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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음식과 전쟁
톰 닐론 | 루아크 | 2019-04-11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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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음식과 전쟁
톰 닐론 | 루아크 | 2019-04-11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25)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120여 장의 일러스트와 함께 보는
숨겨진 맛의 역사!
《음식과 전쟁》은 인류 역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음식과 관련한 다양한 에피소드를 120여 장의 희귀 일러스트와 함께 흥미진진하게 풀어낸 책이다. 고문서 수집가인 톰 닐론은 ‘잉어와 민중 십자군’ ‘레모네이드와 페스트’ ‘칠리와 식인 문화’ ‘카카오와 무역 분쟁’ 같은 주제를 통해 음식을 향한 인간의 열망과 분투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혁명, 전쟁, 탐식의 역사에 숨어 있는
매혹적인 음식 이야기!
인류 역사에서 음식은 항상 ‘조연’이었다. 세계사 속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음식은 대개 이야기와 이야기를 이어주는 하나의 매개였지 ‘주인공’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인간의 일상에서 음식, 곧 먹는 것과 관련한 일은 때로는 목숨을 걸고 지켜내거나 쟁취해야 할 만큼 중요했다. 전쟁이 발발하거나 혁명이 일어났을 때도, 전염병이 창궐하거나 기근이 닥쳤을 때도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무언가를 먹어야 했으며, 때로는 무언가를 먹기 위해 전쟁이나 혁명이 필요한 적도 많았다. 어쩌면 더 맛있는 음식을 더 배부르게 먹기 위한 인간의 욕망이 다툼의 근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인간에게 먹는 행위는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음식과 관련한 역사 기록은 그 중요성만큼 음식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 대개 구체적이지 않거나 단편적으로 서술될 뿐이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잊혔고, 우리 배를 채우는 일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부적절한 일인 것처럼 여겨져 이 주제는 결국 역사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이 책 《음식과 전쟁》의 저자인 톰 닐론은 책 도입부에서 이런 아쉬움을 토로한다.
“1623년에 암본섬에서는 정향 공급을 둘러싸고 아주 작은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 대한 역사 기록은 남아 있지만, 화폐적 가치를 넘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정당화될 만큼 정향이 왜 그리 각광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새뮤얼 피프스나 존 이블린 같은 일기작가나 역사가들은 가끔 동시대인이 먹는 음식이나 새로 문을 연 식당을 두고 가치 있는 관찰을 하기도 했지만, 그들 역시 당대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음식을 먹었으며 그 음식들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못했다. 음식은 분명히 존재했지만, 매일 만들고 먹는다는 사실에 가려져 현대인들에게는 오히려 미지의 존재가 되어버린 듯하다.”
고대 요리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레시피를 취미 삼아 재현해보곤 했던 톰 닐론은 음식과 관련한 오래된 서적을 본격적으로 수집하면서 그 안에 담긴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여러 매체에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모아 이 책 《음식과 전쟁》에 담았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다양한 주제의 음식 이야기들은 음식 역사의 공백과 부정확함을 메워줄뿐더러 음식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인류사 속 혁명과 전쟁과 탐식이라는 주제와 무척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잉어 양식과 십자군 전쟁, 레모네이드와 17세기 유럽을 휩쓴 페스트, 식인문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육 요리 레시피, 카카오를 차지하기 위한 서구 열강들의 무역 전쟁에 관한 이야기들이 그것이다. 저자는 대영도서관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도서관, 미술관, 헌책방에서 찾아낸 희귀 자료를 토대로 음식 이야기를 매혹적으로 풀어낸다.
120여 장의 화려한 일러스트를 통해 보는 음식의 역사!
열 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는 각 장마다 흥미로운 주제가 담겨 있다. 먼저 1장에서는 중세 유럽에서 일었던 잉어 열풍과 십자군 물결을 연결 지어 풀어냈고, 2장에서는 17세기 유럽을 휩쓸었던 전염병이 프랑스 파리만 비켜간 데에 레모네이드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본다. 3장에서는 육군과 해군의 보급품 무게를 덜기 위해 개발이 시작된 휴대용 수프 이야기를 다루었고, 4장에서는 카리브해의 식인 문화가 현대 문명에 끼친 영향을 조명했다. 5장에서는 루이 14세의 저녁 만찬과 혁명을 연결 지었으며, 6장에서는 우스터셔소스의 발견으로 본격화된 소스 개발 경쟁을 언급한다. 7장에서는 카카오를 둘러싼 유럽 열강들의 분투를 담았으며, 8장에서는 바비큐 문화의 본류를 추적하며 그 진짜 의미를 되새겨본다. 9장에서는 페이스트리를 둘러싼 멕시코와 프랑스의 갈등을 들여다보고, 마지막 10장에서는 걸쭉한 음식을 향한 인간의 욕망을 이야기한다.
다양한 주제와 더불어 이 책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것은 톰 닐론이 수집한 120여 장의 일러스트라 할 수 있겠다. 고문서에 수록된 삽화에서부터 중세 화가의 판화나 소묘, 그리고 오래된 요리책에 담긴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화려하고 진귀한 일러스트들은 본문과 어우러져 읽는 즐거움을 더한다.
저자가 책 도입부에서 밝혔듯 “음식의 의미를 미화하지 않으면서 음식이라는 일상적 존재를 격상”시키는 데에 이 책은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음식을 둘러싼 역사와 그 문화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큰 재미를 선사할 것이다.
? 본문 중에서
1096년 시비토트전투에서 민중 십자군이 갑작스럽고도 수치스러운 최후를 맞이하기 직전, 묘하게도 은자 피에르는 보급품을 요청한다는 이유로 콘스탄티노플로 향한 덕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술탄의 간첩들이 퍼뜨린 거짓 소문 때문에 대담해진 십자군은 마음껏 약탈할 기회와 눈앞의 승리를 꿈꿨지만, 터키인들에게 기습을 당해 패배하고 만다. 은자 피에르는 아미앵으로 도망쳤다. 와인 몇 병과 잉어와 함께 유럽에 양어법을 보급하겠다는 불타는 열망을 품고 돌아간 것 같다. 이후 200년 동안 잉어를 먹은 십자군의 물결은 싸우고 배우고 파괴하기 위해, 또 먹기 위해 성지로 향했다.
유럽에서는 잉어가 급격히 대중화되었고, 어류 양식은 성황을 이루었다. 가톨릭교회가 금요일마다 육류 먹는 것을 금지한 데다 내륙에서 바닷물고기 구하는 게 어려웠던 탓에 매주 수요가 생겨난 것이다. 푸짐한 잉어는 여러 세기 동안 식탁의 중심을 차지했다. 사실 중세시대를 통틀어 수도원이나 장원, 작은 마을은 잉어로 가득 찬 연못을 보유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잉어가 영국해협을 건너기까지는 시간이 좀더 걸렸지만, 17세기에는 영국 요리책에 잉어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잉어를 주제로 한 별도의 분량도 할애되었다.
_1장 〈잉어와 민중 십자군〉 중에서
1668년 여름 파리가 전염병으로부터 안전했던 것은 오로지 레몬 덕이라고 생각한다. 파리에서 레모네이드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 전염병이 도시를 엄습했을 당시에는 거리의 레모네이드 공급업자들이 레모네이드 사업을 장악하고 있었던 듯하다. 레모네이드는 무척 인기가 있었을 뿐 아니라 흔하기까지 했다. 레모네이드 판매업자들 덕에 도시 전역에서 손쉽게 사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레몬(혹은 다른 감귤류)에 함유된 리모넨이라는 성분은 자연 살충제이자 구충제다. 특히 레몬 껍질에 리모넨이 가장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다. 실제로 미국환경보호청이 일반 해충 스프레이나 애완동물에 기생하는 벼룩과 진드기 퇴치제에 들어 있는 열다섯 가지 살충 성분 가운데 리모넨을 가장 효과적인 성분으로 꼽았을 정도다. 프랑스인들은 에그르 드 세드르를 만드는 데 쓰인 레몬 껍질과 짓이긴 레몬을 ‘벼룩-시궁쥐-사람-시궁쥐’라는 감염의 순환 사슬을 깨기 위한 가장 적합한 장소에 내다버렸는데, 그곳은 바로 쓰레기장이었다. 이렇게 해서 파리는 비록 우연일지라도 레몬 때문에 전염병으로부터 효과적인 보호를 받았다.
_2장 〈레모네이드와 전염병〉 중에서
식인에 대한 가장 유명한 초기 기록은 한스 스타덴이 쓴 브라질 투피남바 원주민에 대한 보고서다. 1557년 독일에서 간행된 이 기록은 “신세계 아메리카의 야생적이고, 벌거벗었으며, 냉혹하고, 사람을 잡아먹는 부족에 대한 실화와 묘사”라는 서술적인 제목이 붙었다. 스타덴의 책에는 투피남바족이 일정한 규칙을 정해놓고 사람을 먹는다고 나와 있다. 즉 대부분은 구워서 먹지만, 집안 행사에서는 가끔 끓여서 먹는다는 것이다. 이런 관습은 위대한 프랑스 인류학자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이론의 주축을 이룬다. 다시 말해 식인종들은 그들이 물리치고 싶은 상대는 굽고, 아끼는 상대는 끓인다. 적에게는 불, 가족에게는 물인 것이다. 투피남바족은 어린이와 여자를 위해 내장 스튜를 만들기도 했는데, 그 이름이 마치 메누도(menudo, 소나 돼지의 위장으로 만든 매운 맛의 멕시코 수프)나 필리핀의 선지 수프인 디누구안(dinuguan)과 비슷한 밍가우(mingau)로 들린다(놀라운 건 이는 현재 미국 쇠고기 육포 회사의 이름이다).
_4장 〈누구나 가끔은 누군가를 먹는다〉 중에서
영국인들은 초콜릿에 열광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초콜릿을 파는 상점들이 해크니 지역(영국 런던의 자치구?옮긴이)에 최근 유행하는 술집처럼 우후죽순 생겨났다. 새뮤얼 피프스의 1661년 4월 24일자 일기의 도입부에는 아침 식사로 초콜릿을 마셨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당시 초콜릿은 속을 달래는 숙취 해소제로도 권장되었다. 대개 물과 후추, 정향, 아니스 같은 향신료를 섞어 뜨겁고 달콤하게 마셨던 초콜릿 음료는 곧 커피와 경쟁 관계에 놓였다. 초콜릿을 상류층만 누릴 수 있는 사치품으로 여긴 스페인이나 프랑스와 달리 영국에서는 누구나(적어도 차의 두 배 혹은 커피의 네 배 가격을 지불할 능력이 있다면) 상점이나 카페에서 초콜릿을 구입할 수 있었다. 초콜릿과 커피를 파는 상점에서는 싸움과 도박도 많이 일어났지만, 심각한 혼란이 야기될 정도는 아니었다. 영국은 카리브해에서 설탕과 카카오 공급망을 지배했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큰 무역국이자 초콜릿 음료의 소비가 가장 많은 곳이 되었다.
