서의 적합도를 검증하는 제도로, 서경을 통과하지 못하면 관리가 되지 못했다. 조선 초기에는 관청에 출근하지 않고 결근하거나 조퇴하는 관리들이 많았다. 조정에서는 이들에게 매를 쳐서 징계하였다. 지방으로 전출되면 부모의 병을 핑계로 관직을 내던지고 내려가지 않는 관리들이 많아 큰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 또한 임금의 부름에 항상 응할 수 있도록 2품 이상의 재상들은 지방에 머물지 말고 한양에 거주하도록 하였다. 조선의 대간들은 한 가지 문제가 생기면 수없이 간언을 올리거나 상소를 올려 임금을 괴롭혔다. 태종은 참다못해 신하들이 세 번 이상 간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기까지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어이없는 일로 처벌을 받은 관리들이 많았다. 임금에게 올리는 글에서 본인 이름 앞에 신臣 자를 붙이지 않았다고 하여 파직된 관리가 있었다. 시호를 잘못 정했다가 교수형을 당할 뻔한 관리도 있었다. 문서나 본인 이름에 임금과 세자의 이름을 쓸 수 없어 이름을 두 번 바꾸어야 했던 공신도 있었다. 조선 건국 직후에는 저녁 8시경부터 새벽 4시경까지 4대문을 통과하거나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는 야간 통행 금지령을 실시했는데, 영을 어겼다가 파직된 대사헌도 있었다. 심지어 비가 많이 내려 농민들이 기르는 벼를 떠내려가게 했다는 죄로 수령을 파직하기까지 하였다. 태종 때 공조 전서를 지낸 이우가 일본에서 보낸 코끼리에게 침을 뱉었다가 밟혀 죽었다. 고려 후기의 대학자인 이제현의 증손자 이담이 미친개에게 물려 죽었다. 태종의 딸과 자기 아들과의 결혼을 단호하게 반대했다가 역적으로 몰려 노비로 강등된 전직 군수가 있었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 문신인 변계량은 20여 년 동안이나 대제학을 맡으면서 크게 존경을 받았지만 집에서는 그렇지 못하였다. 후처를 방에 가두어 두고 창구멍을 내어 음식을 주거나, 소변도 자유롭게 보지 못하게 하는 등의 박대를 하여 탄핵을 받았다. 궁녀는 일단 궁에 들어가면 왕의 여인이었다. 혹시 궁에서 나가더라도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없었다. ‘왕자의 난’을 치른 공신으로 태종의 총애를 받았던 조영무가 궁녀를 첩으로 삼았다가 많은 비난을 받았다. 조선 왕조는 신분 제도를 엄격히 하기 위하여 노비, 기생 등의 천인과 양인 간의 결혼을 건국 초기부터 강력하게 금지하였다. 그럼에도 첨절제사를 지낸 정복주가 본처를 버리고 기생의 딸과 혼인하여 후처로 맞았다가 관직을 잃고 평민으로 강등된 일이 있었다. 조선 군대에는 돌을 던지며 싸우는 척석군이 있었다. 수군에서는 왜구를 추격하기 위해 쾌선 내지 경쾌선이라 불린 작고 빠른 쾌속선을 만들어 실전에 투입하기도 하였다. 백성들에게 과연 무슨 일이! 재판에 불만을 품은 여인이 임금이 어가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앞으로 뛰어들었다. 호위병과 부딪힌 여인은 임금 앞에서 크게 부르짖으며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임금이 격노하여 곤장을 때리고 지방의 관노비로 삼도록 했다. 조선 초기에는 황제의 색깔이라고 하여 황색과 황색 옷의 사용을 금지하였다. 그 외에 흰색과 옥색, 회색의 옷도 입지 못하게 했다. 황색으로 보자기를 만들어 가지고 다니다가 귀양을 간 사람이 있었다. 국가 소속의 공노비들은 봉급을 받고 휴가를 가기도 했다. 태종 때 처음 만들어 사용한 지폐인 ‘저화’를 위조하는 사람들이 많아 유통이 부진을 면치 못한 일도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징수하지 않는다. 조선 시대에는 무당에게도 세금을 거두었다. 국가에서 3년마다 한 번씩 무당의 명부를 작성하여 무세巫稅를 징수했다. 무세는 원래 매년 두 번 징수하였는데, 세종 5년부터는 매년 한 차례만 거두도록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경상도나 전라도, 충청도 지방에서 조세로 거두어들인 곡식이나 베 등을 주로 배를 이용하여 한양까지 운반하였다. 이를 조운이라 하였고, 그 배를 조운선이라 불렀다. 조운선이 풍랑을 만나 난파하거나 침몰하여 곡식과 사람을 잃는 사고가 매년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태종 3년에는 조운선 34척이 한꺼번에 바다에서 침몰하여 천여 명의 수군이 몰사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한 적도 있었다. 조운선의 침몰은 인명은 물론 국가 재정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는 재난이었다. 조선 시대에 중요한 재산은 토지와 노비였다. 태종 때 남양군에 봉해지고 상의중추원사를 역임한 홍길민은 노비를 무려 천여 명이나 소유하였다고 한다. 노비로만 따지면 그는 아마도 조선 초기 최대의 거부가 아니었을까. 죽은 사람의 생식기를 잘라 가는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태종 3년 5월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던 날, 황해도 봉산에서 어떤 남자가 소를 끌고 가다가 벼락을 맞아 죽었다. 이때 죽은 사람의 손가락과 생식기인 음경을 잘라 간 사건이 일어났다. 조선 시대에도 인명 보호 차원에서 오늘날의 삼심제와 유사한 삼복법三覆法을 시행하였다. 지방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발생하면 수령이 먼저 심리하여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관찰사는 다시 심리하여 중앙의 의정부에 보고하며, 의정부에서는 세 번 심리하여 임금에게 세 번 아뢴 다음에 사형을 결정하도록 했다. 비록 사형에 처할 만한 죄를 지었더라도 죄인이 독자면 살려 주는, 이른바 독자존류양친법獨子存留養親法이라는 법규가 있었다. 외아들이 죽으면 늙은 부모를 봉양할 사람이 없어지기에 살려 준 것이다. 조선 시대의 형벌 중에는 곤장으로 죄인을 때리는 장형이 있었다. 장형은 죄의 경중에 따라 최하 60대에서 최고 100대까지 치도록 했다. 때로는 곤장을 60~70대 맞고도 죽는 사람이 있었으며, 100대를 맞으면 대개 사망에 이르렀다. 곤장 100대는 치사율이 거의 100%였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사라진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형벌이 많았다. 몸을 여러 조각으로 찢어 죽이는 능지처참 외에도 중국 고대에 행해진 오형 중 얼굴 등에 문신을 하는 묵형墨刑, 즉 자자刺字와 발꿈치를 베는 비형?刑이 행하여졌다. 중국 사신이 어떻게 그런 짓을! 전라도 장성의 길가에 큰 나무가 있었다. 사람들은 가지가 많다는 뜻의 ‘백지수百枝樹’라고 불렀다. 태종 때 명나라 사신 황엄이 지나다가 그 나무에 비밀스럽게 구리 못을 박아 놓았으나, 고을의 현감 허규가 못을 뽑아 버렸다. 황엄이 나무에 못을 박은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가 압승술을 썼다고 생각하였다. 원래 중국 사신이 오면 연회를 끝내고 기생으로 하여금 수청을 들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중국 사신들은 가까이했던 기생을 못 잊어 사랑에 빠지기도 했고, 급기야는 기생을 중국으로 데리고 가려 하기도 했다. 