_7장 〈카카오와 분쟁〉 중에서
버커니어(buccaneer, 해적이라는 뜻)와 바비큐(barbecue)라는 말은 고기를 천천히 익히거나 건조시키는 데 쓰이는 장작을 가리키는 타이노어의 바바코아(barbac?a)를 공통 어원으로 갖는다. 콜럼버스시대 이전에 카리브해 원주민 부족인 타이노족은 생선 요리와 육포라고 하는 저장용 고기를 주로 만들었다. 카리브해의 악명 높은 해적들을 묘사하는 단어가 야외에서 요리하는 방법과 관련한 단어와 동일한 어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음침하고 용서받을 수 없는 직업을 낭만적으로 표현하는 위험을 감수한다면, 버커니어(해적)는 ‘야생의 길들여지지 않은, 문명의 주변부에서만 영원하면서도 편안히 존재하는, 7대양에서 바비큐를 해먹는 사람들’을 뜻한다. (…) 미국은 가장 발전된 전통의 발상지일 수는 있지만, 미국만 그 전통을 누렸던 건 아니다. 다른 지역 사람들도 바비큐를 즐겼다. 아랍 베두인족의 풍습인 사막의 모래 오븐에서 염소를 비롯한 여러 고기를 채소와 함께 천천히 조리하는 자릅(zarb)은 계속 지켜지고 있는 강력한 전통이다. 아르헨티나의 아사도(asado), 브라질의 슈하스코(churrasco), 남아프리카의 브라이(brai)를 포함한 여러 지역의 바비큐 방식도 잘게 자른 고기를 약한 불에서 천천히 조리한다. 이 세 방식은 현대 서구 사회에서 바비큐로 알려진, 곧 불에 고기를 직접 굽는 그릴과 닮았지만, 콜라겐을 젤라틴으로 바꾸기 위해 시간과 온도의 균형을 적절히 유지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_8장 〈삶, 자유 그리고 부드러움의 추구〉 중에서
1838년 프랑스는 멕시코를 침략했다. 표면상으로는 미지급된 채무를 징수한다는 명목에서였다. 이 갈등의 기원은 10년 전인 182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멕시코시티에 이웃한 타쿠바야에서 르몽텔이라는 신사가 운영하던 프랑스식 페이스트리 상점이 멕시코 군대에게 이른바 피해를 입은 것이다.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장군 휘하의 멕시코군이 가게에서 일하던 프랑스인 두 명을 죽였다거나, 단순히 상점의 페이스트리만 훔쳤다는 설도 있다. 이야기는 계속되는데, 1832년 멕시코 정부에 보상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한 르몽텔은 다시 프랑스 정부에 6만 페소(누군가가 계산해보니 상점 가치의 60배가 넘었다)라는 말도 안 되는 보상을 요구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프랑스는 결국 르몽텔의 요구액을 멕시코 채무에 합산했고, 외채는 모두 60만 프랑으로 불어났다. 이와 관련된 살인, 파괴, 절도, 채무 같은 것에 대해 개략적으로만 조사해보더라도 이 사건이 페이스트리전쟁으로 불릴 어떤 이유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 어떤 것도 이 사건의 진실을 입증하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프랑스와 멕시코 사이의 외교적 노력을 다룬 역사 기록 어디에도 르몽텔의 보상 요청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멕시코인들은 ‘페이스트리전쟁’이라 일컫기를 고집했고, 다른 이름으로는 절대 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_9장 〈케이크를 맛보다〉 중에서
중세시대에는 소스나 양념이 대부분 묽었다. 이를 진하게 만들기 위해 가장 널리 쓰인 방식은 빵 부스러기를 넣거나 (기묘하고 비싼) 아몬드를 갈아서 섞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실용적이지 않았는데, 음식을 진하게 하기보다는 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계피 식초가 들어간 카멜린소스, 녹색 소스로 알려진 파슬리소스, 버주스(익지 않은 포도로 만든 포도주)로 만드는 아그라즈소스처럼 훌륭하면서도 많이 쓰인 소스는 대개 매우 묽었다. (…) 사실 음식에 점성을 더하는 성분을 첨가하는 유행은 유럽의 식민주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자리 잡았다. 유럽 열강들이 전 세계적으로 토착민들을 성공적으로 복속시키고 그들에게 설탕이나 향료, 그 밖의 선택된 농작물을 경작하게 하면서 음식을 진하게 만들 수 있는 녹말을 포함한 새로운 작물도 여럿 발견했다. 카리브해 연안의 칡가루(Arrowroot), 브라질의 타피오카(tapioca), 일본의 가타쿠리코(katakuriko), 남미의 감자전분, 북미의 옥수수전분, 뉴기니의 사고(sago, 사고야자 나무의 수심에서 나오는 쌀알 모양의 흰 전분)는 모두 16~18세기에 발견되어 상업화되었다. 이런 첨가물은 아스픽, 젤리, 푸딩을 만드는 데 특히 유용해서 17세기에는 매우 대중화되었다.
_10장 〈걸쭉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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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자치통감
사마광 | 현대지성 | 2019-04-29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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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자치통감
사마광 | 현대지성 | 2019-04-29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25)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세종대왕이 필독서로 삼고 시진핑이 일독을 강조한
중국 최고 역사서의 정수를 한 권으로 만나다!
“옛날의 흥함과 쇠함을 거울삼아 지금의 득과 실을 알고자 한다.”
『자치통감』은 사마천의 『사기』에 필적하는 역사 대작으로, 송나라의 정치가이자 역사학자였던 사마광이 19년에 걸쳐 전국시대부터 송나라 건국 직전까지 1,362년간의 역사를 294권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가 권력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 갈고닦은 날카로운 정치적 감각과 통찰로 엮은 이야기들은 “후대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책”으로 끊임없이 칭송받아 왔다. 세종대왕은 『자치통감』을 널리 권했으며 손수 해설을 덧붙여 편찬할 정도로 『자치통감』에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마오쩌둥은 『자치통감』을 17번이나 읽었고, 시진핑은 이 책을 사회 지도층의 교과서로 삼고자 했다. 선비들이 사랑하고 황제들이 즐겨 읽던 책도 바로 이 『자치통감』이다.
『한 권으로 읽는 자치통감』은 ‘제왕의 교과서’로 불리는 『자치통감』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58편의 이야기를 선별하여 엮었으며, 각 이야기마다 생생한 삽화를 넣어 역사의 장면을 그려볼 수 있도록 하였다. 천년의 이치를 한 권으로 묶은 『한 권으로 읽는 자치통감』은 오늘 같은 불확실한 현실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만 리를 내다보는 지혜의 등불이 되어줄 것이다.
지금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책 『자치통감』
그 방대한 1,362년의 역사를 58편의 이야기로 꿰뚫다
세종대왕이 필독서로 삼고 시진핑이 지도층에게 일독을 강조한 중국 최고의 역사서, 『자치통감』. 대정치가이자 역사학자였던 사마광이 19년의 세월에 걸쳐 완성한 『자치통감』은 300만 자, 294권, 1,362년의 역사를 아우른다. 북송의 신종은 이 걸작에 ‘지난 일을 비추어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로 삼아야겠다’는 의미에서 거울 감鑑자를 쓰는 ‘자치통감資治通鑑’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자치통감』은 세상에 나온 이래 역대 황제와 리더들의 길잡이가 되어 왔다. 세종대왕, 마오쩌둥, 시진핑은 물론이고 불확실한 현실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수많은 이들이 『자치통감』을 펼쳐들었다.
『한 권으로 읽는 자치통감』은 ‘제왕의 교과서’ 『자치통감』을 가장 효율적으로 압축했다. 294권이라는 엄청난 분량 속에서 가장 흥미롭고 의미 있으며 교훈을 주는 58편의 이야기를 선별하고 삽화를 곁들여 이 거대한 고전의 세계를 부담 없이 탐험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한 권으로 읽는 자치통감』은 바른 길을 비추는 거울이 될 것이다.
『자치통감』, 대정치가의 눈으로 걸러낸 역사의 정수
사마광은 왜 19년에 걸쳐 힘들게 『자치통감』을 편찬했을까? 『자치통감』 이 나오기 전 중국 최고의 역사서는 단연 사마천의 『사기』였다. 하지만 『사기』는 개인 전기를 모아놓은 기전체였기 때문에 중복되는 내용도 많았고 그 분량도 어마어마했다. 역사서들이 모두 이를 따라하였기에 사마광 시대에 이르러서는 당시 존재하던 정사正史만 해도 1,500만 자에 이를 정도였다. 그래서 사마광은 상소를 올린다. “신은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 이후로 역사책들이 번거로울 정도로 많아짐을 걱정해왔습니다. 벼슬 없는 백성조차도 다 읽을 시간이 없는데, 하물며 하루에 만 가지 일을 처리해야 하는 황제께서 어느 겨를에 이를 두루 읽으오리까?” 사마광은 역사 속 수많은 사건들 중에서도 의미 있는 부분을 추려내 “읽을 수 있는” 역사책을 펴내고자 했다. 결국 전국시대부터 송나라 건국 직전까지 1,362년간의 역사를 총 294권, 약 300만 자의 최초의 편년체(연대순) 역사서로 기록된 『자치통감』이 완성되었다.