금강산은 우리나라 최대의 명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금강산의 명성은 예전부터 중국에까지 퍼져서 조선에 오는 명나라 사신들마다 모두 금강산을 유람하려고 안달을 하였다. 고려와 조선에서는 중국에 막대한 공물을 보냈다. 물품 외에도 처녀와 환관 등의 사람들도 보내야 했다. 조선 초기에 명나라에서는 환관으로 쓰기 위해 화자, 즉 고자를 보내라고 요구하였다. 태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15회에 걸쳐 모두 200여 명의 화자를 바쳤다. 화자 외에 처녀도 보냈다. 중국에 보낸 처녀를 이른바 공녀라 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충렬왕 때부터 공민왕 때까지 80년간 모두 50차례에 걸쳐 수천 명 이상의 처녀들이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갔다. 조선 시대에는 태종 때부터 세종 때까지 20여 년간 7회에 걸쳐 100여 명의 처녀들이 명나라에 바쳐졌다. 후기에는 인조~효종 때 20여 명의 처녀들이 청나라에 끌려가야 했다. 명나라에 보내는 공물에는 말과 소도 있었다. 태종 4년에는 명나라에서 농삿소 1만 마리를 요구하여 여러 차례로 나누어 보내야만 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숭불 풍조가 남아 궁중에도 부처의 진신 사리 같은 사리가 많았다. 명의 3대 황제 영락제가 이것을 보내 달라고 요구하였다. 태종과 세종이 궁궐과 각지의 사찰에 보관되어 있던 사리를 모아 모두 1,300여 과를 보냈다. 조선 초기에는 왜구들이 전국의 연안에 출몰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잡아가는 일이 잦았다. 조정에서는 일본에 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오려고 여러 가지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태종 16년에 돌아온 전언충이라는 사람은 무려 21년 만에 귀환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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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반도의 비밀
한철우 | 21세기북스 | 2012-12-01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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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반도의 비밀
한철우 | 21세기북스 | 2012-12-01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6-12) 대출:0, 예약:0, 보유수량:5 지원기기:
한반도의 비밀 : 풀리지 않는 한국사 미스터리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는 한반도 속 수수께끼를 파헤치다. 역사 속 깊이 얽혀있는 비밀스런 사건, 사고들 총망라. - 중국대륙의 지배자, 신라와 백제? - 불가리아를 지배했던 부여민족의 실체 - 이순신 죽음, 타살인가, 자살인가 - 조선을 발칵 뒤집은 괴생명체들의 대낮활보 - 조선시대 왕들의 의문스런 죽음 속 숨겨진 음모 - 조선시대 미확인물체 U.F.O의 출현 - 조선왕조를 멸망시킨 비법서의 행방 믿기 힘든, 그러나 믿을 수밖에 없는 한국사 미스터리의 실체를 밝힌다. 지금 한국사 미스터리, X파일 속으로 빠져 들어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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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정도전과 조선건국사
조열태 | 몬스터 | 2014-02-27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10-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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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정도전과 조선건국사
조열태 | 몬스터 | 2014-02-27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10-3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5 지원기기:
<강추!>보통 역사를 이긴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비열한 방법으로 정권을 잡고 나서 자신의 행동을 미화하기 위해 왜곡된 기록을 남긴 권력자와 당파도 있을 것이고, 비정상적인 수단으로 왕위를 찬탈하고 난 뒤에 자신의 즉위를 정당화할 목적으로 역사를 왜곡한 왕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이긴자들의 기록 중에서도 으뜸을 들라고 하면 아마 조선 건국에 얽힌 이야기가 될 것이다. 하나의 왕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 것이라 시시하게 한 개인이나 당파가 남긴 이긴자의 기록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엄연히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나라를 그 나라의 일부 사람들이 무너뜨린 것이 조선 건국사이다. 따라서 무너뜨린 자의 입장에서는 고려가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고 비정상적인 나라였기 때문에 부득이 새로운 나라로 교체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펼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왜곡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더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의 역사는 고려를 무너뜨린 사람들이 써 놓은 것이다. 결국 이긴자의 관점대로 쓰여 있다는 의미이다. 이긴자들이 써 놓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바탕으로 해서 이 책이 쓰였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내막들을 놓치지 않고 예리하게 파헤쳐 놓았다.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 고려 멸망과 조선 개국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정사를 기준으로 해서 편년체의 형태로 펼쳐진다. 신기하게도 이 책은 정사의 기록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그 기록 그대로를 따르지 않고 있다. 의문이 있는 부분을 작가의 예리한 시선으로 조목조목 파고들어 독자들에게 해소의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한다. 1500매에 이르는 원고지 분량의 긴 글이지만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 과정이 빠르고 흥미진진하게 전개되어 독자들이 길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 - 공민왕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공민왕 하면 떠오르는 것은 개혁이다. 개혁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어감은 여성적이라기보다는 남성적이다. 하지만 그는 나이 서른이 넘을 때까지 말을 타지도 못했고, 사냥도 싫어했으며 바깥나들이도 좋아하지 않았다. 공민왕은 여성적이며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 때문인지 예술적 방면에서의 공민왕의 재질은 뛰어나서 그의 서예와 그림 솜씨가 오늘날까지 명성을 떨치고 있다. 그런 그에게 꼭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잔인한 면이 있었다. 사람을 잘 믿지 못해 심복이라 할지라도 힘이 커진다 싶으면 가차 없이 숙청했다. 나중에 그가 암살될 때 주변에 그가 믿을 만한 심복이 남지 않았다. 그가 암살된 이면에는 그의 성격도 작용한 것이다. - 이성계가 과연 전주 이씨이고 정도전이 천출인 것이 사실인가? 이성계가 전주 이씨가 아니라 여진족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더러 있다. 조선을 건국하고 나라의 기틀을 잡아 나가는 과정에서 정통성 확보를 위해 전주 이씨로 조작했다는 설인 것이다. 전혀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아직 정설로 인정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도전의 경우 조선왕조실록에는 천출로 기록되어 있고, 지금까지 이 기록을 바탕으로 해서 그가 천출로 알려져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행장과 족보에 따르면 정도전의 어머니는 영주 지방 군관의 딸이었다. 이럴 경우 정도전이 천출이 될 수 없다. 다만 행장과 족보는 한 가문의 것이므로 모두가 다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과연 어느 쪽을 따라야 할까? - 위화도 회군은 계획된 것이었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600년이 넘게 지난 오늘날에도 아직 논란이 되고 있다. 미리 계획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과 우발적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견해가 서로 맞서고 있다. 어느 것이 맞다고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이다. 이 책에서는 양측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되 일반 사람들의 동의를 끌어낼 수 있게 결론을 도출해 내고 있다. - 정몽주는 왜 막판까지 정도전과 이성계에게 협조했을까? 무너져 가는 고려를 지키려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쏟다가 결국 이방원에 의해 산화해야 했던 정몽주. 그런 그가 고려 멸망 2년 전까지만 해도 정도전과 이성계에게 협조를 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 조선이 정확하게 언제 건국되었나? 고려가 망하고 바로 조선이 건국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과도기가 있었다. 즉 1392년 7월에 이성계는 고려의 왕으로 즉위한 것이다. 즉위 초에는 고려라는 국호를 그대로 썼고 제도도 그대로 따랐다. 물론 왕궁과 수도도 고려의 것 그대로였다. 엄밀히 따지면 고려의 마지막왕은 이성계가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관심을 가지고 주목해야 할 것 * 이성계가 과연 전주 이씨인가? * 이성계가 여진족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 정도전은 정말로 천출이었을까? * 우왕이 신돈의 자식이었을까? * 공민왕이 정신병자이고 동성애자였을까? * 공민왕 암살범은 누구였을까? * 이인임과 최영의 관계는? * 이성계는 언제부터 왕이 되고 싶은 마음을 먹었을까? * 위화도 회군의 실체는? * 폐가입진의 실체는? * 과전법 전개 과정은? * 왜 정몽주는 이성계와 정도전에게 협조했을까? * 정몽주가 죽지 않았으면 정도전은 어떻게 되었을까? * 조선은 정확하게 언제 건국되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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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임금 잔혹사
조민기 | 책비 | 2014-06-2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10-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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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임금 잔혹사
조민기 | 책비 | 2014-06-2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10-3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5 지원기기:
그들은 어떻게 조선의 왕이 되었는가
이 책은 <조선왕조실록>의 나열이 아니다 로맨스와 야사로 얼룩진 왕들의 이야기 또한 아니다 역사 속 그들이 얼마나 힘겹게 왕위에 오르고, 지켜내고, 또 빼앗기고 쟁취했는지... 조선 임금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생생히 보여준다. 지금껏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 왕의 모습은 어떠한가? 선왕으로부터 평화스럽고도 우아한 방식으로 왕위를 물려받은 뒤, 애민정신과 강력한 왕권으로 조선을 다스렸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정작 우리의 상상과는 달리, 조선의 임금이라는 자리는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조선의 왕자와 왕들은 치열하고도 냉정한 왕위 계승이라는 세계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왔다. 때로 그들은 목숨의 위험을 느끼며 왕위에 오르고 지켜내고 버텨내기도 했다. 이 책은 기존의 <조선왕조실록>의 나열이 아닌,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시선을 가진 역사책이다. 왕으로 태어난 사람과 왕으로 만들어진 사람, 왕자로 태어났지만 왕이 되지 못한 사람. 그들의 불안하고도 우아한 공존을 통해 진짜 조선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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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임유경 | 역사의아침 | 2014-07-08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10-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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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임유경 | 역사의아침 | 2014-07-08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10-3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5 지원기기:
길바닥 인생부터 왕실의 공주까지,
조선시대 여자들의 치열한 삶의 기록 사료에서 찾은 서른여덟 가지 조선 여성의 일생 이 책은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가르치는 저자가 조선시대 여성들이 직접 쓴 편지와 수필, 주변 인물들이 남겨놓은 글을 엮어 조선 여성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책 속에는 기생이나 다모와 같은 천한 직업의 여성부터 양반 규슈와 고귀한 왕실의 공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이 등장하고 있다. 흔히 ‘조선시대 여성’이라 하면 여필종부(女必從夫), 삼종지도(三從之道), 현모양처(賢母良妻), 출가외인(出嫁外人), 칠거지악(七去之惡) 등의 유교 사상에 따라 살아가는 순종적인 모습이 그려진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여성들은 부당한 남성 이데올로기에 항거하고, 죽음 앞에서 망설이며, 인간답게 살고 싶은 욕망을 강하게 드러낸다. 그녀들의 다양한 역사 기록을 통해 우리는 조선시대를 지배한 여성 이데올로기의 작은 균열을 만날 수 있다. 조선 여성들, 금기에 맞서 당당히 자신의 욕망을 말하다 규방의 여자로서 법도를 따라야 하고 미천한 신분에 맞게 분수를 지켜야 한다고 강요하던 시대에도 자신의 욕망을 위해 당당한 행보를 펼친 여성들은 존재했다. 책 속에는 “여자로 태어났다고 장차 방안 깊숙이 문을 닫고 경법만을 지키며 사는 것이 옳은가. 한미한 집안에 났다고 분수를 지키면서 이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옳은가”라며 되묻고 자신만의 길을 떠난 김금원, 여자에게 글을 멀리하게끔 강요하던 조선에서 스스로 학자가 되기를 꿈꾼 강정일당, ‘제주도 여자는 육지에 오를 수 없다’는 편견을 깨고 금강산에 오른 김만덕, 한 남자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산 황진이 등이 나온다. 그들의 행보는 오늘날 우리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용기로 가득했다. 그들이 당당한 행보로 역사에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들을 옭아매는 부당한 현실에 순응하지 않는 자세 때문이었다. 한 사람의 작은 실천은 기록으로 남아 또 다른 한 사람의 인생을 도약하게끔 했으며, 이것이 결국 조선시대 500년을 지배한 유교 윤리와 열녀 이데올로기를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선언이 결국 세상을 바꿀 커다란 힘이 된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준다. 순응과 저항의 경계에서 서성이다 조선 남성들이 집필한 《열녀전》의 여성들은 남편이 어떠한 잘못을 지었든 믿고 따르며, 정절을 지키기 위해 은장도를 차고 다니고, 남편이 죽으면 망설임 없이 따라 죽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들은 마치 아무런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여성들이 직접 남긴 기록은 남성들의 그것과 달랐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죽음 앞에서 망설이면서 살고 싶은 욕망을 강하게 드러냈다. 재령 이씨는 죽은 남편과의 약속 때문에 자살을 택하지만 글 곳곳에 삶에 대한 미련을 남기고 있다. 서흥 김씨는 아버지에게 불효한다는 생각이 죽은 남편을 따라야 한다는 의리보다 앞섰다. 또한 정의롭지 못한 사회와 맞닥뜨렸을 때 자신의 목숨을 걸고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한 여성들도 있었다. 하씨녀는 관아에서 자결함으로써 남편의 죄가 드러나게 했다. 박효랑은 아비의 목숨을 앗아간 원수의 묘를 파헤침으로써 상대방의 죄를 만천하에 공개할 수 있었다. 터무니없는 말을 지어내 자신과 가문을 욕보인 원수를 살해한 김은애와, 남편과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몇 년 동안 추적해 살해한 최씨와 홍씨 모녀는 복수가 남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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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의학에 미친 조선의 지식인들
김남일 | 들녘 | 2014-04-30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10-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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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의학에 미친 조선의 지식인들
김남일 | 들녘 | 2014-04-30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10-3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5 지원기기:
실학자 정약용은 <여유당전서>에 의서를 두 종 포함시킬 정도로 의학연구에 정진했고, 폭군의 대명사로 이미지가 굳어진 세조는 의관에게 깊이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병을 스스로 논할 만큼 의학에 조예가 깊었다. 『한의학에 미친 조선의 지식인들』은 바로 이들처럼 그 실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 했던 유의儒醫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책이다. ‘유의’란 한마디로 유교적 사상을 바탕으로 의학의 이치를 연구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넓은 의미에서는 당시 지식인들 가운데 의학의 이치에 통달했거나 의학연구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을 말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전통의료가 민간의료의 수준을 탈피하여 이론적 근거를 가지게 된 것은 이러한 유의들의 노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 책은 역사 속에 파묻혔던 유의들의 활동과 업적을 좇아 한국 한의학의 위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독보적인 작업의 결과물이다.