세종대왕, 마오쩌둥, 시진핑… 『자치통감』을 사랑한 사람들
『자치통감』은 동아시아 각국으로 널리 퍼졌으며, 중국 역대 황제들의 필독서였고 후대의 리더와 지식인들로부터 최고의 책으로 칭송받아왔다. 청나라 사학자 왕명성은 “지금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책이니 학자들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라고 평했고 청나라의 정치가이자 학자였던 증국번은 “나라 다스리는 이치를 논한 책 가운데 사마광의 『자치통감』만한 것이 없다.”라고 말했다. 현대 중국을 세웠다고 할 수 있는 마오쩌둥은 『자치통감』을 17번이나 읽었고, 중국 국가 주석으로 취임한 시진핑은 취임 이래 정부를 재정비하면서 지도 계층의 필독서로서 『자치통감』을 강조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자치통감』은 빠지지 않는다. 세종대왕은 『자치통감』을 수시로 읽었으며, 신하들에게도 이 책을 널리 권했고 경연 교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단순히 여러 번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손수 해설을 덧붙인 『자치통감훈의』의 편찬을 지휘할 정도로 깊은 애정을 보였다. 정약용, 이덕무, 김옥균 등도 『자치통감』을 아꼈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마다 그들은 책을 펼치고 역사를 거울삼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
왜 『자치통감』인가?
『자치통감』 이후 이를 따라한 수많은 책들이 나왔지만 이와 같은 명성을 얻은 책은 없다. 왜일까? 그 이유는 바로 사마광이라는 사람에게 있다. 사마광은 20세에 진사에 급제한 뒤 정치의 중심에 섰다. 낙양으로 떠난 이후에도 그의 명성은 여전했다. 그는 네 명의 황제를 섬겼으며 여러 벼슬을 거친 끝에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런 그가 냉철한 정치가의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본 결과물이 바로 『자치통감』이다. 『자치통감』에는 역사적 사실뿐만 아니라 막대한 평론까지 가미되어 있다. 사마광은 수많은 사료들 속에서 의미 있는 사건을 걸러냈을 뿐만 아니라 필요하다면 첨언도 서슴지 않았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내용만을 남기고자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역사의 내용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거나 엄밀한 사실을 바꾸려고 했단 말은 아니다. 사마광은 오히려 수많은 사료를 비교해 가장 신뢰할 만한 사실만을 골라냈다. 그가 한 일은 방대한 역사를 거르는 체 역할에 가깝다. 그 누구도 역사의 사건 하나하나를 전부 알 수는 없으며, 결국 어느 부분을 중점적으로 볼지 선택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자치통감』은 황제와 지도자를 위해 가장 훌륭한 체로 걸러낸 역사의 정수라 할 수 있다.
『한 권으로 읽는 자치통감』, 무엇이 다른가?
우리는 사마광이 말했던 “만 가지 일을 처리하는 황제”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94권의 고전을 읽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실제로 『자치통감』을 읽기 쉽게 축약하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있어 왔다. 『자치통감강목』과 『통감절요』를 비롯한 수많은 책들이 이미 존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치통감』을 현대인의 시선에 맞추어 새롭게 걸러낼 필요가 있었다. 『한 권으로 읽는 자치통감』은 이 방대한 고전의 세계로 들어가는 단단한 입문서가 되고자 한다.
『한 권으로 읽는 자치통감』은 58편의 이야기로 자치통감의 핵심을 소개한다. 여러 곳에서 중복되어 접할 수 있는 이야기들은 최대한 제외하면서 역사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자치통감』에서 가려 뽑은 이야기들은 우리의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예를 들어, 후계자 하나를 잘못 세워 가문 전체가 고꾸라진 지선자智宣子의 이야기에서는 한창 사회면을 달구는 특혜 논란을 떠올릴 수 있고, 서진西晉의 멸망에 대해 기록한 대목인 ‘관리를 뽑는 제도는 유명무실했고 황제의 친척 자제들이 파격적으로 임명되었다. 신하들은 전부 갖은 수단을 다해 명예를 추구했고 나라를 위한 생각은 전혀 없었다.’에서 우리 사회가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읽어낼 수 있다.
또, 『한 권으로 읽는 자치통감』은 역사에서 교훈과 더불어 재미를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적합한 책이다. 『초한지』로 우리에게 익숙한 항우와 유방의 이야기부터, 유일무이한 여성 황제였던 측천무후의 파란만장한 삶, 천하통일을 이룬 당태종 이세민까지, 16개 왕조가 생겨났다 스러지는 1,300여 년을 따라가다 보면 그 파란만장한 역사의 재미에 빠지게 될 것이다. 낭중지추, 사면초가, 패왕별희 등 수많은 고사의 유래가 된 순간들을 소개함으로서 익숙한 사건들을 새로운 맥락에서 바라보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또한 『한 권으로 읽는 자치통감』에서는 주요 장면마다 삽화를 그려 넣어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글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각 사건들을 머릿속으로 보다 생생하게 재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구성했다.
흔히 역사는 우리와 상관없는 옛날이야기라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오늘의 사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와 연결된 역사의 맥락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자치통감』처럼 1,362년의 역사 변천과 흥망성쇠를 명쾌하게 정리한 책은 흔하지 않다. 우리는 『자치통감』을 통해 켜켜이 쌓인 역사의 사건들을 살펴볼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시대를 꿰뚫어보는 사고력과 판단력을 기를 수 있다. 천년의 이치를 한 권으로 묶은 『한 권으로 읽는 자치통감』은 갈수록 혼란스러워지는 이 시대에 올바른 길을 알려 주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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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정도전과 그의 시대
이덕일 | 옥당북스 | 2019-05-16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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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정도전과 그의 시대
이덕일 | 옥당북스 | 2019-05-16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25)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조선 왕조 500년의 기틀을 마련한 정도전! 고려 말 조선 초의 역사를 새롭게 만나보다!
이덕일의 역사특강 『정도전과 그의 시대』. KBS의 대하사극 《정도전》팀을 대상으로 한 강연 내용을 엮은 것으로, 위민의 정치가 정도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혼란스러웠던 고려 말에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조선을 설계했지만 이방원에게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혁명가인 정도전. 그를 이해하기 위해 그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고, 왜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세우려 했는지, 무엇이 그를 백성을 대변하는 정치가로 만들었는지, 그가 만들고자 했던 이상적인 나라가 무엇이었는지를 서술 방식의 새로운 시각으로 한국사를 풀어내었다.
의민정치가 제도적으로 불가능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저자는 위민의 관점에서 인물을 바라보고 평가하였다. 또한, 정도전의 일생뿐만 아니라 성리학과 토지 문제까지 다룸으로써 조선이 위화도 회군 세력의 무력에 의지해 개창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념과 경제체제를 창출하는 과정에서 개국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역사를 반성의 도구로 삼아 한 명의 사상가가 세운 전략으로 무너진 고려를 통해 내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할 경우 체제가 무너질 수 있다는 역사적 반증으로 현재의 우리를 비추는 거울로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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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을 발칵 뒤집은 엽기 살인사건
이수광 | 북오션 | 2019-02-01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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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을 발칵 뒤집은 엽기 살인사건
이수광 | 북오션 | 2019-02-01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25)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저놈을 죽이고 싶다’
살인충동은 시대를 초월해 존재했다
동족을 살해하는 유일한 동물, 인간의 잔혹함은 유교사회 조선에도 드러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살인은 끝없이 재생산되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살인은 모든 인간 사회에서 범죄다. 안정적인 사회집단 유지를 위해 살인자를 사회에서 격리시키고 법으로써 심판하고 형벌을 내린다. 살인자 중에는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처럼 정신질환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자도 있다. 그들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인 ‘유희’로 살인을 저지른다. 그런 자뿐만 아니라 작당모의, 실수, 굶주림, 원한, 복수 등의 이유로 살인을 저지른 자 또한 교묘한 명분과 위장으로 범죄를 은폐하여 형벌을 피하려 한다.
인간은 동족을 살해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저놈을 죽이고 싶다’는 살인충동은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했다. 유교사회 조선에도 살인은 있었다. 이 책에는 조선시대에 일어난 엽기적인 살인사건 16가지의 정황과 판결 과정을 다루고 있다. 그 시대에도 복수, 분노, 질투, 탐욕으로 칼을 휘두르기도 하고 굶주림에 못 이겨 인육을 먹기도 하고 실수로 소중한 이를 죽이기도 했다. 어쩌면 복잡한 현대 사회보다 더 적나라하고 처절한 이유로 살인이 일어났다.
조선시대에는 부모를 죽인 자를 죽이는 것을 정당방위로 보았다. 얼마간의 복수기간을 주고 그 기간에 행한 복수는 인정했다. 명분은 또 다른 살인을 만들어냈다. 조선을 발칵 뒤집은 16가지 엽기 살인사건으로 작금의 시대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철저한 남존여비와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의 적나라한 실체
살인충동마저 용인해준 유교적 명분! 그 아래 벌레처럼 살다간 여성과 천민
조선은 남성의 권리나 지위 등을 여성보다 우위에 두어 존중하고 여성을 천시하고, 태생과 동시에 신분이 정해지는 유교사회였다. 당시의 윤리관으로는 자식이 부모를, 노비가 주인을, 고을 백성이 수령을 고소한다는 것은 강상죄(綱常罪)라고 하여 삼강오륜을 어기는 커다란 죄악으로 간주하였다. 남자는 첩을 몇이든 거느릴 수 있었고 여자는 재가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남자는 간부를 현장에서 살해해도 정당방위로 인정받았고 여자는 정조를 지키면 열녀라 칭송받았다. 주인이 종을 죽여도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았는데, 반대로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종이 주인을 죽이면 능지처참을 당했다. ‘목숨을 빼앗은 자는 목숨으로 갚아라’라는 원칙에 왕족과 양반층은 예외였다.
여자 노비의 삶은 가장 처절할 수밖에 없다. 노비 부모에게서 태어난 천민 여성은 13세가량이 되면 주인의 노리개가 되고 본부인의 시기와 질투를 받으며 그야말로 벌레와 같은 삶밖에 선택지가 없다. ‘빽 없고 힘없는’ 사람은 일개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불평등에 피를 토하며 절규하다 살인충동에 무릎 꿇고 만다. 어떤 이유로든 살인은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살인사건을 판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기득권의 논리가 낯설지 않다는 것이 씁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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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지갑 속의 한국사
박강리 | 북하우스 | 2020-02-19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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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지갑 속의 한국사
박강리 | 북하우스 | 2020-02-19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25)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세종 이도, 퇴계 이황, 신사임당, 율곡 이이. 네 인물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맞다. 모두 지폐 속 인물이라는 사실! 저 멀리 있어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친숙한 지폐, 하지만 우리는 과연 지폐에 담긴 이야기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지폐에는 역사 위인의 초상뿐만 아니라 한국의 과학, 정치, 철학, 예술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이야기들이 곳곳에 담겨 있다. 지폐만 자세히 살펴보아도 한국사의 큰 줄기를 짚는 역사 탐방이 가능하다. 지폐를 따라 세종대왕과 천문 과학을, 퇴계 이황과 철학을, 신사임당과 예술을, 율곡 이이와 정치를 탐방하는 새로운 역사 여행을 떠나보자. 지폐는 어느새 지도가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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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지구 위에서 본 우리 역사
이진아 | 루아크 | 2019-02-11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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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지구 위에서 본 우리 역사
이진아 | 루아크 | 2019-02-11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25)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지구환경과 인류 그리고 한반도,
그 왜곡되고 잊힌 역사를 다시 톺아보다
-서양에 그리스와 로마가 있었다면 동양에는 ‘가야’가 있었다?
-근대의 질서를 만든 것은 총, 균 그리고 환경변화다?
-한반도에서 인류 최초의 문명이 발생했다?
새로운 유물이나 유적이 발굴될 때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해석되느냐에 따라 역사학계 내에서는 여러 주장이 제기되며 새로운 담론이 만들어지곤 한다. 새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로 언급된 가야사 복원 문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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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큰별쌤 최태성의 고급한국사 - 근현대편
최태성 | 들녘 | 2019-07-02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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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큰별쌤 최태성의 고급한국사 - 근현대편
최태성 | 들녘 | 2019-07-02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25)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왜곡되지 않고 편향되지 않은 관점 있는 역사 교육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의 일부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죽은 역사 공부에서 벗어나는 데 있다. 이 책의 저자가 서문에서 “한국사는 나 스스로를 돌아보기 위해, 더 겸손해지기 위해, 더 배려하기 위해 배우는 학문입니다. 물론 공부하면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여러분이 도전하는 시험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면 좋겠지요. 그러나 한국사 공부의 핵심은 ‘한 번의 인생, 한 번의 젊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입니다. 강의를 기반으로 엮은 이 책이 그 ‘감동’을 모두 담아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여러분은 맹목적인 글 읽기에만 그치지 말고, 끊임없이 역사 속에 들어가 자기 자신을 뒤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팩트(fact)는 서서히 잊히겠지만 ‘나와 세상, 인간과 역사’에 대한 통찰의 힘은 가슴 속에서 꾸준히 자라야 하니까요.” 하고 고백한 배경이다.
수험생들의 ‘스스로 학습’을 책임진다!
『큰★별쌤 최태성의 고급 한국사』 근현대편은 조선말 대원군 집권기부터 격동의 근대사를 거쳐 현대까지의 역사를 다룬다. 시기를 크게 개항기, 일제강점기, 현대사로 구분하고, 각 시대별로 사람들이 품고 있던 ‘꿈’에 다가가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시대의 과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주의 깊게 살핀다. 개항기의 과제는 신분제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갑신정변 및 동학농민운동을 통해 그들이 왜 목숨까지 내놓으며 신분제 폐지를 외쳤는지 따라가보자.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과제는 식민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나라를 빼앗긴 슬픔 속에서 몸을 바쳐 항일독립운동을 벌인 무수한 지사들이 있었다는 것을 배우면서 그들이 흘린 피가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이룩하는 데 얼마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현대사로 오면 가난과 독재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과제 앞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거리로 뛰쳐나간 윗세대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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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
조지무쇼 | 다산초당 | 2020-07-14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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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
조지무쇼 | 다산초당 | 2020-07-14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1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수천 년 세계사의 주요 흐름을
도시 이야기를 통해 한눈에 펼쳐내다!
기원전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세계사를 총 30개 도시의 역사를 통해 단순하고 명쾌하게 풀어냈다. ‘도시는 역사가 만든 작품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세계사는 도시 문명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다. 그렇기에 세계 주요 도시들이 어떤 역사를 거쳐 지금 모습에 이르렀는지 살펴보는 것은 세계사의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한 효율적인 방법이다.
세계 문명을 좌우한 로마, 아테네, 파리는 물론 장안, 앙코르, 교토까지 세계사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도시들을 폭넓게 다루었고, 각 도시의 전문가들이 꼭 알아야 할 핵심 지식을 엄선하고 감수했다. 세계사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 다시 공부하는 사람 혹은 기초부터 교양을 쌓고 싶은 사람,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 모두에게 적절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더불어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 도시의 모습이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 새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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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B급 세계사 2 인물편
김상훈, 김의솔 | 행복한작업실 | 2020-05-28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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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B급 세계사 2 인물편
김상훈, 김의솔 | 행복한작업실 | 2020-05-28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1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역사 교과서의 평가를 뒤집는 진실을 대하는 순간,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A급들에 가려진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하고 보다 디테일하게 들여다봄으로써 역사를 일상의 영역으로 이끌었던 『B급 세계사』 제2권 《인물편》. 이 책에는 마하트마 간디, 에이브러햄 링컨, 토머스 에디슨, 마르코 폴로, 월트 디즈니, 마르틴 루터처럼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인물들은 물론 잘 알려지지 않은 위인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50편의 이야기에 약 200여 명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일정한 이미지에 갇혀 있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재평가함으로써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역사의 스포트라이트에서 벗어나 있는 인물들을 발굴하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세계 역사의 숨겨진 영웅들을 재조명한다. 더불어 사람이 역사를 만드는 한편 역사가 사람을 만들어 내는 흥미로운 지점을 포착해 그 속에 담겨 있는 의미를 발굴해 역사는 문서로 굳어진 고체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생물임을 보여주고, 역사가 주는 교훈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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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진으로 보는 역사여행] 대한제국의 황궁, 덕수궁
하이스토리텔링, 김영태 | (주)아이원이즈 | 2019-06-2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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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진으로 보는 역사여행] 대한제국의 황궁, 덕수궁
하이스토리텔링, 김영태 | (주)아이원이즈 | 2019-06-2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1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길에서 나를 묻는 힐링, 조선궁궐 중에서 대한제국의 제 1대 황제였던 고종과 그가 어떻게든 부흥시키려 안간힘을 썼던 대한제국의 황궁인 덕수궁에 대한 이야기로 전각 중에 대한문, 중화문, 중화전, 즉조당, 함녕전, 덕홍전, 준명당, 석어당 , 정관헌, 광명문, 석조전, 중명전 등 일제와 열강의 횡포 속에서 그 처절한 역사와 비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궁궐 덕수궁에 대한 다양한 사진과 더불어 엮은 재미있고 유익한 사진에세이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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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2 |
[역사] [사진으로 보는 역사여행] 서궁에서 만나는 사색, 경희궁
하이스토리텔링, 김영태 | (주)아이원이즈 | 2019-06-2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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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진으로 보는 역사여행] 서궁에서 만나는 사색, 경희궁
하이스토리텔링, 김영태 | (주)아이원이즈 | 2019-06-2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1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길에서 나를 묻는 힐링, 조선궁궐 중에서 아픔이 되어버린 역사, 그리고 그 속에 찬란했던 과거, 100여년 동안 외면 받았던 경희궁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봅니다. 경희궁의 전각 중에 흥화문, 숭정전, 자정전, 태령전, 서암 등 기억하고 복원해야 할 역사의 단면을 다양한 사진과 더불어 엮은 재미있고 유익한 사진에세이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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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1 |
[역사] [사진으로 보는 역사여행] 역사에 나를 묻는 길, 창경궁
하이스토리텔링, 김영태 | (주)아이원이즈 | 2019-06-2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13) |
811 |
[역사] [사진으로 보는 역사여행] 역사에 나를 묻는 길, 창경궁
하이스토리텔링, 김영태 | (주)아이원이즈 | 2019-06-2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1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길에서 나를 묻는 힐링, 조선궁궐 중에서 소리 없는 전쟁과 어두운 역사가 이루어진 곳으로 참혹하고, 가슴 아픈 역사의 민낯을 온전히 보여주는 창경궁 전각 중에 홍화문, 옥천교, 명정문, 명정전, 문정전, 통명전, 양화당, 춘당지, 대온실 등 창경궁의 어둡지만 화려했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다양한 사진과 더불어 엮은 재미있고 유익한 사진에세이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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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 |
[역사] [사진으로 보는 역사여행] 조선 왕조의 명암, 경복궁
하이스토리텔링, 김영태 | (주)아이원이즈 | 2019-06-2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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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진으로 보는 역사여행] 조선 왕조의 명암, 경복궁
하이스토리텔링, 김영태 | (주)아이원이즈 | 2019-06-2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1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길에서 나를 묻는 힐링, 조선궁궐 중에서 정궁인 경복궁의 전각 중에 광화문, 영제교,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 경회루, 자경전, 향원정, 건청궁, 태원전 등 대한 다양한 사진과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는 재미있고 유익한 사진에세이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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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 |
[역사] [사진으로 보는 역사여행] 후원으로 가는 힐링, 창덕궁
하이스토리텔링, 김영태 | (주)아이원이즈 | 2019-06-2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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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진으로 보는 역사여행] 후원으로 가는 힐링, 창덕궁
하이스토리텔링, 김영태 | (주)아이원이즈 | 2019-06-2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1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길에서 나를 묻는 힐링, 조선궁궐 중에서 왕들이 가장 사랑했고, 가장 오랫동안 머문 궁궐인 창덕궁 전각 중에 돈화문, 금천교, 인정전, 희정당, 선정전, 성정각, 대조전, 낙선재, 후원 등 빼어난 자연경관과 여유 넘치는 공간 속을 다양한 사진과 스토리로 구성한 재미있고 유익한 사진에세이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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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8 |
[역사] 경성 이야기
신정언 | 온이퍼브 | 2019-03-22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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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경성 이야기
신정언 | 온이퍼브 | 2019-03-22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1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해태(海?)가 생겨나게 된 것은 과천 관악산의 화기(禍機)가 도성 안에 비치게 되므로 그것을 막기 위하여 만들어 세운 것이다.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서는 이 해태뿐만이 아니라 서쪽으로는 천연정(天然町)에 있던 서지(西池)라는 연못과 남쪽으로는 남대문 밖에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파게 되었다.