베일에 가려진 존재, 유의는 누구인가? 기질과 성향이 어떠한가에 따라 사람마다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과 순서가 달라진다. 하지만 뭔가에 깊이 몰입하는 사람들의 동력을 살피다보면 동일한 코드를 발견하게 된다.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가치인 동시에 자신에게 진리인 그것, 바로 열정이다. 이처럼 열정의 코드를 지닌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갈 때 결과를 계산하지 않는다. 남이 알아주든 말든, 자기가 좋아서 걷기 시작한 길을 그저 묵묵히 따라간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 가운데서도 개인적인 혹은 사회적인 필요에 따라 의학을 벗으로 삼고 평생 이를 연구하면서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일반 독자들에게는 다소 생경할 수 있는 이들을 저자는 ‘유의儒醫’라고 부른다. ‘유의’란 일반적으로 유교적 사상을 바탕으로 의학의 이치를 연구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그 중엔 의학적 지식이나 의료기술에 정통한 학자가 있었는가 하면, 학자라고는 하나 실제로 의학을 전문적인 업으로 삼았던 사람도 있고, 학자였지만 개인적인 필요에 의하여 의학을 연구한 사람들도 있다. 유의들은 문자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사물과 현상을 해석할 때 보다 이성적으로 접근했다. 또 민간의 치료경험이나 전통 비방들을 취합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의서들은 거의 이들 유의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다만 그들의 존재와 위상을 제대로 각인하지 못 했을 따름이다. 유학자의 위상을 넘어 전인적 엘리트로 다시 태어나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 의학은 지식인들인 유자儒者 중심으로 연구되었다. 삼국시대에도 제도상 높은 직임을 가진 의사들이 존재했고, 남북국시대 신라에는 ‘의학醫學’이라는 교육기관이 존재했다. 고려로 넘어가면 과거제도의 정비로 시험을 거친 자들이 의사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학문적 소양이 뛰어난 유의들이 늘어나게 된다. 그리고 유학을 국시로 했던 조선시대에 들어가서는 사회의 일익을 담당하는 집단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는다. 하지만 조선시대만큼 유의들의 활약상이 두드러졌던 시기는 없을 것이다. 조선의 통치이념과 유학의 학문적 지향점, 그리고 의학이 추구하는 바가 본질적으로 일맥상통했기 때문이다. 특히, 민간에서 유학자의 신분으로 의학에 종사하는 의가醫家들이 많아지면서 유의는 의사의 한 부류로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앞서 정의한 바처럼 ‘유교적 사상을 바탕으로 의학의 이치를 연구한 사람들’인 유의들 가운데엔 환자를 진료한 유의, 의서를 편찬한 지식인 유의, 의학적 식견을 바탕으로 담론을 형성하고 학계를 이끈 유의들도 많다. 또 뛰어난 문화 활동으로 이름을 떨친 이도 적지 않다. 요즘 말로 하면 ‘통섭이 가능한’ 엘리트 집단이었던 셈이다. 어쩌면 독자들은 허준, 유이태, 양예수, 전순의 등 몇몇 한의사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유학자 혹은 철학자라는 데 놀랄지도 모른다. 정약용, 박제가, 이익, 이황, 최한기, 그리고 세조 이유, 정조 이산 등이 의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혹자는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어떻게 이 사람들을 의사라고 할 수 있지?” 하면서. 한국한의학의 전통을 세운 조선의 유의들 이 책은 유의에 관한 몇 가지 사항들을 사안별로 정리한 것이다. 그들이 왜 유의가 되었는지, 어떤 활동을 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한의학을 연구했는지, 의서편찬처럼 그 결과를 종합하는 차원에서 이룬 일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등이다. 저자는 우선 그들이 유의가 된 이유로 학문적 탐구심, 가업계승, 사회적 변혁에 따른 진로의 변경, 자신의 건강 문제나 부모의 질병, 주위의 권유, 도교와 양생술에 대한 탐구가 의학연구로 이어진 경우, 이용후생의 실천을 위하여 의원이 된 경우 등을 꼽는다. 그 다음 궁중에서의 치료 활동, 대민 치료 활동, 의학교류, 학술적 논쟁 참여, 정치문화 활동 등으로 유의들의 활동을 나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의학 연구와 의서 편찬에 대해서는 종합의서, 침구학과 외과, 진단학과 소아과, 경험방과 양생의학, 전염병, 약물학과 생활의학, 구급의학과 구황의학, 수의학과 법의학 등의 분야로 나누어 살핀다. 한마디로 『한의학에 미친 조선의 지식인들』은 우리나라의 지식인 한의사들이 어떤 식으로 자연관, 인간관, 질병관, 치료경험 등을 축적하면서 의학사에 기록될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대중의 삶과 사회 변혁에 기여했는지를 밝히는 책이다. 특히 한국한의학사를 빛낸 유의들 안에 빙허각 이씨, 사주당 이씨 등 여성실학자 겸 유의들을 발굴해 포함시켰다는 점, 그리고 전통의학 가운데 일반인에게 생경한 구황의학과 구급의학, 그리고 수의학과 법의학을 강조한 것은 이 책이 지니는 독특한 매력이자 장점이라 할 것이다. 과학만능 시대다. 하지만 민족의학인 한의학은 말살되지 않고 지금까지 존재한다. 이는 수천 년에 걸친 유의의 전통이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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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역사에 사랑을 묻다
서지영 | 이숲 | 2013-11-19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1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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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역사에 사랑을 묻다