그리고 각 성문의 현관 글씨도 모두 가로로 쓰고 달기도 모두 가로로 달았다. 특히 남대문 현관과 동대문 현판만은 글씨도 내려(縱)쓰고 달기도 세로로 달았으니, 그것도 역시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한 것이라 한다.〈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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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7 |
[역사] 경성의 건축가들
김소연 | 루아크 | 2019-02-11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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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경성의 건축가들
김소연 | 루아크 | 2019-02-11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1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일그러진 근대에서 ‘일그러진’ 건축가들을 만나다
〈암살〉 〈밀정〉 〈경성 스캔들〉 〈모던보이〉 같은 일제강점기를 다룬 시대극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배경이 있다. 바로 근대건축이다. 일본은 죽도록 싫어하면서도 미쓰코시백화점 앞에서는 입이 딱 벌어졌던 사람들, 암울한 현실을 비관하면서도 경성역에서 들려오는 문명의 소리에 들떴던 사람들, 카페와 살롱에서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서구를 동경했던 민족주의자들…. 이들에게 식민지의 근대건축은 이상과 현실, 이성과 감성의 불협화음이 요동치던 장소였다. 경성의 근대건축은 한국전쟁과 개발 논리에 따라 대부분 사라졌지만, 서울 시내를 걷다 보면 고층건물 사이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남아 있는 몇몇 건물은 아직 만날 수 있다. 경교장, 명동예술극장, 딜쿠샤, 중명전, 간송미술관, 덕수궁 현대미술관, 서울도서관 같은 건물이 대표적이다. 최근 몇 년간 ‘역사적 의미’가 깃든 근대건축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증가했다. 그 관심에 걸맞게 건물 보존에 관한 대중의 의식도 높아져 자칫 철거될 위기에 처했던 근대건축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역사 교육의 장으로 이용되는가 하면, 원래 형태를 일부 보존하는 형식으로 리모델링해 공공건물로 사용하는 사례도 많아졌다. 근대건축의 가치가 재평가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긍정적인 현상이다. 근대건축의 ‘역사성’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건물의 ‘역할’이고, 다른 하나는 ‘건물’ 그 자체다. 이 책 《경성의 건축가들》은 우리가 재평가하고 기억해야 할 후자의 이야기, 곧 그 ‘건물’을 설계하거나 시공했던 건축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중에서도 동경제국대학을 나와 총독부에서 근무한, 당시 건축계의 실세이자 주류였던 일본인 건축가들이 아닌, 조선인 건축가와 비주류 외국인 건축가들의 삶을 조명한다. 일제가 세운 학교에서 건축을 배웠던 조선인 건축가들, 또는 꿈을 좇아 조선으로 온 외국인 건축가들은 수많은 차별과 편견 속에서도 실력을 쌓아나갔다. 결국 일제강점기 후반 민족자본가의 등장으로 백화점, 공장, 학교, 주택, 병원, 극장 같은 건물을 자신만의 색깔로 설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들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라는 또다른 벽을 마주한다. 건축이라는 이상과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현실 사이의 간극을 이들은 어떻게 줄여나갔을까? 친일 논란에서도 배제된 건축가들, 그들은 단지 ‘짝퉁’을 만드는 ‘B급’ 기술자들이었을까? 일제가 세운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나온 조선인 건축가들이 취직한 곳은 대부분 총독부나 경성부청 같은 관청이었다. 그들이 그곳에서 했던 일은 일제의 지배와 수탈을 위한 건물을 짓는 것이었다. 부업으로 했던 설계도 건축주가 해방 직후 반민특위에 회부된 사람들의 것이 많았다. 이쯤 되면 친일 논란이 일어날 만하다. 그런데도 건축주만 논란의 대상이었을 뿐 건축가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건축가는 단지 기술자로 인식된 탓이다. 기술자는 가치중립적 존재라는 단순한 도식이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편견일 뿐 그 시대 건축가들도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며 식민지라는 현실과 마주했다. 잠시 건축을 내려놓고 항일운동에 뛰어든 이들도 있었고, 민족과 조국의 이름으로 일본을 극복하기 위해 건축에 매진한 이들도 있었으며, 현실을 뒤로 하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만주나 미국 혹은 일본으로 떠돈 이들도 있었다. 그들 작품의 색깔도 다양했다. 유행하던 모더니즘 건축만을 지향했던 사람, 옛것과 새것을 조화시키려 했던 사람, 전통의 정통성을 어떻게든 살려보고자 노력했던 사람…. 친일 혹은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꼭짓점이 아닌 그 사이의 무수한 회색지대를 살았던 사람들처럼 그 시대 건축가들도 타협과 저항, 동경과 콤플렉스 사이에서 갈등하고 싸우고 변화하고 좌절했다. 일제가 급하게 모방했던 서구건축을 흉내만 내는 이른바 ‘짝퉁의 짝퉁’을 만든 ‘B급’ 기술자들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건축 1세대들의 자취를 따라서 조선인 최초로 총독부 건축기사가 되었고, 역시 조선인 최초로 종로구에 건축사무소를 연 박길룡, 3?1운동에 연루되어 만주를 떠돌다 돌아와 이후 고려대학교 여러 건물군을 남긴 박동진, 보리스건축사무소 경성출장소 일원으로 교회, 학교, 병원, YMCA, 복지시설 같은 선교 관련 건축을 주로 맡아 진행했던 강윤, 조선인 최초로 미국에서 정규 건축 교육을 받은 박인준, 최고의 구조계산 전문가로서 미쓰코시백화점, 화신백화점, 조지아백화점, 경성제국대학 본관 들을 구조계산한 것으로 알려진 김세연, 해방과 전쟁이라는 공백기에 후배 건축가들이 모일 수 있는 조직을 세우는 등 보다 큰 틀에서 역할을 수행한 김윤기, 만주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입사해 일본인과 함께 다롄역사, 신징역사, 투먼철도공장 들의 설계와 감독에 참여한 이천승,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사로 근무하면서 문학에 눈을 뜬 이상, 우리말 건축용어 정리에 평생을 바친 장기인, 그리고 한국에서 새로운 삶을 연 나카무라 요시헤이, 다마타 기쓰지, 오스미 야지로, 개신교 건축선교사 윌리엄 보리스…. 이 책에 등장하는 이들은 그나마 자료가 있어 이야깃거리를 남긴 사람들이다. 자료가 없어서 아예 잊힌 사람도 많다. 지은이 김소연은 시대를 풍미했던 혹은 그러지 못하고 안타깝게 저물었던 이들의 삶과 그들이 남긴 건축물이라는 유산을 이제 한번쯤 되돌아볼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아울러 그들을 통해 그 시대의 또다른 이야기들을 알게 된다면, 개발에 대한 관점과 건물의 보존 방식 그리고 언젠가 역사가 될 이 시대 건축가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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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 | (주)을유문화사 | 2019-09-18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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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 | (주)을유문화사 | 2019-09-18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1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일본에 관한 가장 객관적인 책으로 손꼽히는 고전”
일본 문화와 일본인을 가장 잘 분석했다고 평가받는 명저 『국화와 칼』은 일본을 이해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고전 가운데 하나다. 루스 베네딕트가 미 국무성의 위촉으로 2년여 동안 일본 문화를 연구하고 분석한 결과물로, 당시 일본과 전쟁 중이던 미국은 미국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본인의 행동을 연구하고자 했다. 『국화와 칼』은 일본 문화의 핵심적인 요소들인 계층적 위계질서 의식, 수치와 죄책감의 문화, 은혜에 관한 개념 등을 최초로 명확하게 분석함으로써 차후의 일본 문화 분석에 아주 기본적인 준거가 되었다. 이 책이 일본을 다룬 다른 책들보다 더 큰 객관적 의미를 갖는 이유는 승전국의 한 인류학자가 가질 법한 우월의식을 스스로 견제하면서 일본에 단 한 번도 방문하지 않고도 일본에 대한 뿌리 깊은 서구적 편견과 선입관을 극복하고자 했던 루스 베네딕트의 고뇌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일본을 직접 방문하지 않고 수많은 기록들과 문헌,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조사하는 것으로 연구를 진행했기에 함께 생활하면 생기게 되는 주관적인 관점 없이 오히려 객관적일 수 있었다. 『국화와 칼』은 일본인의 독특한 행동, 가치관을 그들의 입장에서 올바로 이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이로써 루스 베네딕트는 인류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국화(평화)를 사랑하면서도 칼(전쟁)을 숭상하는 일본인의 이중성을 날카롭게 해부한 문화인류학의 고전 이 책의 제목이 암시하는 것은 일본 국민의 이중적·모순적 특성이다. 극도로 섬세한 미감을 지님과 동시에 칼의 냉혹함을 숭배하는 것이 베네딕트가 간파한 일본 국민이었다. “그러한 모순은 모두가 진실이다. 일본인은 최고도로 싸움을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얌전하며, 군국주의적이면서도 동시에 탐미적이며, 불손하면서도 예의 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성이 풍부하며, 충실하면서도 불충실하며, 용감하면서도 겁쟁이이며,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받아들인다.” 그는 ‘전쟁 중의 일본인’ 등 책의 초반부에서 일본인 특유의 모순적 성격, 즉 공격적이며 동시에 수동적이고, 호전적이면서 심미적이며, 무례하고도 공손하고, 충성스러움과 동시에 간악하며, 용감하면서 비겁하다. 이러한 양립할 수 없는 듯 보이는 행동 양상을 보이는 민족성을 위계서열 의식, 은혜와 보은, 그리고 의리에 대한 독특한 도덕 체계, 죄와 악에 대한 의식이 결여된 대신 수치심을 기본으로 하는 일본의 문화 체계로 설명하면서 ‘손에는 아름다운 국화, 허리에는 차가운 칼을 찬 일본인’으로 결론짓는다. 일본 문화에 대한 루스 베네딕트의 냉철한 접근과 결론 전반적으로 저자는 일본인의 국민성이 형성된 과정과 배경을 밝혀내기 위해 총체적인 문화 분석을 시도한다. 그리고 봉건사회의 위계 체계와 메이지 유신의 과정, 가족 제도와 조상 숭배, 육아 방식 및 사회화 과정, 불교와 신도라는 종교 등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비교 문화적인 분석을 통해 충과 효, 혈연과 지연에 있어서 중국과 다른 점을 대비하며, 미국과 일본의 상이한 문화적 특성을 짚어 간다. 초반부터 제4장 ‘메이지 유신’까지는 일본인은 모든 사람이 하나의 위계 서열 체계에서 ‘위치’가 정해지고 각자가 그에 따른 특권과 의무 및 행위 규범을 가진다고 말한다. 최하위의 위치일지라도 하나의 체계 속에 위치한다는 것이 중요하며, 체계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죽음과 다를 바 없다고 믿는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어려서부터 훈련되며, 그에 대한 공포로써 스스로 교정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책의 중후반을 넘어가면 일본인의 핵심적인 성향을 주로 다루는데, 제10장 ‘덕의 딜레마’와 제11장 ‘자기 수양’ 등의 장에서 그들의 인간관과 세계관을 다룬다. 일본인에게 있어 인간적인 감정과 쾌락은 악이 아니므로 수치의 대상이 아니며, 육체와 정신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적인 쾌락의 추구가 도덕적일 필요는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죄와 악을 극복의 대상으로 삼는 기독교 문화와 달리 일본 문화에서는 죄의식이나 악에 대한 개념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것이 베네딕트의 지적이다. 