서지영 | 이숲 | 2013-11-19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10-2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5 지원기기:
한국인, 그 사랑의 계보학
한국인에게 사랑은 무엇인가? 한국인의 역사와 문화에서 사랑을 간섭하고 규정하는 사회제도와 풍속은 어떻게 변해 왔을까? 결혼과 연애, 풍류와 외도, 불륜과 동성애, 동반자살 등 사랑과 연관된 다양한 현상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었을까? 이 책은 조선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사랑이 실현되는 현상을 문학을 포함한 다양한 문화적 텍스트를 통해 추적한 문화사적 탐구의 결과이다. 지금까지 ‘사랑’이라는 주제는 대부분 서양에서 발원한 해석적 관점이나 서양의 역사적 사례를 중심으로 서양 학자들에 의해 기술되어 왔으나, 이 책은 전근대와 근대를 가로지르는 한국인의 역사에서 사랑의 정체를 포착하려는 문화사적 시도라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이 책은 2011년 간행물윤리위원회 우수저작 및 출판지원사업에 선정되었다. 조선시대 사랑의 역사 이 책의 1부 ‘전근대 사랑의 서사’에서는 중국의 고서『시경(詩經)』을 통해 동양 문화에서 사랑의 원형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탐색하고, 이후 조선시대 소설과 풍속화, 의궤 등에서 형상화한 사랑의 역사를 추적한다. 특히, 조선후기에 이르러 유교 이념이 전 계층의 일상으로 침투하는 과정에서 사랑과 결혼이 분리되는 현상에 주목하여 유교(제도)와 열정(욕망)이 맺는 관계의 양식을 문화사적 맥락에서 살펴본다. 이러한 전근대 시기 사랑의 서사에 대한 분석은 이후 근대 시기 한국 사회에서 재편되는 근대적 사랑의 양식이 전통시대의 사랑과 어떠한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갖는지 이해하는 데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다. 근대 한국인 사랑의 역사 이 책의 2부 ‘근대, 구성되는 사랑의 역사’에서는 서구에서 발원하여 일본을 통해 20세기 초 조선에 유입된 근대적 사랑이 어떻게 구성되고 확산되었는지, 그 과정을 추적한다. 또한, 사랑에 대한 담론이 의사소통 매체의 발달에 힘입어 광범위하게 양산되었던 당대의 정황을 바탕으로, 소설자료뿐 아니라 신문, 잡지 등 각종 대중매체의 자료, 연애에 관련된 여타 풍속자료들을 대상으로 한다. 특히, 20세기 초, 조선에 등장한 근대적 사랑이 동아시아 근대국민국가 담론과 일부일처제의 형성과 깊이 연루되어 있었던 당시의 사회역사적 의미망을 살핀다. 또한, 서양에서 기원한 근대적 연애 담론이 조선의 역사적 특수성과 만나는 지점에 주목하고, 새로운 사랑의 형식이 조선의 현실에서 실험되는 과정에서 이상적 사랑의 플롯이 변형되고 굴절되던 양상을 밀도 있게 다룬다. 이 책에서 저자가 시도한 ‘사랑에 대한 역사적 탐문’은 궁극적으로 오늘날 한국 사회의 사랑과 열정이 과연 어떤 다층의 역사적 체험 위에 서 있으며,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현재적 성찰로 이어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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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왕조실록 - 영광과 좌절의 오백년
이상각 | 들녘 | 2014-04-22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1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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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왕조실록 - 영광과 좌절의 오백년
이상각 | 들녘 | 2014-04-22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10-2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5 지원기기:
실록으로 복원한 조선왕조 오백년의 실제 역사
‘조선왕조실록’과 관련된 역사서는 이미 많이 출간되었다. 대다수 독자들 역시 전문가의 수준은 아니더라도 조선왕조사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역사서들은 아직까지도 야사의 묵은 때나 역사를 희망으로 포장하는 고루한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엄격한 기준을 거친 정사보다 더 진실로 받아들여지고 굳어지기도 했다. 저자 이상각의 『조선왕조실록』은 이 같은 일방적이고 단순한 관점을 벗어난 새로운 시각의 역사서다. 그는 역사의 흐름에 맞춰 인과관계를 충실히 파악한다. 당시의 복잡다단한 상황과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 숨 쉬고 있는 인물들의 내면까지 침투하여 정밀하게 분석한 후 역사를 복원한다. 가령 아직까지도 기존 역사서에서 ‘희대의 폭군’이라는 족쇄에 얽매여 있는 연산군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저자는 실록을 통해 연산군을 날로 거대해지는 신권에 대항하여 절대왕권을 확립하려던 군주로 평가한다. 중종반정은 지나친 왕권중심의 패도정치를 지향하던 연산군이 조민벌죄, 폭군방벌이라는 성리학적 반정논리를 구실 삼은 신료들에게 일방적으로 축출된 사건이었다. 그 결과 반정주체인 훈신들은 권력을 움켜쥐었지만, 명분의 부재와 이후 부도덕한 행태로 중종 대부터 조선의 정계를 지배한 사림파에게 비열한 존재로 규정되었다. 기실 연산군 대의 폭정으로 일컬어지는 모든 정책은 그들의 손에 입안되고 실행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격으로 연산군일기를 마음껏 주물러 사상 최악의 폭군을 창조해냈다. 연산군 이후 조선의 왕권은 오랫동안 신권을 넘어서지 못했고 강력한 왕권을 지향하는 군주는 광해군처럼 도덕적인 비난을 받으면서 축출당할 수밖에 없었다. _「연산군일기」에서 승자들의 명분을 위해서 연산군은 폭군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패배자뿐 아니라 명망 높은 인물에 대해서도 우리가 몰랐던 치적을 평가한다. 저자는 훈민정음 창제를 최고의 치적으로 평가받는 세종에 대해 후세에 주목받지 못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훌륭한 업적을 소개한다. 오히려 훈민정음 창제가 또 다른 업적을 잠식한 셈이다. 1432년(세종 14년) 세종은 이순지, 김담 등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들을 따로 불러 모아 정인지 팀과는 별도로 서역의 회회력이 바탕이 되는 새로운 역법 개발을 명했다. 그 결과 10년 뒤인 1442년(세종 24년) 칠정산외편을 완성하여 조선은 중국으로부터 완전한 시간의 독립을 이루어냈다. 당대에는 세종의 최고의 치적을 훈민정음보다는 칠정산외편을 꼽았다. 어쩌면 세종이 칠정산외편 개발 사실을 명나라에 숨기기 위해 내편 팀을 공식화했던 것으로 추측된다._「세종실록」에서 이 밖에도 계유정난 직후 수양대군과 사육신의 돈독했던 관계, 아들 내외와 손자들까지 직접 제거했던 인조의 잔혹함 등 실제로 벌어졌지만, 사실조차 알지 못했던 역사가 펼쳐진다. 저자는 이러한 사건과 인물을 밝혀내고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의미를 부여한다. 분열과 절망 속에서 찾는 조선의 역동적인 힘 조선의 역사는 고난으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려 말부터 쉴 새 없이 계속됐던 왜구의 노략질은 1592년 20여 만 대군이 침입하는 임진왜란으로 이어졌고, 전란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정묘호란이 벌어졌다. 비단 크고 작은 전쟁만이 나라를 뒤흔든 것은 아니었다. 홍수, 흉년 등의 자연재해와 전염병은 몇 년을 주기로 벌어졌다. 대기근이라 불릴 만한 기록만 해도 선조, 현종, 숙종, 영조, 헌종 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현종 대(1671~1672년)의 ‘경신대기근’은 국가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로 심각했다. 그러나 정치는 세월이 갈수록 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헤게모니 싸움으로 치달았다. 기존의 역사서는 이러한 조선의 역사를 아름답게 바라본다. 희망과 긍지가 담긴 역사로 포장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관점과 정반대편에 서서 조선의 역사를 관조한다. 오로지 실록에 의거해 객관적으로 파악한다. 그의 눈에 비친 조선의 역사는 한 마디로 ‘분열과 절망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500년 넘게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분열과 절망 속에서도 민족의 뿌리를 지켜내려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분석하고 해석하는 『조선왕조실록』은 이처럼 기존의 실록과 많은 부분에서 차이를 보인다. 독자는 전혀 새로운 나라, 조선의 숨겨진 이면을 만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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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왕조실록으로 오늘을 읽는다
이남희 | 다할미디어 | 2014-02-12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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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왕조실록으로 오늘을 읽는다
이남희 | 다할미디어 | 2014-02-12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19)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조선왕조실록'으로 오늘을 읽는다
- 오백년간 왕들조차 볼 수 없었던 진실의 기록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 총 1,893권 888책의 방대한 분량에 이르는 조선왕조실록이 우리와 가까워진 것은 조선왕조실록의 디지털화 작업 덕분이라 할 수 있다. 몇 년에 걸쳐서 열심히 조사해야 찾아낼 수 있는 자료를 단 몇 초 만에 검색해 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옥스퍼드대학의 조선시대 연구자 제임스 루이스(James Lewis) 교수가 '혁명'(This is a revolution!)이라 탄복했을 정도였다. "과연 조선시대에는 어떠했을까?", "거꾸로 조선시대라면 이런 일들은 어떻게 처리했을까?"이 책은, 『CD-ROM 조선왕조실록』 디지털화 작업에 직접 참여했던 저자가, 오늘날 일어나는 중요한 일들을 보면서 가졌던 물음들에 대한 답을 모색한 글이다. "오늘의 시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읽어보고자 한 것이고, 역으로 조선왕조실록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읽어보려 한" 시도였다. 이런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오늘에 살아 있는 역사'를 만나게 되고, '역사를 통해서 살아가는 오늘'을 되새기게 된다. 저자는 조선왕조실록이 지닌 의미와 가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오백년에 걸친 기록이라는 특성 그 자체도 그렇지만, 거기에 담겨 있는 내용의 다양함과 깊이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한 보물창고와 같다는 것, 퍼내도 퍼내도 결코 마르지 않는 샘과 같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누구든지 자신의 보물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 등. 그런 만큼 이 책이 ‘조선왕조실록에서 보물찾기’ 놀이의 안내자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번에 내놓는 『조선왕조실록으로 오늘을 읽는다』는 기존의 『클릭! 조선왕조실록』을 토대로 하고 있지만 수정 보완하는 작업 과정에서 외형과 내용에서 달라진 점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관련된 사진 자료를 다양하게 수록했다. 