즉, 일본 사회는 절대적인 도덕 기준을 설정하고 바른 행위에 대한 내면적 강제력을 계발하는 사회이기보다는 수치에 대한 문화적 기제가 발달해 있기 때문에 일본인은 모든 행위를 수치를 당할 것인가의 여부로 판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 부분인 13장 ‘패전 후의 일본인’에서 저자는 일본인은 상황에 따라 적응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전쟁에서의 패배로 그들은 군국주의의 선택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되었지만, 만약 군국주의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사례가 나타나게 되면, 훨씬 더 성공적인 군국주의의 실천을 보이려 할 것이며, 반면 만약 세계에 평화주의가 지배하면 역시 자기들이 그것에 있어 모범적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노력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인들이 상황에 따라 반응하는 민족이며, 실패는 단지 수단의 잘못에 있는 것일 뿐 결코 악이나 죄의 개념에 의해 평가되지는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할 일본 문화의 뿌리를 파헤치다 조금 맥락은 다르지만 저자가 가진 냉철하고 객관적인 시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절실히 요구되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안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일본에 대한 고착된 인식이야말로 우리가 일본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국화와 칼』이 처음 세상에 선보인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때였다. 어찌 보면 현재 우리는 일본과 또 다른 형태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1945년 이후 일본은 많이 변했다. 오늘날 일본과 일본인을 접하는 우리들은 이 책에 기술된 일본인들의 ‘민족성’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이 일본 문화의 불변적인 요소와 가변적인 요소들을 함께 바라보는 데 중요한 바로미터가 된다는 점에서 반드시 접해야 할 책이다. 이번에 여섯 번째 개정판으로 선보이는 국화와 칼은 저명한 저술가이자 아시아연구가 이안 부루마의 서문을 재수록했으며, 고 이광규 서울대학교 명예 교수의 해설을 실어 현대 독자들이 『국화와 칼』을 보다 쉽고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힘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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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극한의 경험
유발 하라리 | 옥당북스 | 2019-03-21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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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극한의 경험
유발 하라리 | 옥당북스 | 2019-03-21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1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지난 300년간 인류에게는 어떤 변화가 불어닥친 것일까?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가 전쟁문화사를 통해 인간의 사고와 행동 변화를 추적하는 『극한의 경험』.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중세 전쟁사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오랜 시간 이 분야의 연구에 매진해온 저자가 전쟁은 무엇이고 인간은 왜 전쟁에 뛰어들며 전쟁에서 무엇을 느끼고 배우는지에 대한 사유에서 시작해 계시 체험, 경험자의 권위 등으로 발전한 질문들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저자는 전쟁을 체험한 전투원들의 경험담에 나타난 전쟁을 이해하는 방식의 변화에 주목한다. 중세부터 근대 후기까지 전투원들의 전쟁 경험담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전쟁을 해석하는 시각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계시적 전쟁 해석’이 등장한 사회적, 문화적 배경은 무엇인지 15세기와 21세기를 오가며, 둘 사이의 거리를 보여주고 비교하는 방식으로 살펴본다.
이를 통해 저자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가장 중요한 논지는 1740년부터 1865년 사이에 전쟁을 이해하는 방식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중세부터 18세기 이전까지는 전쟁을 계시 체험으로 해석하지 않았지만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를 지내는 동안 계몽주의와 감성 문화,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전쟁을 계시의 요인으로 보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하며 우리에게 익숙한 근대 후기 전쟁 해석을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는 기회를 마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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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노르망디 상륙작전
김기순 | 이페이지 | 2019-09-01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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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노르망디 상륙작전
김기순 | 이페이지 | 2019-09-01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1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바다를 가득메운 압도적인 대 병력을 목견한 사람이라면 바로 시작될 새로운 싸움에서 연합군이 패배할 것이라는 의심을 가질수 없었다. 성 올벤곶에 위치한 연안감시 초소에서 한번에 1000여척이 넘는 진공군이 바다로 나가는 모습을 바라본 연안감시대원은 자신의 눈이 믿기지 않았다. 그의 눈아래로 전차와 병사들이 가득실린 함정이 들어왔다. 이어 상공에 방공용 수소기구를 가득띠운 함정들이 동쪽을 향해 나아가고 다시 그옆에 함열을 지은 전함군이 집결해 있었다. 마지막 1척이 수평선 상으로 사라지자 연안감시원은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들에게 그는 "오늘밤 많은 사람들이 죽으러 가더군! 우리 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라고 말하고 기도를 시작했다.
(생략)
그러나 움직이는 영국군을 독일군 21장갑사단이 먼저 움직여 기선을 제압했다. 때문에 시계반대 방향으로 움직여 캉을 포위 하려던 7기계화 사단이 막대한 피해를 입을 위기에 처했다. 일단의 영국 전차대가 쾌속 크롬웰 경전차를 앞세우고 보카쥬를 빠져나가 시원하게 뚫린 직선 도로를 발견했다. 이들은 캉 남동쪽의 목표 지점으로 단숨에 전진하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연 이들앞에 6호 티거 중전차 4대가 나타났다.
(생략)
잠시후 다시 8대의 티거가 이 전투에 뛰어들었다. 10분이 지나기전 7기계화 사단의 선견대는 전차 25대와 반장궤차 트럭등 14대가 고철로 변했다. 티거전차대는 바로 빌레 보캬쥬로 돌입했다. 마을은 불과 수대의 경전차와 바주카 보병대에 의해 지켜지고 있었다. 티거는 집집마다 포격하며 영국군을 유린했다. 그러나 티거전차대는 우군의 보병과 너무 동떨어져 있었고 잠시후 영국군 보병들이 바주카로 티거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비트만도 전차를 버리고 후퇴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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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대담한 작전
유발 하라리 | 프시케의 숲 | 2019-07-30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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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대담한 작전
유발 하라리 | 프시케의 숲 | 2019-07-30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8-1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지상 최고의 작전이 시작된다!”
유발 하라리가 들려주는 중세시대 특수작전 이야기
유발 하라리가 자신의 전공, 중세 전쟁사로 한국에 돌아왔다. 이 책은 특히 오늘날 영화와 게임 등에서 대중의 상상력을 지배하고 있는 ‘특수작전’에 대해 다룬다. 요인 구출과 시설 장악, 암살 등을 목표로 하는 특수작전의 연원은 중세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하라리는 이에 대한 연구를 통해 특수작전의 조건과 영향, 한계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왜 ‘특수작전’인 걸까? 하라리는 ‘들어가는 말’에서 이 책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전쟁 한복판에서 집필했다”고 말한다. “이 전쟁에서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 조직들은 이스라엘의 인구 밀집지역과 국가적인 상징을 콕 집어서 공격했고, 이스라엘 특수부대는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 사령관, 정치인을 납치하거나 암살했다.” 그가 처해 있는 엄혹한 현실이 이 책을 집필하는 데 중요한 동기가 된 것이다. 하마스 등의 이슬람 조직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당장 레반트 지역에서 만연한 살벌한 특수작전의 효과를 ‘중세 전쟁사’라는 렌즈를 통해 성찰한 결과물인 셈이다. 이는 트럼프 미 대통령 집권 이후, 더욱 각박해질 것으로 예상되는 중동 정세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의 현실에서도 ‘특수작전’이 심심찮게 거론되곤 한다. 그것이 현실적인 타개책이 될 수 있을까? 혹시 재앙 수준의 오판 아닐까? 아니면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인들이 말하듯, “정치적 암살로 대규모 전쟁을 해결하는 것은 지극히 분별 있는 일이며, 죄를 지은 소수의 목숨으로 수천의 무고한 생명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인간적인 일”(본서 66쪽)일까? 하라리는 특수작전에 대한 정의와 종류는 물론 그것의 성립 조건과 영향, 그리고 제한 사항까지 면밀하게 분석한다(제1장). 현대 서구와 중세시대의 사례가 대다수이지만, 이러한 분석을 한반도에도 요모조모 대입해가며 합리적인 생각을 도출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삶과 인간, 사회가 보이는 여섯 개의 단편들
“하라리의 글은 위트 있고, 명료하며, 우아하다.”_〈타임스〉
이 책의 구성 방식은 독특하다. 제1장에서 중세시대 특수작전을 개괄적으로 분석/해설하고, 제2장부터 제7장까지는 각 챕터마다 별도의 역사적 사건을 다룬다. 즉, 각기 독립적인 특수작전 이야기 여섯 편이 수백 년이 넘는 시간대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 중동으로 통하는 길: 안티오키아, 1098년
- 보두앵 왕 구하기: 하르푸트, 1123년
- 콘라트 왕의 암살: 티레, 1192년
- 자루에 가득한 에퀴 금화를 위하여: 칼레, 1350년
- 십자선 안의 군주들: 발루아 부르고뉴의 흥망, 1407-1483년
- 오리올의 방앗간: 오리올, 1536년
각 사건의 배경이 되는 시공간이 저마다 다르며, 이에 따라 역사 속에 명멸한 수많은 인간 군상의 모습이 다양하게 제시된다. 시대의 경우 1098년 십자군 전쟁부터 1536년 프랑스-합스부르크 전쟁까지 긴 시간대상에 위치해 있고, 사건의 무대가 되는 공간도 세 편은 중동의 레반트 지역(제2~4장), 나머지 세 편은 프랑스 전역(제5~7장)에 넓게 펼쳐져 있다. 등장하는 인물만 해도 250명이 넘는다. 하라리는 특유의 입담과 독보적인 통찰로 방대한 자료를 가로지르며, 오늘날까지도 베일에 싸인 주요 특수작전의 전말을 탁월하게 되살려낸다.