이는 한국학중앙연구원『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사진을 촬영했던 유남해 선생님의 도움으로 다양한 사진을 함께 하여 이해의 폭을 넓게 했다. 조선시대 5백 년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은 단일 왕조사로는 세계에서 최장 기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앞에 언급했듯이 총 1,893권 888책의 방대한 권질卷秩에 이른다. 그 형식은 일기식으로 기록한, 이른바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이다. 하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기전체紀傳體, 기사본말체記事本末體 등의 형식을 채택하여 나름대로 다양한 서술 방식을 택하고 있다. 예컨대 『세종실록』에는 오례, 악보, 지리지, 칠정산七政算(역법서)이, 『세조실록』에는 악보가 실려 있다. 그 내용에서는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은 물론이고 각 분야에 걸쳐서 역사적 사실을 총체적으로 망라하고 있다. 더욱이 조선왕조실록은 정확한 사실적 기록이라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사관은 정론正論과 직필直筆을 생명으로 삼았다. 대신과 관료들은 물론이고 왕이라 해도 잘못이 있으면 직필로써 역사의 심판을 받게 하였다. 인물과 사건에 대한 사신의 논평 기사가 그것인데, 거기에는 국왕에 대한 비판 기사도 많다. 보복을 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사관들의 신분은 철저하게 보장되어 있었으며, 또한 사초史草는 국왕이라도 마음대로 볼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우리 문화와 역사의 무궁한 보고寶庫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전통 문화 역시 시대에 걸맞는 형태로 재창조되어야 할 것이다. 전통의 현대화라 해도 좋겠다. 콘텐츠의 보고 조선왕조실록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 ‘보물찾기’ 하는 일만 남은 셈이다. 책은 크게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조선의 문화와 생활, 제2부 조선의 사회와 유교, 제3부 조선의 법과 정치, 제4부 조선의 무역과 경제. 살인, 성과스캔들, 이혼과 재혼, 인사청탁, 언론자유, 탄핵, 자연재해, 국제무역, 외국인, 의관과 의녀, 왕실의 웰빙문화 등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슈들을 선택해서 '조선왕조실록'의 원문을 인용해 가며 그 해법을 제시한다. 인용한 실록 기사에는 충실한 전거를 덧붙여 그 분야의 관련 자료로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으로 오늘을 읽는다』는 동북공정, 대운하, 한미 FTA, 영어 공용화, 독도 영유권 분쟁, 부동산 대책, 대학 입시 등 끊임없는 논쟁을 낳고 있는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슬기로운 해결책을 모색해 보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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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프로페셔널
이수광 | 시아퍼블리셔스 | 2013-10-2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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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프로페셔널
이수광 | 시아퍼블리셔스 | 2013-10-2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4-03-19)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열정에 춤을 추고 혼을 노래하네”
인간의 애(哀)와 한(恨)까지도 예술로 승화시킨 선인들의 삶 이 책 <조선의 프로페셔널 : 명인, 영혼을 불사르다>은 저자가 젊은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는 맥이 끊어진 전통의 장인들과 예인들의 삶을 복원하여 사라지고 잊혀져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전하고자 집필한 책이다. 세월의 흐름과 조선시대 장인의 정신을 그대로 간직한 생활용품, 건축물, 그림과 시와 같은 예술품의 뛰어난 예술성과 가치에 우리는 감탄하지만 정작 그것을 만든 장인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예술품을 만든 대부분의 장인들과 예인들은 신분이 비천하여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인간의 애와 한까지도 예술로 승화시킨 조선시대 장인과 예인의 삶을 복원하여, 사라지고 잊혀져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전한다. 조선시대 명인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열정 사라지고 잊혀져가는 것들에 대한 헌사 역사는 기록하고 전승하지 않으면 사라지고 잊혀지기 마련이다. 우리 주변에 널린 생활용품, 건축물, 그림, 시…. 우리 주변에는 조선시대 장인과 예인, 국수, 문향이 남긴 많은 예술품들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장인들은 신분이 비천한 까닭에 그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경복궁의 근정전 같은 거대한 공사를 하면서도 이 역사에 참여한 장인의 이름이나 기술을 기록하지 않아 조상의 훌륭한 기술에 대한 전승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장인들에게도 삶이 있고 사랑이 있었다. 자신의 비천한 신분에 절망하여 술과 여자로 일생을 마감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도 오로지 장인 정신으로 명품을 만들어낸 장인도 있었다. 저자 이수광은 이렇게 우리가 잊어버린 조선시대의 장인의 삶을 방대한 역사 자료를 뒤진 끝에 이 책 <조선의 프로페셔널>에 남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