제1장은 특수작전에 대해 개괄적 분석이 이루어진다. 제2장부터는 서술의 방식이 완전히 바뀐다. 즉, 분석적인 서술을 멈추고 스토리텔링을 대폭 강화한다. 각 챕터에서 소개되는 특수작전 사건을 중심으로 박진감 넘치는 서사가 완성도 있게 제시된다. 팩트와 상상력이 어우러진 서술이 균형감 있게 제시된다.
역경을 단숨에 반전시킨 극적인 역사의 장면들
“재미있으면서도 교양 지식이 빼곡하다.”_〈BBC 히스토리 매거진〉
하라리는 에피소드 식의 구성을 통해 특수작전을 둘러싼 여러 쟁점들을 최대한 포괄적으로 소개한다. 이 과정에서 방대한 유럽과 중동의 역사가 화려하게 서술된다(하라리는 2002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중세 전쟁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울러 각 챕터 사이의 빈 공간들로 독자들의 관심과 상상력이 뻗어나가도록 유도한다. 십자군 운동과 암살조직 니자리파, 셀주크튀르크, 오스만튀르크, 그리고 백년전쟁과 합스부르크 제국까지. 이 책을 통해 유럽과 중동의 역사에 대해 깊고 풍부한 교양지식을 얻을 수 있다.
아울러 이 책은 등장하는 인물만 250명이 넘는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과 그들 간의 관계를 통해, 독자들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포위된 성채, 파멸의 임박, 구원의 외침, 목숨을 건 탈출, 속고 속이는 계략, 승리의 지독한 그림자, 도박적인 모험... 이 책을 수놓는 극적인 인간 드라마들은 이른바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현대인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어쩌면 모두들 제각기 ‘특수작전 하듯’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마다의 잃어버린 성궤와 상실된 어떤 것을 찾아서, 가장 ‘비용 효율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책 속에서
납치된 소수의 민간인이나 감금된 군인을 구출하는 일은 물질적인 세력균형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지만, 사기를 올리는 데에는 크게 기여할 수 있다. 국민과 병사를 최후의 한 사람까지 모두 구해내는 데 모든 수단을 동원해 최선을 다한다는 상징적인 의지와 군사적 능력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과 군인에 대한 국가의 헌신적인 의지는 현대국가에서 커다란 상징적 가치를 지닌다. 특히 서구 민주국가들의 경우가 그렇다. 따라서 적들의 입장에서는 특수작전으로 소수의 민간인을 납치하는 것이 가치 있는 목표가 되었다._21~22쪽
특수작전이 지닌 문화적 매력 덕분에 특수작전이 국민들의 사기에 미치는 잠재적인 영향력도 늘어났다. 국가의 이미지, 특히 국가의 남성적 이미지가 특수작전에 크게 녹아 있기 때문에, 작전이 성공하면 국민들의 사기가 높아지고, 실패하면 정규작전이 실패했을 때보다 훨씬 더 크게 사기가 떨어진다. 특수작전의 성공이 언제나 화려해 보이는 만큼, 실패는 굴욕적이다. 임무에 참가한 특수부대원들은 국가의 남성성을 상징하는 존재여야 하기 때문이다. 대중은 영화관과 게임 화면에서 본 특수작전과 실제 특수작전을 동일시하는 데 익숙하다._25쪽
영지들의 충성심은 특히 내전이나 계승전쟁의 경우 변덕을 부리기 일쑤였다. 용병들의 충성심은 이보다 훨씬 더 미약했고, 병사들과 장교들은 물론 분대 전체가 전쟁을 하다 말고 반란을 일으키거나 아예 다른 진영으로 넘어가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당시에도 이런 짓은 밉살스럽게 여겨졌지만, 병사나 장교나 분대가 한 계절에는 이쪽 군주를 위해 싸우다가 다음 계절에는 반대편 군주를 위해 싸우는 일은 그들의 세계에서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6세기에는 여러 군대들이 거대한 규모의 ‘의자 뺏기 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_57쪽
특히 귀족들은 보통 자율적으로 영지를 다스리는 통치자였으므로, 다른 사람에게서 명령을 받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그들끼리도 서로 적대적인 경우가 많았고, 다른 귀족이 명예를 얻으면 언제나 커다란 질시가 뒤따랐다. 사령관이 이렇게 다양한 부대들을 모아 하나의 군대로 지휘할 수 있는 것은, 순전히 가문의 힘이나 사교적인 힘으로 이 귀족들에게서 복종을 얻어냈을 때뿐이었다. 군사적 경험이나 전술적 능력이 전혀 없는 왕손들이 경험 많고 숙련된 군인보다 더 자주 사령관으로 임명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_59쪽
특수작전으로 적 지도자를 죽이거나 납치한다면 중요 방어거점을 점령하는 것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군대를 구성하는 다양한 병사들과 지휘관들의 충성심을 묶어주는 인물이 사라짐으로써, 적의 군대 전체가 붕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상속권이나 계승권 분쟁의 경우에는 상대편 군주를 죽이거나 납치하는 것이 곧 전쟁의 원인 자체를 제거하는 행위였다. 계승권 전쟁이 아닌 경우에도, 지도자에 대한 공격으로 상대편 왕국이 순간적으로 기능을 잃거나 완전히 해체된 사례들이 많다._64쪽
[암살로 유명한] 니자리파의 전성기에 중동과 유럽 전역의 왕들과 통치자들은 그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어쩌면 보호비도 지불했을지 모른다. 템플 기사단과 병원 기사단만이 니자리파로부터 자유로웠다. 오히려 니자리파가 두 기사단에 공물을 바쳐야 했다. 십자군 회고록을 집필한 장 드 조앵빌은 이 이상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니자리파의 지도자가 “만약 템플 기사단장이나 병원 기사단장을 죽인다면, 그들에 못지않게 유능한 사람이 다시 그 자리에 앉을 터이니 그들을 죽여서 얻을 이득이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아무런 이득이 없는 일에 자신의 아사신들을 희생시킬 생각이 없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두 기사단은 가문의 사업이라기보다 관료적인 조직이었고 가문과 영지보다는 위계적인 규율로 유지되는 단체였으므로, 지도자를 제거해도 그들의 기능이 심각한 악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뜻이다_65쪽
암살과 납치의 가장 큰 약점은 불명예스러운 싸움방법이라는 점이었다. 암살과 납치는 당시를 지배하던 정치문화의 약점을 온전히 이용하는 한편, 바로 그 문화 전체를 약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고전적인 ‘죄수의 딜레마’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암살과 납치를 가장 먼저 조직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엄청난 보상을 얻을 가능성이 높지만, 곧 모든 사람이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게 되면 정치질서도 변할 것이고, 이것이 모든 통치자들에게 달갑지 않은 결과를 낳을 것이다. 군사적 수단으로 다른 곳보다 훨씬 더 암살에 의존했던 중세의 중동과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 안정적인 왕조와 영지를 찾아보기가 서유럽에 비해 훨씬 더 힘들다는 점이 좋은 예다._74~75쪽
루이의 주군인 프랑스 왕 장 2세는 푸아티에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포로가 됐을 때 아주 다른 행동을 보였다. 탈출하지 않겠다고 명예를 건 맹세를 한 그는 자신을 구출하려는 프랑스 측의 시도를 막았다. 나중에 그는 몇 가지 조건을 걸고 석방되었는데, 그중에는 이 조건들의 이행을 보장할 인질로 프랑스 왕족 몇 명이 칼레에 붙잡혀 있어야 한다는 조항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보내진 인질 중 한 명(장의 둘째 아들인 앙주의 루이)이 맹세를 깨고 칼레에서 도망치자 국왕 장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스스로 잉글랜드의 손에 자신을 넘겨 다시 포로가 되었다._79쪽
14세기 초에 유럽에 화약을 소개하고 최초의 화약무기를 개발한 수상쩍은 인물들은 닐스 보어 같은 과학자가 아니었다. 그들의 작업이 군사적 세력균형에 미친 직접적인 영향도 어느 모로 보나 미미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역시 이탈리아의 군주들이나 군 지휘관에 비해 군사적, 정치적 가치가 훨씬 낮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꿈꿨던 잠수함, 헬리콥터, 탱크가 현대 독자들에게는 감탄의 대상인지 몰라도, 르네상스 통치자가 그런 물건들을 실제로 만들려고 시도했다면 그저 귀한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결과로 끝났을 것이다._80쪽
야기시얀은 내부의 수비대와 외부의 포위군이 서로 종교와 인종을 둘러싼 증오를 품도록 선동해서 탈영과 배신의 위험을 최소화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십자군 병사들이 훤히 볼 수 있는 곳에서 여러 포로들을 죽을 때까지 고문했다. 십자군이 가끔 자기네 포로에게 야기시얀 못지않은 잔혹한 짓을 한 것이 이때 야기시얀에게 뜻하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십자군은 죽은 튀르크인들의 머리를 잘라 성안으로 쏘아 보내는 짓도 여러 번 저질렀다._114쪽
보에몽은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피루즈를 믿기로 마음을 굳혔다. 1098년에 이미 40대 후반이던 보에몽은 너무나 많은 좌절을 겪은 사람이었다. 만약 그가 조상들의 본을 따라 후손들에게 정복자로서 이름을 남겨줄 생각이라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인 것 같았다. 그는 이 기회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피루즈를 믿어도 된다고 자신을 설득한 보에몽은 다른 십자군 지휘관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_126쪽
보에몽은 아래에 남아 있었다. 어쩌면 함정을 경계했을지도 모른다. 길게만 느껴지는 몇 분이 고통스럽게 흐른 뒤 겨우 60명가량의 병사들만 사다리를 올라가 두 자매 망루와 인접한 다른 망루 두 개를 장악했다. 피루즈는 이때쯤 머릿속에서 뭔가가 끊어졌다. 도대체 무슨 작전이 이런가? 보에몽은 모두를 죽일 셈인가?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써도 그들의 존재는 곧 발각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병사의 검이 운 나쁘게 방패와 챙강 부딪히거나,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헛발을 디디기만 해도 인근 망루들에 비상이 걸리기에 충분했다. 또한 경비대장도 곧 되돌아올 터였다. 안티오키아를 손에 넣을 작정이라면 지금보다 더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피루즈는 분통을 터뜨리며 이미 망루로 들어와 몸을 숨긴 병사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프랑크족이 너무 없잖아! 영웅 보에몽은 어디 있어? 그 무적의 영웅은 어디 있냐고?”_134쪽
그러나 아르메니아인들의 작전 계획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 이제 분명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애당초 아무런 계획이 없었던 것 아니냐고 해도 될 정도의 문제였다. 베스니의 아르메니아인들은 하르푸트에 들어가는 것을 가장 어려운 문제로 보았던 것 같다. 만약 하느님의 가호로 요새에 돌입해서 포로들을 구하는 데 성공한다면, 돌아 나오는 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 에데사로 돌아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뚜렷한 계획이 없었다. 따라서 구출하러 온 사람도 구출된 사람도 모두 적의 영토 깊숙한 곳에 있는 요새 안에 갇힌 꼴이 되었다._157쪽
니자리파는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비밀조직의 기억을 후세에 남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암살assassination’이라는 단어를 유럽의 언어에 선사해주었다. 이 단어는 핵심적인 인물에 대한 계획적인 살인을 군사적 도구나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assassin’은 아랍어 ‘하시신hash?sh?n’(‘마약 해시시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상대를 경멸하는 호칭)에서 유래했는데, 적대적인 무슬림 문헌들에서는 때로 이 단어가 곧 니자리파를 의미했다._177쪽
니자리파는 11세기 말에 페르시아 북부에서 생겨난, 과격한 천년왕국 신봉자들이었다. 그들이 갈라져 나온 이스마일파 역시 시아파에서 갈라져 나온 과격파 집단이었다. 니자리파의 교리와 행동은 주류 수니파와는 정반대였으며, 심지어 대다수 시아파와 이스마일파도 그들을 몹시 싫어했다. 니자리파는 1135년과 1138년에 각각 수니파 칼리프를 암살한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1164년에는 심지어 ‘qiy?ma’, 즉 시간과 율법의 종말을 선언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들은 무슬림 율법의 모든 금지사항들을 공식적으로 폐지해버리고, 신자들에게 포도주를 마시거나, 돼지고기를 먹거나, 라마단 때 잔치를 벌이거나, 메카를 등지고 기도하는 등 율법을 어기는 행동을 권장했다. 그들의 교리와 행동은 수니파, 시아파, 온건한 이스마일파, 고위 성직자, 세속 권력자 모두의 두려움과 적의를 샀다._177~178쪽
1170년대 중반에 살라딘이 니자리파의 근거지를 공격했을 때, 시난은 반드시 살라딘에게 직접 은밀히 자신의 말을 전해야 한다는 지시와 함께 전령을 파견했다. 당연히 암살을 두려워한 살라딘은 전령의 몸을 철저히 수색했다. 그 결과 전령의 몸에는 무기가 전혀 없음이 드러났는데도, 살라딘은 호위병을 내보내려 하지 않았다. 전령은 살라딘과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만 시난의 말을 전할 수 있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살라딘은 시종들과 호위병을 물러나게 하는 데 동의했지만, 가장 충실한 맘루크 호위병 두 명은 남겨두었다. 전령이 그들도 내보내야 한다고 고집하자 살라딘은 “나는 이 아이들을 내 아들로 생각한다. 이 아이들과 나는 하나다”라고 말하며 전령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전령은 두 맘루크를 향해 돌아서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내 주인의 이름으로 이 술탄을 죽이라고 명한다면 그리하겠느냐?” 맘루크들은 칼을 빼들고 명령만 내리시라고 말했다. 전령은 맘루크들을 데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기가 질린 살라딘은 서둘러 시난과 화해했다._195쪽
피다이는 벌건 대낮에 길거리나 모스크 같은 공공장소에서 표적을 칼로 찔러 죽일 때가 많았다. 그것도 표적이 호위병과 시종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황에서. 피다이는 표적 휘하에서 일하는 신분을 획득했을 때에도 보통 일부러 공공장소에서 그를 칼로 찔렀다. 은밀한 방법을 깔보면서 가장 직접적이고 눈에 띄는 방법으로 표적을 살해함으로써 니자리파는 자신이 적의 보안 조치를 얼마나 하찮게 여기는지 보여주었다. 아무리 보안 조치를 취해도 자신을 도저히 방해할 수 없음을 드러내서, 잠재적인 표적과 일반 대중에게 모두 자신의 능력과 성공 사례를 널리 광고한 것이다._201쪽
한편 샤르니는 부대와 함께 불로뉴 문 앞에서 기다리며 불안감을 감추고 시간도 보낼 겸 롬바르디아인들에 대한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았다. “저 롬바르디아인은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 우릴 여기서 얼려 죽일 작정인가.” 샤르니가 말했다. 그러자 페팽 드 비에르가 대답했다. “장군님, 하느님께 맹세코 롬바르디아인들은 교활합니다. 놈도 지금쯤 금화를 일일이 살펴보고 있을 겁니다. 혹시 가짜가 섞여 있나 하고요. 금액이 맞는지도 확인할 겸 해서요.” 그때 마침내 불로뉴 문이 열렸다._213쪽
반역을 저지른 여자들은 화형을 당하지만, 잉글랜드의 남자 반역자들은 1241년부터 교수형 뒤 시체를 조각내는 벌을 받았다. 이 형의 집행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반역자를 모든 사람 앞에서 처형장까지 끌고 간 뒤, 교수형을 집행하되 목이 부러져 죽기 전에 줄을 끊어 그를 아래로 내린다. 그리고 아직 의식이 있는 반역자의 생식기를 잘라 그의 눈앞에서 불태운 다음, 창자를 끄집어내 역시 불에 태운다. 마지막으로 시체의 목을 베고, 목이 없는 시체를 다시 네 조각으로 자른다. 이 네 조각과 머리는 보통 여러 공공장소에 전시되어 왕의 법과 힘을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_234쪽
중세와 근대 초기의 많은 제국들은 기존의 군주 가문들이 자손을 생산하지 못한 덕분에 세워진 경우가 많다. 수백 년 동안 외부의 침략을 막아낸 왕국이나 제후령도 왕실의 씨가 마르면 통째로 잡아먹혔다. 군주가 정당한 후계자를 내놓지 못하면, 탐욕스러운 친척들과 이웃나라들이 곧 독수리 무리처럼 그 주위를 맴도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다음에 침략 전쟁이나 내전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군주의 자손이 딸밖에 없을 때에는, 공주의 지참금을 노리는 구혼자들이 역시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원래 서로 원수 같은 사이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아라곤과 카스티야가 각각 영국과 스페인으로 통일된 데에도 이런 사정이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근대 초기의 가장 위대한 제국을 건설한 경위도 마찬가지다._249쪽
프랑스 내전은 잉글랜드의 침공에도 거의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이제 내전은 부르고뉴 공작과 젊은 프랑스 왕세자인 샤를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들은 헨리가 노르망디의 수도인 루앙을 점령한 뒤에야(1419) 비로소 화해하는 데 동의했다. 장 공작과 샤를 왕세자는 평화회담을 위해 몽트로 다리에서 만났다. 양자 간에 영구적인 평화를 약속하고 잉글랜드에 맞서 함께 싸우기로 약속하는 것이 회담의 목표였다. 하지만 평화회담은 엉망이 되었다. 순간적인 충동이었는지 미리 계획된 음모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왕세자 측 수행원 한 명이 전투 도끼로 장 공작의 머리를 쪼개버린 탓이었다._252~253쪽
루이는 무장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장원 주위에 도랑을 파고, 철창을 담처럼 둘렀다. 장원의 네 귀퉁이에는 두꺼운 철판으로 망루를 지어 석궁병 스무 명을 배치하고, 성문이 열리기 전에 접근하는 사람이 보이면 무조건 활을 쏘라고 지시했다. 밤이면 성문은 항상 굳게 닫혔고, 아침에도 여덟 시 전에는 결코 열리지 않았다. 400명의 궁수들이 성문을 지키면서 밤낮으로 주변을 순찰하며 기습을 경계했다. 루이는 특히 인근 마을과 도시를 감시하고, 수상쩍은 외지인을 쫓아내라고 그들에게 지시했다. 코민은 승승장구하던 왕이 생의 마지막 몇 달 동안 마치 사로잡힌 범죄자처럼 자신만의 두려움 속에 갇혀 살았다면서, 인간의 얄궂은 운명을 돌아보는 말을 남겼다_318~319쪽
카를은 성공을 확신한 나머지, 공식적인 역사서 집필을 맡은 파울루스 요비우스에게 다가올 승리를 기록할 지면을 많이 남겨두라고 지시했다. 마르탱 뒤 벨레는 황제가 프랑스를 배신하고 자신에게 붙은 용병대장에게서 프로방스의 상세한 군사지도를 얻었다고 썼다. 16세기 초에 군사지도는 아직 신기한 물건이었다. 카를 5세는 이 지도를 얻고 몹시 흡족해하며 철저히 지도를 연구하는 데에 “자신의 욕망과 애정을 모두 쏟아부었다.” 지도를 손에 넣었으니 그 지역을 이미 손에 넣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정도였다._328쪽
그러나 그를 눈여겨본 중요 지휘관들이 곧 죽어버렸기 때문에, 몽뤼크는 1528년에 불만에 차서 군대를 떠날 때까지도 하급 장교에 머물러 있었다. 그가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전리품은 호박단 30엘이 전부였다. 그는 이 천으로 부상당한 팔을 싸매고, 남은 천은 팔이 충격을 받지 않게 완충재로 썼다. 그러고 나서 6년 동안 그는 가스코뉴에서 가난한 지주로 살면서, 나바라 왕의 군대에서 일반 중장병으로 복무했다. 가정을 이루어 살면서도 그는 전쟁을 꿈꾸고, 안달하며 짜증을 냈다. 프랑수아 1세가 1534년에 다시 적대행위가 시작될 것을 예상하고 새로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을 때, 몽뤼크는 자신이 그동안 만든 수많은 아이들과 농사를 아내에게 맡겨버리고 30대의 나이로 기꺼이 군에 다시 입대했다._342~343쪽
몽뤼크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들에게 화승총을 쏜 파수병은 지금쯤 다시 장전하느라 여념이 없을 터였다. 아주 편안한 상황에서도 화승총 장전에는 적어도 1분이 걸렸다. 그렇다면 지금 몽뤼크의 부대가 상대해야 하는 화승총은 두세 정밖에 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타반 영주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일부러 용감하게 함정에 머리를 들이밀 작정이었다. 그러나 몽뤼크가 그의 팔을 잡고 뒤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뒤에 서 있던 병사를 붙잡아 안쪽으로 밀어버렸다. 확실히 명예에도 한도가 있는 모양이었다._3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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